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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당[扃堂]

고구려의 청소년 교육기관

미상

1 개요

경당(扃堂)은 고구려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였던 교육기관이다. 신라의 화랑도(花郞徒)와 같은 청소년조직을 개편하여 설립된 기관으로서 왕도 및 지방의 주요 도시에 소재하였다. 경당에서는 하급 귀족으로부터 상층민 이상의 미혼 자제가 수학하였다. 경당에 참여하였던 고구려의 청년들은 유학 경전(經典)을 읽고 활쏘기 등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관료나 군인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2 기록에 보이는 경당

고구려의 경당에 대해서는 중국 측 사서인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 그 자세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먼저 『구당서』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습속은 서적(書籍)을 매우 좋아하여, 문지기(衡門)·말먹이(廝養) 따위의 [가장 미천한] 집에 이르기까지 거리(街衢)마다 큰 집을 지어 경당(扃堂)이라 부른다. 자제(子弟)들이 결혼할 때까지 밤낮으로 이곳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책은 5경(經) 및 『사기(史記)』·『한서(漢書)』·법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손성(孫盛)의 『진춘추(晋春秋)』·『옥편(玉篇)』·『자통(字統)』·『자림(字林)』이 있다. 또 『문선(文選)』을 대단히 귀중하게 여긴다.

한편, 『신당서』 고려전(高麗傳)에서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사람들이 배우기를 좋아하여 가난한 마을(窮里)이나 미천한 집안(廝家)까지도 서로 힘써 배우므로, 길거리마다(衢側) 큼지막한 집을 지어 경당(扃堂)이라 부른다. 결혼하지 않은 자제(子弟)들을 이곳에 보내어 글을 외고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인은 서적을 좋아했고, 또 배우기를 즐겼다고 전한다. 경당은 그러한 고구려 청년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였던 기관이었다. 또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인들은 가난하고 미천한 지위에 있던 사람들도 경당에서 배움에 힘썼다고 하며, 특히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자제들이 경당에 나아가 책을 읽고 활쏘기를 배웠다고 전하고 있다.

3 경당은 언제 만들어졌고 누가 다녔나?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에 따르면 본래 고구려에는 태학(太學)이라는 국립교육기관이 존재했다. 태학은 고구려 17대 왕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384) 2년(372)에 불교를 받아들이고 이듬해에는 율령을 반포하는 등 일련의 시책이 진행되던 과정 중에 설립되었다. 이에 일찍이 학계에서는 고구려 상류층 자제를 교육하는 관학으로서 태학을 상정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경당은 평민층을 교육하는 교육기관이었을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경당은 신라의 화랑도(花郎徒)와 마찬가지로 원시(原始) 미성년집회(未成年集會)에서 기원한 것으로서 그 성립 연대는 고구려 사회에서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의 요구가 절실해진 광개토왕(廣開土王) 이후, 특히 장수왕(長壽王) 15년(427)의 평양 천도 이후에 성립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 태학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었다면 경당은 촌락에 세워진 자치적인 공동체로서의 성격이 강했을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기록에서도 경당은 태학과 달리 형문(衡門)·시양(廝養)과 같은 미천한 집안 출신의 청년들도 다닐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따라서 경당은 평민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록과 달리 경당에 참여하는 청년들의 신분은 아마도 지방에서도 독서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을 갖춘 평민 이상 계급의 자제였을 가능성이 클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기록에 보이는 ‘형문’·‘시양’과 같은 표현이 찬자의 과장이었다고 보고, 적어도 상층민 이상이 수학하였을 것으로 이해하는 의견도 근래에 제기된 바 있다. 고대 사회에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특권이었음을 고려할 때, 후자의 견해대로 경당에는 적어도 중상위 계층 이상의 자제들이 주로 참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신당서』 고려전에 따르면 경당의 학생 중에는 궁리(窮里), 즉 구석진 마을 출신도 있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중시하여 경당이 지방 촌락에 소재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또 기록에서는 ‘가구(街衢)’·‘구측(衢側)’이란 표현을 통해 경당이 대로변[衢]에 세워졌을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 때문에 이 구절에 주목하여 경당의 소재지가 단순히 지방이 아니라 일정 규모 이상의 도시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근래에 제기되었다. 후자의 견해에서는 경당이 왕도(王都)와 별도(別都)는 물론이고 대성급(大城級) 규모의 지방 주요 도시에도 소재하였다고 파악하고 있다. 이상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경당은 지방의 각 거점도시에 포진한 중상위 신분계층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였던 교육기관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4 경당에서는 무엇을 가르쳤나?

기록에 따르면 경당에서 고구려의 청년들은 책을 읽고 글을 외웠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책은 경전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때 경전은 곧 유교 경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곧 경당에서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유교적 지식과 가치관을 가르쳤던 것이다. 또 『구당서』의 관련 기록에서는 고구려인이 “『문선(文選)』을 대단히 귀중하게 여긴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 주목할 때, 경당에서 이루어지는 독서 교육은 주로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에 집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더불어 경당에서는 청년들이 활쏘기를 익혔다고 전하는데, 이는 어느 정도 군사훈련으로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실제 활쏘기는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육예(六藝)의 하나로 중시되어 주나라의 교육기관인 대학(大學)의 교육 내용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활쏘기 교육은 곧 군사훈련으로서의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요컨대, 경당에서는 유교 교육과 문장 구사 능력 및 군사훈련 혹은 그에 버금가는 무예 수련이 실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을 통해 볼 때, 곧 경당은 고대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충(忠)·효(孝)·신(信) 등 유교적 덕목과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훈육하였던 교육기관이었으며, 그와 함께 활쏘기 등 무예를 가르치고 신체를 단련시키는 군사훈련도 교육 내용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경당에서 고구려의 청년들은 책을 읽고 경전을 외웠으며 활쏘기를 비롯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특히 궁술이 주요 교육 내용의 하나였던 점에서 경당은 신라의 화랑도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교육기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군사훈련기관으로서의 성격도 함께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 경당에 대한 두 가지 시선

앞서와 같이 고구려의 경당이 지방 촌락에 소재하였고 평민을 위한 학교였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경당의 건립이 전국적인 군사동원체계, 즉 국민개병제의 정비를 반영한다고 이해한다. 즉 고구려의 중앙권력이 지방 촌락의 평민까지 군사로 동원하기 위해 기존의 청소년 연령집단을 재편하여 활쏘기와 같은 군사훈련을 실시했다고 본 것이다.

반면, 이와 달리 기록에 경당이 위치한 곳으로 표현된 ‘가구(街衢)’·‘구측(衢側)’ 등의 용어에 주목하여 경당이 왕도와 지방의 주요 도시에 소재했고 또 상층민 이상을 위한 학교였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경당의 출현이 지배층의 정치·사회적 역할이 분화한 결과를 반영한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경당의 학생은 일정 기간 교육을 통해 하급의 실무관원 내지 무관으로 진출하였다고 본다. 고구려 사회의 발전 과정 상에서 지배계층이 다시 상위지배층과 하위지배층으로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하위지배계급을 위한 교육기관의 필요성이 대두하자 경당이 성립하게 되었다고 이해한 것이다.

『구당서』와 『신당서』에서 경당이 지어진 곳이라 전하는 ‘가구(街衢)’·‘구측(衢側)’ 등의 표현을 비롯하여 고구려 경당과 관련한 기록을 세심하게 분석해 볼 때, 경당이 지방 촌락에 소재하였고 평민의 미혼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이라 보았던 기존의 시각은 어느 정도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즉 근래에 제기된 견해에서처럼 경당은 지방의 주요 도시에 포진한 중하위 신분계층의 미혼 자제들을 대상으로 하였던 교육기관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도 중앙에 설립된 태학에 비해 경당은 보다 폭넓은 계층을 수용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었음이 분명하다.

한편, 경당의 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구려 초기의 청소년조직은 결국 전사의 양성에 교육의 주요 목적이 있었다. 반면, 평양 천도 이후로 성립하였다고 추정되는 경당에서는 유교를 교육하고 활쏘기와 같은 기본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양자의 차이점을 생각해볼 때, 경당의 출현은 4~5세기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이행하는 고구려의 역사상과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의 성립과 함께 점차 지배층의 정치·사회적 역할이 분화하게 되었고, 사회적으로는 왕실 보위에 유리한 유교적 가치가 대두하였다. 나아가 6세기 중반 이후 정치체제의 변동과 사회분화의 과정 속에서 그러한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고구려 사회 내부로부터 유교적 가치와 군사훈련을 모두 중시하였던 경당의 역할과 그 필요성은 더욱 커져갔을 것이다. 그 결과 각 지방 거점 지역마다 경당이 설립되고 성행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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