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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張勉]

제1공화국의 부통령과 제2공화국 내각책임제 정부의 국무총리

1899년(고종 36) ~ 1966년

장면 대표 이미지

1956년 민주당 부통령 후보 장면 박사

사이버선거역사관(중앙선거관리위원회)

1 개요

189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인천성당 소속인 박문학교와 수원농림학교, 서울중앙기독청년학과 영어과를 졸업하였다. 미국으로 건너가 맨해튼대학교에서 수학하였고, 귀국 후 가톨릭 평양교구에서 일하였으며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교장이 되었다. 해방 이후 유엔한국대표단 수석대표와 초대 주미대사, 제2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가톨릭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인이자 민주당 신파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1956년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1960년의 4월 혁명 이후 내각책임제의 제2공화국에서 국가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국무총리직을 역임하였다.

2 가톨릭 신앙의 엘리트 교육자

장면은 1899년 8월 28일 서울 종로구 적선동 외가에서 7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장기빈(張基彬)은 원래 평남 출신이었는데, 16살 때 인천으로 이사왔고, 서울의 관립학교에서 영어를 익힌 다음 대한제국의 탁지부에 들어가 인천해관에서 일하게 되었다. 장면의 부모는 모두 가톨릭을 믿어 온 사람들이어서 장면은 태어나면서 가톨릭 신자였다.

장면은 인천성당 소속인 박문학교를 마친 뒤 15살 때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서울중앙기독청년학관 영어과에 진학하여 용산천주교 신학교에서 강사로 일했다. 장면은 신학교에서 나중에 대주교가 되는 학생 노기남을 만났다.

장면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다른 민족지도자들과는 달리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당시 천주교와 신학교의 방침에 따라 일체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1920년 서울기독교중앙청년학관 영어과를 수석 졸업한 뒤 미국 맨해튼대학교에 입학하여 교육학을 전공하고 종교학도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면서, 로마에서 열린 한국 순교자 시복식에 한국 천주교청년회 대표로 참석하여 교황 비오11세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이때 가톨릭 수뇌부와 직접 접촉한 경험은 나중에 그의 외교활동에서 큰 자산이 되었다.

1925년 8월 귀국한 장면은 6년 동안 가톨릭 평양교구에서 다양한 일을 맡으면서 저술·번역 작업을 했다. 1931년에는 가톨릭계인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1936년 교장이 되었다.

3 정계 입문 이후 유엔한국대표단 수석대표와 주미대사, 국무총리 역임

해방 이후 장면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치의 세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장면과 미군정의 조우는 천주교와 군정청 사이의 통역을 맡아보면서 이루어졌다. 1946년 2월 장면은 가톨릭계의 대표로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의원의 의원이 되었다. 이어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역임하였고, 1948년의 초대 국회의원선거(제헌의회 선거, 5·10총선)에서 종로을구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선거 과정에서 가톨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장면의 의원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1948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제3차 유엔총회에 한국 대표단을 이끌고 조병옥, 장기영, 정일형, 모윤숙, 김활란 등과 참가하여 한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승인받는 임무를 맡았다. 장면은 9월 9일 파리로 향했다. 여기에서 장면이 수석대표로 임명된 것은 이승만이 가톨릭계의 힘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12월 12일 유엔총회는 한국 승인 결의안을 상정하여 55개 국 가운데 찬성 48, 반대 6, 기권 1표의 절대적인 지지로 통과시켰다. 한국 승인의 임무를 완수한 장면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로마로 이동, 교황 비오12세를 단독 알현하였다. 교황청은 다음 해 4월 17일 한국정부를 정식 승인했다.

1949년 1월 1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승인한다는 발표가 있은 직후인 1월 5일, 장면은 초대 주미대사에 임명한다는 정부의 훈령을 받았다. 주미대사로서 장면은 한국전쟁 발발 시에 미국을 위시한 유엔의 군사적 지원을 얻어내는 활약을 했다.

전쟁 중이던 1950년 11월에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국무총리로 지명되었다. 국회는 11월 23일 찬성 148표, 반대 6표의 압도적인 표차로 장면을 총리로 인준했다. 장면은 1951년 1월 28일 미국에서 귀국하여 2월 3일 총리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의 정치적 위상은 높아졌고, 야당과 원내자유당은 이승만 대신 장면을 내각책임제 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공작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1년 11월, 장면은 파리 유엔총회에 한국측 수석대표로 참석하였고, 회의가 끝난 후에도 간염치료를 이유로 두 달 이상 해외에 머물다가 이승만의 귀국 종용을 받고 1952년 4월에 귀국했다. 그 후 사표를 내고 부산의 미군병원에 입원한 채 부산정치파동의 혼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장면은 혼란의 순간에 적극적으로 앞에 나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보이지 못했다.

4 이승만 정권의 독재 속에서 부통령에 당선

장면이 정치 활동을 재개한 것은 1955년 9월 민주당 창당을 전후한 시기였다. 민주당은 신익희를 대표최고위원으로 하고, 장면, 조병옥, 곽상훈, 백남훈을 최고위원으로 선정하였다. 장면은 이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민주당은 한민당에 뿌리를 둔 구파와 원내자유당계와 이북파, 흥사단계 등이 포함된 신파로 파벌이 나뉘었다. 장면은 신파의 리더였다.

민주당은 창당 후 다음해에 있을 정부통령선거를 준비하게 되었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는 신익희로 기울어져 있었고, 초점은 부통령후보였다. 1956년 3월 28일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신익희와 장면이 압도적인 다수표로 정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호남 유세에 나섰던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열차에서 뇌일혈로 급서하였다. 민주당에서는 부통령 후보만을 내게 되었고, 장면은 5월 15일의 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의 이기붕을 약 20만 표 차이로 따돌리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승만의 독재와 자유당의 폭정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반영된 투표 결과였다.

대통령중심제에서 부통령은 실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사오입개헌으로 인해 대통령 궐위 시에 부통령이 그 자리를 승계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만 81세의 고령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이 서거하게 되면 장면이 대통령을 이어받고 민주당이 집권여당이 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장면은 이승만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으며 심지어 민주당 구파마저 그를 견제하게 되었다.

부통령 취임 한 달여 만인 1956년 9월 29일에는 암살 시도까지 있었다.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열린 민주당전당대회에서 장면은 김상붕이 쏜 총에 왼손을 맞았다. 총알은 손의 옆면을 관통하여 경상에 그쳤다. 김상붕은 현장에서 “조병옥 박사 만세”를 외치며, 이 사건이 민주당 신·구파의 갈등 때문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 했으나, 저격 사건의 배후에는 김종원 치안국장과 이익흥 내무부장관이 있었다. 혼란 속에서 장면은 국무총리와 부통령 자리를 거치면서 점차 정치인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었다.

5 4월 혁명 이후 제2공화국 내각책임제 정부의 국무총리

장면은 1960년의 3·15선거에서 다시 부통령 후보로 출마해서 이기붕과 맞붙었는데, 부정선거에 의해 무려 700여만 표 차이로 낙선했다. 이 선거로 인해 4월 혁명이 발발하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게 되었으며 제1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6월 15일 국회는 압도적인 지지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통과시켜 대통령중심제를 대체하게 되었다. 내각책임제에서는 대통령의 권한이 크게 줄고, 국무총리가 국무위원을 임명하는 등 국가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7월 29일에 있었던 총선에서 민주당은 압승하였고, 국회에서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장면을 국무총리로 선출하였다. 장면 내각은 8월 23일 출범했다. 그러나 신·구파의 파벌 싸움으로 인해 출발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구파는 총선 직후부터 분당을 하겠다며 신파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신민당을 결성했다.

장면 국무총리는 취임 첫인사로 경제 제일주의를 내세웠다. 장면 정부는 인프라 조성사업으로 전력을 중시했고 중소기업 육성에 힘을 썼다. 또한 국토 개발 사업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1961년 4월 말에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안을 완성했다. 그러나 집권에 성공한 민주당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혁명의 완성’이었다. 그럼에도 장면 정부는 과거청산과 관련된 국민들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는 적절한 조치를 과단성 있게 취하지 못했고 혁명 완수에 소극적이었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 청산의 문제, 즉 부정선거 원흉 처리 문제, 반민주 활동자 처벌문제, 부정축재자 문제 등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장면 총리는 혁명의식이 빈곤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또한 각종 시위와 반정부운동에 대해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관대하고 신중하게 대응하였는데,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끌려 다닌다는 인상을 주었다. 포용력과 조직력, 정보력에서 미약하다는 평가도 있다. 장면은 성실한 관료처럼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였고, 온화고 정직한 성품을 바탕으로 민주적인 가치관과 이상을 품고 있었지만, 혁명적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

장면 정권은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인해 9개월여 만에 막을 내렸다. 이후 장면은 군사정권의 정치정화법으로 인해 연금생활을 강요당했고, 이주당 사건이라는 반혁명음모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1966년 6월 4일 지병인 간염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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