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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李承晩]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1875년(고종12) ~ 1965년

이승만 대표 이미지

이승만

국가기록원

1 개요

이승만(李承晩)은 대한민국 초대, 2대, 3대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이다. 개항기에는 독립협회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였고, 미국으로 유학하여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제강점기에는 미국에 머물면서 외교독립 노선을 주장했으며, 1919년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나 1925년 탄핵당했다. 2차대전 기간에는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서 대미 외교를 벌였다. 1945년 해방 직후 귀국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 및 남한 단독정부 수립 운동을 펼쳤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재임기간 중 3년간의 6·25 전쟁을 겪었다. 1950년대에는 여러 차례의 개헌과 부정선거를 통해 영구집권을 꾀하였으나 1960년 4·19로 대통령 직에서 하야하였고, 그 직후 하와이로 망명하여 여생을 보냈다.

2 몰락한 왕족의 후손, 개화운동에 투신하다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에서 출생했다. 그는 세종대왕의 형으로 유명한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혈연 상으로는 조선 왕실의 종친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집안은 직계 7대조로부터 이승만에 이르기까지 벼슬에 오른 사람이나 생원·진사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몰락한 왕손 집안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왕족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이승만의 내면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준 것으로 보이며, 후일 그가 미국에서 체류하는 동안 대외적으로 왕족 의식을 표명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승만은 비교적 일찍부터 서구 문물에 눈을 떴고, 이를 바탕으로 1890년대부터 각종 개화 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1895년 미국 선교사들이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했으며, 1896년부터는 배재학당 내의 청년단체인 협성회에 적극 참여하고 이를 기반으로 언론·정치 분야의 청년 개혁가로 활동을 개시했다. 1898년에는 만민공동회에 연사로 참여하면서 독립협회 활동에 적극 가담했고, 『제국신문』의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박영효 쿠데타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1899년 1월 체포·투옥되었다. 이 때부터 이승만은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에 걸친 감옥생활을 하게 되는데, 감옥생활은 역설적으로 이승만이 나름의 사고 체계를 확립하고 독서를 통해 다양한 분야를 학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승만이 옥중에서 도서실과 학교를 설치해 운영하고, 자유롭게 집필 활동을 하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기간 이승만은 기독교도가 되었는데, 기독교로의 개종은 이후 이승만의 삶의 행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04년 8월 석방된 이승만은 미국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이승만은 1905년 2월 조지워싱턴 대학교(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 입학해 학사를, 이어서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에서 석사를(1910년 3월), 프린스턴대학교에서 1910년 7월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최소 12년이 소요되는 학위 과정을 5년 반 만에 마친 것인데, 이는 그가 한국에 선교사로 가서 목회 활동을 하겠다고 서약했기 때문에 주어진 특혜였다. 그는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에 필요하다며 하버드와 프린스턴에 2년 내 박사학위 보장을 요구하기도 했다.

3 일제시기 활동 : 외교독립 노선 추구

이승만은 유학을 마치고 1910년 8월 귀국, 2년간 선교 활동에 매진하였으나 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압박을 받자 미국행을 선택, 1945년 10월 귀국 때까지 계속 미국을 기반으로 활동했다. 1913년부터는 하와이로 거처를 옮겨 교육 및 선교 활동에 집중했다.

이승만은 일제강점기 내내 일관되게 ‘외교독립 노선’을 고수했다. 그는 한국의 독립을 서구인의 여론에 호소하거나 강대국의 외교정책에 편승하는 등의 방식이 유일하게 현실적인 독립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무장투쟁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특히 그의 ‘외교활동’의 주요 대상은 미국으로, 이승만의 대미 외교는 미국 의회 및 행정부를 대상으로 한 청원 외교, 일반 시민 및 여론을 대상으로 한 여론 선전 및 호소로 이루어졌다. 이는 한편으로는 국제정세에 대한 이승만 나름의 판단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한국인들 자신의 독립 노력을 평가절하함으로써 일종의 ‘독립 부정’의 논리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승만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에 의해 대통령 직에서 탄핵당하게 되는데, 이승만이 대통령 취임 후 정부 소재지인 상하이에 머문 기간이 6개월에 불과할 정도로 직무 수행이 성실하지 않았다는 것과 그가 1919년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에게 국제연맹의 한국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 등이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후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교민 단체, 한인 학교,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40년대 들어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운이 감돌자 다시 전면에 나설 기회를 잡았다. 1941년 이승만은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복원, 대미외교를 위한 주미외교위원부를 설립하고 그 위원장이 되었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 이승만은 주미외교위원부를 통해 임시정부를 한국의 정식 정부로 승인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이미 내부적으로 전후 한국에 대해 신탁통치 실시를 구상 중이었던 미국은 이 요청을 거부했다. 이승만은 또한 1942년부터는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통해 항일 운동을 독려하는 라디오 단파 방송을 하기도 했다.

4 해방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이승만은 활동 무대를 국내로 옮겼고, 강경한 반공주의 및 남한 단독정부 수립 노선을 내세우며 활동했다. 그는 1945년 10월 귀국 이후,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1945년 12월 말 이른바 ‘신탁통치 파동’이 발생한 이후에는 김구 등과 더불어 반탁진영의 중심에 섰다. 이승만은 강경한 반소련·반공 태도를 견지했고,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통한 정부 수립 등 미국과 소련의 타협에 의한 한국 문제 해결 방안에도 부정적이었다.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직후인 1946년 6월 이승만은 ‘정읍발언’을 통해 ‘남쪽만의 임시 정부 또는 위원회 조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일찍부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1947년 가을 미소공동위원회가 최종적으로 결렬됨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타협에 의한 통일 정부 수립이 사실상 좌절되자 이승만은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유엔 감시하에 실시된 1948년 5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이승만은 그 해 7월 국회에서의 선거를 통해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통해 전근대적 소작제도를 철폐하고 농민 생활의 안정을 꾀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친일행위 조사 및 처벌을 위해 조직된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함으로써 친일파 청산의 좌절을 야기하기도 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하며 1953년 7월까지 지속된 6·25전쟁은 이승만 정권이 본격적으로 장기 집권을 추구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했다. 먼저 이승만은 1951년 안정적인 집권 기반을 창출하기 위해 자유당을 창당했다. 1952년 5월 국회가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하며 자신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국회를 압박하고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에서 국민들의 직접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직선제로의 개헌을 추진, 이를 관철시켰다. 이를 ‘발췌개헌’이라 하며, 개헌에 힘입어 1952년 8월 이승만은 대통령에 재선될 수 있었다.

한편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6·25전쟁 휴전협상에 지속적으로 반대했다. 휴전협상이 타결을 향해 가던 1953년 6월에는 기습적으로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하여 미국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승만 정부는 휴전협정에 서명하지는 않되 조인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미국과 타협했고, 휴전협상 과정에서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5 영구집권 추구와 몰락

휴전 이후 이승만은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제도적 차원에서는 각종 관제단체와 헌병대·특무대·경찰 조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이념적 차원에서는 북진통일론과 반일주의를 강조했다. 대내외적 위기가 찾아왔을 때 다양한 형태의 관제시위를 통해 여론을 동원하고 대통령 중심의 단결을 강조하는 모습은 1950년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이승만의 영구집권 시도는 더욱 노골화되었다. 1954년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이 이루어졌다. 원래 헌법상 대통령 임기는 4년이고 총 2회까지만 재임이 가능했는데,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회수의 제한 없이 대통령에 계속 당선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이렇게 개정된 헌법에 의해 치러진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세 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1956년 선거에서는 경쟁자인 진보당의 조봉암이 상당한 득표를 하고, 대통령 유고시 직책을 승계하게 되어 있는 부통령에는 여당 후보인 이기붕이 낙선하고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는 등 이승만에 대한 지지가 흔들리는 양상이 보이기도 했다.

1956년 선거에서 나타난 민심의 이반은 이승만 정권으로 하여금 1960년 3·15 부정선거라는 헌정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를 자행하게 만들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승만과 이기붕을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4할 사전투표,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 야당의 선거 참관인 축출 등 노골적인 선거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국민들의 분노는 임계점을 넘었고, 4·19가 발생하게 된다. 이승만은 이에 굴복하여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한 후 5월 말에 자신의 오랜 활동 근거지였던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승만은 몇 차례에 걸쳐 귀국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후속 정부들은 이를 거부했고, 결국 1965년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했다.

4·19 이후 이승만에 대한 한국 사회의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으나, 1990년대 이후 보수 진영 일각에서 이승만 재평가 논의가 등장하면서 이승만의 공과를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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