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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曺奉岩]

평화통일을 선구적으로 주창하다

1899년(고종 36) ~ 1959년

조봉암 대표 이미지

조봉암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1 개요

조봉암(曺奉岩)은 일제시기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농림부 장관과 국회부의장 등을 지낸 정치인이다. 조봉암은 일제시기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주의 계열 정당 및 사회단체에서 활동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중도 통합노선’을 주장하며 공개적으로 전향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임명되어 농지개혁을 추진하였으며, 1950년에는 2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고 국회부의장에 선임되었다. 1952년과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며, 특히 1956년 선거에서는 평화통일론을 주장하며 주목받았다. 그러나 1956년 선거 이후 이승만 정부는 조봉암을 위협적 인물로 인식하여 그를 제거하고자 했고, 그 결과 조봉암은 1958년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1959년 7월 사형당했다. 이승만 정부의 조봉암에 대한 탄압은 그 당시부터 논란의 대상이었으며, 2011년 대법원은 재심을 통해 조봉암의 국가변란 및 간첩행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2 일제시기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다

조봉암은 1899년 강화도에서 출생, 1911년 4년제 소학교인 강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13년에는 2년제 농업보습학교를 마쳤다. 집안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아 바로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고, 1919년까지 강화군청 고용원, 면서기, 대서보조원 등으로 일했다.

1919년 3·1 운동은 조봉암을 민족해방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조봉암은 고향 강화에서 열린 3·1운동에 가담하여 1년간 옥고를 치르게 된다. 조봉암은 후일 3·1 운동은 자신으로 하여금 ‘한 개의 한국 사람이 되게 하였고’, ‘나를 붙잡아서 감옥으로 보내준 일본 놈은 생을 통해서 일본제국주의와 싸운 애국 투사가 되게 하였다’고 회상했다.

출옥 후 조봉암은 공부를 병행하며 본격적으로 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1920년에는 상경하여 YMCA 중학부에서 공부했고, 1921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와 주오(中央) 대학 전문부 정경과에서 공부했다. 당시 일본의 사상계에는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가 팽배했고, 당시 많은 조선인 유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조봉암도 사회주의에 심취하게 된다. 1921년 11월 조봉암은 박열 등과 함께 재일유학생 최초의 사회주의단체인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1922년에는 소련 웨르흐네스크에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통합을 위한 회의에 국내 대표로 참석하였고, 약 8개월 간 소련이 세운 혁명가 양성기관인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서 공부했다.

1920년대 초반의 이러한 경험들이 바탕이 되어 조봉암은 1920년대 중반 조선공산당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1925년 4월 1차 조선공산당이 결성될 때 조봉암은 중앙검사위원에 선임되었고, 조선공산당에 대한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정식 승인을 받기 위해 조선공산당 부대표 자격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1차 조선공산당은 1925년 말 ‘신의주 사건’으로 조직이 드러나 와해되었는데, 사건 당시 상하이(上海)에 체류하고 있던 조봉암은 체포를 피할 수 있었다. 이후 조봉암은 1930년대 초반까지 중국을 무대로 활동하였으며,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의 조선 대표 등을 지냈다.

조봉암의 활동이 활발해질수록 탄압의 강도도 높아졌다. 1932년 조봉암은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국내로 압송되어 7년 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조봉암은 출옥 후에도 일본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운동을 이어가기는 어려웠고, 인천 비강조합의 조합장 일을 하며 지냈다.

3 사회주의 노선을 버리고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하다

해방 이후 조봉암은 사회주의에서 전향을 선언하고 새로운 방향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 조봉암은 좌익계 단체들의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였던 박헌영의 활동을 비판하는 등 좌익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고, 1946년 6월 공개적으로 전향을 선언했다. 조봉암은 “노동계급의 독재”와 “자본계급의 전제(專制)”를 동시에 비판하면서 좌와 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 노선을 표방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노선을 표방한 조봉암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1948년 5·10 총선에 출마, 당선됨으로써 제헌국회 의원이 되었다. 제헌국회 의원이 된 조봉암은 소장파 의원들의 모임인 무소속구락부의 간사로 활동하는 동시에,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이승만 정부에 입각했다. 당시는 농민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토지개혁이 시급한 국가적 과제로 거론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농림부 장관의 정치적 중요성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 농림부 장관에 오른 조봉암은 1949년 초까지 농지개혁을 완료하고 1948년 안에 농업협동조합을 만든다는 ‘농촌종합개발계획’을 입안하는 등의 성과를 냈다.

정부 수립 초기 조봉암은 친이승만계 단체인 이정회, 대한국민당 등에서 활동했지만, 1951년 6월 경부터 신당 창당을 추진하며 독자적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조봉암은 1952년 8월 부산정치파동의 결과로 치러진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 출마, 법률을 무시하는 위법 정치를 단호히 타파하여 의법(依法)정치 확립할 것, 책임정치로 관기를 숙정하고 이도(吏道)를 쇄신할 것, 권력·금력에 의한 특권정치의 발호를 일소할 것을 3대 강령으로 제시했다. 조봉암은 공산주의자라고 공격을 받는 등 험난한 선거 운동을 치렀지만 총 79만여 표를 획득하여 이승만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4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지고

1955년 가을부터 조봉암은 서상일, 신도성, 장건상 등의 혁신계 인사들을 규합하여 진보적 신당 창당에 나섰다. 전쟁이 끝난 지 2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동안 위축되어 있던 중도파와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이 다시 활동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또한 1956년 정·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둔 당시의 조건은 진보적 신당 결성의 강력한 동인으로 작용했다. 조봉암을 중심으로 한 혁신계 인사들은 1955년 9월 ‘광릉회합’을 기점으로 비자유당, 비민주당의 혁신세력을 규합하는 정당 운동을 본격적으로 개시했다. 조봉암이 운동을 주도하는 가운데 신당의 명칭은 ‘진보당’으로 결정되었고, 1955년 12월 진보당 발기취지문과 강령 초안이 발표되었으며, 1956년 1월 진보당추진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조봉암·진보당은 평화적 방식에 의한 남북통일, 피해대중의 단결,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에 모두 반대하는 제3의 길 등을 강령으로 제시했다. 이 중 평화통일 주장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이승만 정권이 무력 북진통일만을 유일무이한 통일의 방법론으로 규정하고 이를 국민들에게 강요하는 상황에서 조봉암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었다. 1950년대 중엽의 한국 사회에서는 북한과의 타협이나 정치적 방법에 의한 통일을 거론하는 것만으로 친북·용공으로 몰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은 구체적인 통일의 경로나 통일 후 어떠한 형태의 국가 체제를 구축할지 등에 대해서는 명확한 해답을 내놓지 못한 한계도 지니지만, 전쟁 직후의 극심한 냉전적 분위기에서 선구적으로 평화통일을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조봉암은 평화통일론을 내세우며 1956년 5월 정·부통령 선거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이승만 정부가 경찰·행정 조직을 동원해 집요한 방해 공작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조봉암은 대통령 선거에서 선전했다. 이승만은 전체 906만여 표 중 504만 표를 획득, 55%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조봉암은 낙선했지만 216만여 표를 획득했다. 1952년 선거에서 이승만이 74%의 지지를 받았던 것을 상기하면 이는 이승만과 집권 여당인 자유당이 위기감을 느낄 수 있는 결과였다. 특히 이승만이 서울에서 유권자의 3분의 1정도밖에 득표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집권층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선거 후 조봉암은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졌다”고 자평했는데, 실제로 선거 부정이 없었다면 조봉암이 훨씬 더 많은 지지를 받았을 것이라는 예상도 많았다. 조봉암은 비록 선거에서는 패했지만 이승만의 대항마로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확실히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5 진보당 사건

그러나 조봉암의 높아진 정치적 위상은 그를 죽음으로 내모는 신호탄이었다. 영구집권을 꿈꾸던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의 존재를 눈엣가시로 여겼고, 조봉암과 진보당을 제거하기 위한 조치에 착수했다. 1957년 가을부터 정우갑, 박정호 간첩 사건 등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조봉암에 대한 조사 가능성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1957년 11월 정부는 ‘평화통일론에 대한 엄단’을 명목으로 국가보안법 개정을 추진하는데, 이는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명시적인 탄압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958년 1월 ‘진보당 사건’이 시작되었다. 서울시 경찰국은 진보당 간부들이 북한과 내통하여 사회주의 제도로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 10인은 간첩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1958년 2월 육군 특무대는 ‘양명산 사건’을 발표, 조봉암이 북한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이승만은 조봉암 구속 직후부터 ‘조봉암은 벌써 조치되었어야 하는 인물’이라고 강조하며, 조봉암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한 1심 판결은 ‘말도 안 되고’, 자신이 해당 판사를 ‘처단’하려는 생각까지 했다고 언급하면서 사법부를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이러한 압력의 결과 1959년 2월 대법원은 조봉암에 대한 사형 판결을 확정했고, 1959년 7월 최종적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조봉암에 대한 판결은 그 당시부터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면서 그를 사면·복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2007년 9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진보당 사건에 대한 국가의 사과와 재심을 권고했고, 2011년 1월 대법원은 재심을 통해 조봉암의 국가보안법 위반과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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