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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尹潽善]

독립운동과 반독재운동의 선봉에 서다

1897년(고종 34) ~ 1990년

윤보선 대표 이미지

윤보선

윤보선기념사업회

1 개요

윤보선(尹潽善)은 1897년 충청남도 아산에서 개화한 기독교인 윤치소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에서는 개화사상가로 이름을 날린 윤치호를 배출하는 등 기독교와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윤보선은 이런 분위기에서 미국 선교사 및 이승만, 이상재 등 기독교계 인물들과 어린 시절부터 교류하였다. 일본에 유학을 갔으나 신해혁명에 자극을 받은 그는 중국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임시정부의 내분이 심해지면서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고고학으로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과의 친분으로 서울시장, 상공부장관 등을 역임하였으나 독재에 저항하여 반이승만투쟁을 함께했다. 이승만 하야 후 민주당 정부의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5·16쿠데타 후 하야하였다. 박정희가 집권 후 독재체제를 확립해가면서 이에 저항하여 반독재투쟁을 이끌며 굵직한 민주화운동의 현장에 함께 하였다.

2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영국에서 공부하다

윤보선은 1897년 8월 26릴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났다. 개화한 기독교인인 아버지 윤치소와 어머니 이범숙 사이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치소는 1911년 한국인 공업회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경성직뉴를 운영하였고, 안동교회(서울 안국동에 위치)의 장로이기도 했다. 또한 1920~30년대에는국채보상운동, 국산품장려운동, 민립대학 기성회, 임시정부의 후원 등에 참여하는 등 민족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후원하였다, 같은 집안으로는 개화사상가로 이름을 날린 윤치호가 윤보선의 당숙이었다.

서구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집안의 분위기로 윤보선은 어릴 때부터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미국 선교사들과도 자연스럽게 접촉하면서 성장하였다. 어린 시절에는 충남 아산과 부친이 살던 서울의 교동 집을 오가며 조부 윤영렬과 한학자들로부터 한문과 유학을 배웠다. 10세 때인 1907년에는 관립 한성고등소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10년에는 서울 진고개에 있던 닛슈즈(日出)소학교 5학년에 편입해 2년 뒤 졸업하였다. 소학교 재학 중 YMCA(기독교청년회)를 출입하며 이승만이나 이상재 등의 인물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하여 1913년 게이오 의숙에 진학하였으나 중간에 그만두고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했지만 역시 중간에 그만두었다.

1915년 18세의 나이로 민영철의 딸과 결혼하여 딸 완구를 낳았지만 중국 신해혁명과 같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의 독립운동을 꿈꾸던 윤보선은 1917년 상해로 가서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가 신규식(申圭植)의 집에서 4년간 머물렀다. 신규식은 윤보선에게 ‘해위(海葦: 바닷가의 갈대처럼 약해 보이지만 억센 파도에도 꺾이지 않는 지조를 갖고 살라는 의미)’라는 호(號)를 지어줄 정도로 동지이자, 스승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윤보선은 1920년 3월 13일 23세의 나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신규식이 독립운동을 위해 창간한 주간지 『진단』의 발행을 돕는 한편, 1921년에는 자금난에 시달리던 상해임시정부를 위해 대통령 이승만의 부탁을 받아 일본에 밀입국해 독립운동자금 3,000원을 모금하기도 했다.

한편 임시정부에서는 내부의 갈등과 분열, 재정문제로 활동이 점점 어려워져가면서 미래의 지도자를 육성하는 방안을 모색했고, 윤보선에게 유학을 권유했다. 유학지는 의회정치가 발달한 영국이었다. 윤보선은 이 권유를 받아들여 1921년 6월 영국으로 향했다. 영국에는 글래스고우 대학 의학부에서 유학 중이었던 당숙 윤치왕(尹致旺)이 있었고, 당숙의 도움을 받아 글래스고에 있던 스캘리시 학교와 우드부룩 컬리지를 거쳐 에든버러대학에 고고학과에 진학해 석·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대학 졸업 후 윤보선은 약 2년 간 유럽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는 한편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중 집안에서 귀국하라는 요청에 의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던 윤보선의 이력은 일경의 감시를 불러왔고, 해방되기까지 윤보선은 칩거생활을 하였다.

3 한민당 활동과 반이승만 투쟁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면서 윤보선은 김성수, 장덕수 등 해외 유학파 지식인들과 정당결성작업에 참여했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한민당으로 보수적인 민족주의 계열과 유학파, 개화파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윤보선은 군정청 농상국 고문과 경기도지사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1947년 4월에는 경영난에 빠진 민중일보(民衆日報)를 인수하여 경영하였으며, YMCA로 인연을 맺은 이승만의 귀국과 이후 활동을 돕기도 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1948년 제헌의회 선거 후 이승만이 국회의장에 당선되면서 비서실장이 되었으며, 12월에는 제2대 서울시장이 되기도 하였다. 서울시장 재임기이던 1949년 1월 6일 여성 신학자 공덕귀(孔德貴)와 결혼하였다. 1949년 상공부 장관에 임명되었고, 전쟁 중에는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5월에 일어난 ‘부산정치파동’은 윤보선이 이승만과 완전히 결별하는 계기가 되었다. 윤보선은 반이승만세력이 결집된 민국당의 중심이 되었고, 1954년 5월 실시된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종로 갑구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었다. 1954년 6월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발췌개헌’이 강행되면서 강력한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1957년 5월에는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 1958년 제4대 민의원, 1959년민주당 최고위원이 되면서 야당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굳혀갔다. 특히 신익희(申翼熙)·조병옥(趙炳玉) 등 민주당 구파의 핵심 인사들이 잇따라 사망하면서 김도연(金度演)과 함께 구파의 중심인물로 부상하였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전방위적으로 자유당의 부정선거가 있었고, 이에 대해서 민주당의 최고위원으로 3·15부정선거 진상조사단장을 맡아 자유당 정부의 부정선거 진상조사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결국 부정선거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이승만 정권은 붕괴되었고, 새롭게 치루어진 선거에서 민주당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4 제2공화국의 대통령

내각제 하에서 신파와 구파는 대통령과 총리 자리를 두고 경쟁하였다. 구파의 대표격이었던 윤보선은 제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윤보선은 총리에 구파인 김도연을 지명하고자 하였지만 표결을 통과하지 못해 신파인 장면이 총리로 지명하였다. 윤보선은 대통령 취임 후 대통령 집무실이었던 경무대(景武臺)를 청와대(靑瓦臺)로 개칭하는 동시에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우는 등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내각제 하에서 대통령은 실권이 없었다. 내각 구성에서도 구파가 배제되면서 총리였던 장면과 대립하면서 국민들에게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윤보선은 이런 상황에서 발생했던 5·16군사쿠데타를 진압하는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것은 군부세력의 정권 장악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쿠데타 직후에도 대통령직을 유지하던 윤보선은 군부세력과 갈등을 겪은 끝에 결국 1962년 3월 22일 하야하였다.

5 반독재투쟁과 민주화운동

안국동 사저로 돌아온 윤보선은 2년간의 칩거생활을 거쳐 1963년 10월 민정이양을 앞두고 실시된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다. 이 대결에 박정희를 윤보선에서 대해서 ‘가식의 자유민주의’로, 윤보선은 박정희에 대해서 색깔론으로 맞섰다. 선거결과는 고작 15만 7천여 표 차이로 역사상 가장 근소한 차이의 패배였다. 이에 대해서 윤보선은 부정선거와 관권선거가 자행된 선거라고 평가하면서 “사실상의 정신적 대통령”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대선 패배 후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당선이 되면서 박정희에 저항하는 야당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964년에는 정부의 한일회담 추진에 대해서 유진오, 함석헌, 장준하 등과 ‘대일(對日) 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출범시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65년에는 민주당과 범야권세력이 중심이 된 민중당(民衆黨)을 창당했고, 1966년에는 신한당(新韓黨)을 창당해 총재가 되었다. 1967년 대선을 앞두고 야당이 통합된 신민당(新民黨)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116만여 표 차이로 크게 패배하였다.

이후에도 박정희의 독재에 계속 저항하여 1969년 3선개헌 추진에 대해 ‘3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주도하며 연대투쟁을 전개하였고, 1973년에는 유신체제에 저항하기 위해 ‘헌법개정 청원운동본부’를 구성하고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였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5년형을 구형받기도 하였다. 1976년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명동사건, 1977년 3·1민주구국선언,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 등 굵직한 민주화운동의 현장에 함께 하였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김영삼, 김대중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안국동 자택으로 불러 설득하였으나 실패하면서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하지만 1980년 국정자문위원회 위원, 1986년 민족사바로잡기 국민회의 의장을 역임하고, 1987년 대선 당시 노태우를 지지하는 등 신군부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1990년 7월 18일 안국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고, 고향인 충청남도 아산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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