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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張起呂]

한평생 인도주의를 실천한 의사

1911년 ~ 1995년

장기려 대표 이미지

장기려가 설립한 복음진료소를 모체로 한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전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장기려(張起呂)는 외과의사이자 사회사업가이다. 일제시기 외과의사가 되어 평양연합기독교병원 등에서 일했고, 해방 후에는 평양의과대학에서 일하다가 6·25전쟁 중 월남하여 서울대, 부산대, 가톨릭대 등에 재직했고 특히 복음병원을 설립하여 오랜 시간 동안 가난한 이들을 치료하는 데 헌신했다. 1968년에는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발족시켜 한국의 의료보험제도 및 공공의료 체계의 정립에도 기여했다. 그는 평생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의료 활동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평생 인술(仁術)을 실천한 헌신적인 의사로 평가받고 있다.

2 가난한 이들을 돌보기 위해 의사가 되다

장기려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했다. 호는 성산(聖山)이다. 부친 장운섭은 한학에 능한 기독교인으로, 장기려는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적 배경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장기려는 부친이 설립한 의성학교를 1923년에 졸업하고 개성의 감리교 계통 학교인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학교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던 장기려는 의사가 되기로 결정하고, 의사가 되면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의사가 되겠노라 하나님께 서약했다. 그는 1928년 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모체 중 하나인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의전)에 입학했다. 참고서를 구입할 돈이 없어 필기한 노트만 가지고 공부를 해야 할 정도로 장기려가 처한 환경은 열악했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공부했고, 그 결과 1932년 경의전을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예를 안았다. 졸업하는 해에 김봉숙과 결혼했다.

경의전을 졸업한 장기려는 1938년 4월까지 경의전 외과학교실 조수로 근무했다. 조수로 근무하는 6년 여의 시간 동안 장기려는 외과 분야의 기본적인 술기와 지식을 익히는 데 힘썼을 뿐만 아니라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에 대한 세균학적 연구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1935년 3년차 조수 시절에 급성담낭염 및 담도결석으로 고생하는 환자를 치료하며 외과의사로서 첫 수술을 경험했다.

장기려는 경의전에서 계속 근무하며 교수로서 보다 안락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사가 되겠다는 처음의 서약을 지키고자 다른 길을 택했다. 장기려는 1938년 경의전 외과학교실 조수에서 강사로 승진했다. 장기려의 스승이자 일제 시기 대표적인 조선인 외과의사 중 한 사람이었던 백인제(白麟濟)는 장기려가 자신의 뒤를 이어 외과학교실에서 교수로 남아주기를 바랐고, 우선 그를 도립대전의원 외과 과장으로 추천했다. 도립대전의원 외과 과장직은 일제시기 관제에 따르면 고등관급 직책으로, 식민지배하의 조선인이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려는 이러한 길을 선택하지 않고, 평양의 기독교 계통 병원인 평양연합기독교병원 근무를 택했다.

장기려는 1940년 평양연합기독교병원에 부임했다. 그는 병원 내 다른 의사들의 텃세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수술비가 없는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월급으로 피를 사서 종종 수술을 해주는 등 묵묵히 의사로서의 직무를 수행했다고 전해진다. 이 기간 장기려는 나고야(名古屋) 제국대학에서 급성화농성 충수염에 대한 세균학적 연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43년에는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어려운 수술로 여겨진 간암에 대한 설상절제수술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3 분단과 전쟁의 격동 속에서 인술의 터전을 닦다

장기려는 1945년 8월 묘향산에서 요양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직후 38선 이북 지역에는 소련군이 진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자들이 헤게모니를 잡았다. 북한 정권 하에서 기독교인들은 반체제 세력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독실한 기독교인인 장기려도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는 북한 정권으로부터도 병원과 환자에 대한 헌신적 태도를 인정받아 중요한 직책들을 수행했다. 장기려는 평남제1인민병원 원장 겸 외과 과장을 거쳐 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외과학 강좌장에 올랐다.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장기려는 남한으로 내려오게 된다. 1950년 10월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장기려는 평양에 세워진 국군 야전병원과 유엔 민사처 병원에서 일했다. 12월 초 중국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장기려는 남한 행을 택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먼저 피난을 떠난 아내 그리고 차남을 제외한 4명의 자녀들이 남한으로의 피난에 실패하면서 영영 헤어지게 되는 비극을 겪었다. 장기려는 이후 죽을 때까지 북에 남은 나머지 가족들을 만나보지 못했으며, 북에 가족들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수시로 정보기관의 감시에도 시달려야 했다.

장기려는 가족과 헤어진 비극 속에서도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평양을 떠나 부산으로 온 장기려는 1951년 6월까지 제3육군병원에서 일했다. 그러던 중 장기려는 전영창 등과 함께 부산 영도의 한 창고에서 전재민과 빈민에게 무료 진료를 제공하기 위한 복음진료소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장기려의 의료 활동의 거점이 된 복음병원의 시작이다. 복음진료소 설립은 전영창 등이 미국에서 모금해 온 5천 달러의 성금이 기반이 되었고, 여기에 유엔한국민사지원사령부(UNCACK)의 약품 원조가 더해졌다. 개원 초기에는 하루 평균 60여 명의 환자를 진료하였으나, 3개월 후에는 100명이 넘는 환자가 매일 몰려왔다. 1951년 12월 복음진료소는 당국으로부터 정식 병원으로 인가를 받고 명칭을 ‘복음의원’으로 바꾸었고, 1956년에는 부산 송도에 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했으며, 1961년에는 정부로부터 비영리의료기관으로 개설 허가를 받고 명칭을 복음병원으로 바꾸었다. 한국전쟁 기간 중 장기려와 복음의원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환자들에게 금전적 대가를 받지 않고 치료에 진력하며 많은 생명을 살려냈다.

장기려는 대학에서 교육자로서의 활동도 병행했다. 1953년부터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를 겸직하게 되어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복음의원 진료와 대학 강의를 병행했고, 1956년에는 서울대를 사직하고 부산대학교 의대 교수로 부임하여 외과를 창설했다. 1959년에는 한국 최초로 간암 환자에 대한 대량 간 절제술에 성공했으며, 이 연구 업적으로 1961년 대한의학협회 학술상(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는 가톨릭대학교 의대 외과 교수로 근무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장기려는 교수로 활동하는 기간 중에도 복음병원의 영세민 진료 및 의료 봉사를 놓지 않았다. 부산기독의사회를 조직하여 행려병자들을 찾아가 치료하기도 했고, 수술비가 없는 환자들에게는 무료로 수술을 해주기도 했다.

4 간질환자들을 돌보고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다

장기려는 간질환자들을 돌보는데도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간질은 한 때 ‘심령적인 질병’으로 간주되었던 만큼 간질환자들은 사회의 편견과 배제에 노출되기 쉬웠다. 장기려는 1969년 부산에 간질환자들의 모임인 ‘장미회’를 설립하고 회장이 되었다. 장기려는 매월 복지관에 모인 간질 환자들을 치료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관점에서 그들의 인생의 고민을 경청해주려 많은 노력을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장기려는 1968년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여 한국 사회의 의료 공공성을 제고하는 데도 기여했다. 한국 정부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제도를 본격적으로 실시한 것은 1977년이다. 1977년 7월 50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 및 부양가족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이 실시되었고, 이후 1980년대를 거치며 의료보험 적용대상이 전 국민으로 확대되었다. 이처럼 정부가 나서서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하기 10년 전부터 장기려는 의료 혜택의 보편적 확대라는 문제의식 하에 민간 의료보험조합을 설립·운영한 것이다.

장기려는 1951년 제3육군병원 신문을 통해 의료보험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밝히기도 하는 등 오랫동안 이 문제에 천착했다. 장기려는 성경연구모임인 ‘부산 모임’에서 채규철을 만나 의료보험조합에 대한 구상을 보다 구체화할 수 있었다. 채규철은 덴마크 정부의 초청으로 하슬레브 대학에서 1년간 공부하고 돌아왔는데, 유학 기간 중 의료보험제도의 혜택을 받아 무료 치료를 받았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의료보험조합의 설립을 제안했다. 이에 장기려는 채규철, 김서민, 조광제 등과 함께 조합 설립을 위한 구체적 작업에 착수, 1968년 723명의 조합원을 모아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발족시켰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진실·사랑·협동이라는 3대 정신을 근간으로 내세웠고, ‘건강할 때 이웃을 돕고 병이 났을 때 도움을 받자’는 표어를 내세웠다. 청십자의 첫 가입자는 기독교 사상가이자 민주화 운동가인 함석헌이었으며, 조합원들은 소정의 가입비와 매달 월 보험료 60원이라는 저렴한 비용만 지불하면 되었다. 당시 자장면 한 그릇이 50원 정도였음을 감안할 때 상당히 저렴한 수준의 보험료였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높은 치료비로 병원행을 주저했던 많은 서민들이 의료 서비스를 자유롭게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1974년 말 시점에서 총 4,648세대 19,730명의 회원을 확보하며 성장했다.

5 의료인의 사표(師表)로 기억되다

장기려의 삶은 안락한 길을 거부하고 인술과 인도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연속이었으며, 그의 삶의 궤적은 지금까지도 많은 의료인들의 귀감으로 남았다. 그는 76세가 되던 1987년까지 환자의 곁을 지켰고, 80세가 넘어서도 자신이 20여년 전에 쓴 교과서의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노력할 정도로 끝까지 의사의 본분을 다하고자 했다. 장기려는 1995년 12월 타계했고, 남과 북에 각각 남은 그의 후손들 중 상당수가 의료인으로 일하며 그의 유지를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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