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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國學]

신라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

682년(신문왕 2)

국학 대표 이미지

삼국사기(권8 신라본기 신문왕 2년)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국학(國學)은 유학적(儒學的) 소양을 지닌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신라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이다. 신라의 국학은 당(唐)의 국자감(國子監)을 본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진덕왕 2년에 당을 방문한 김춘추(金春秋)가 국자감의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을 참관한 것을 계기로, 진덕왕 5년 대사(大舍)가 설치되었으며, 신문왕 2년에 이르러 국학이 설치되었다. 경덕왕대에 태학감(大學監)으로 변경되었다가 혜공왕대에 다시 국학으로 개칭되었다. 원성왕대에 이르러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실시되었다. 독서삼품과는 관료를 뽑기 위한 새로운 시험제도였으며 국학 출신자에게는 졸업시험과 같은 성격을 띠었다. 신라 하대에 이르러 도당유학(渡唐留學)이 유행하면서 국학의 위상은 저하되어갔다. 경문왕대에 이르면 국학을 국자감으로 개칭하고 국자감 내에 국자학, 태학 등을 설치하였다.

2 국학의 설치 배경과 김춘추

신라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인 국학은 당의 국자감을 모델로 하였다. 당은 관료의 선발과 교육을 위한 기구로써 국자감을 설치하였는데, 신라가 이를 참고하여 국학을 설치한 것이다. 관료는 자신이 속한 행정관부의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으로서 국가 운영의 필수적 요소이다. 또한 고대국가에서는 관료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 집권체제의 근간이 된다. 이런 점에서 관료의 교육과 양성은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신라의 국학은 중대(中代) 신문왕 2년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관부 정비 과정을 보면 해당 부서의 관원이 먼저 두어지고 이후에 관부가 설치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국학도 대사가 설치되는 중고기(中古期) 진덕왕 5년을 시작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642년 신라는 백제로부터 낙동강 유역 진출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대야성을 비롯한 42성을 함락당하면서 국가적 위기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647년 상대등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다. 선덕왕(善德王)을 지지하고 있던 김춘추와 김유신(金庾信)은 비담의 난을 진압하고 반란이 진행되던 와중에 사망한 선덕왕의 뒤를 이어 진덕왕을 추대하였다. 진덕왕의 즉위로 사실상 실권을 잡은 김춘추는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지배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때 (金春秋)는 대당외교에 주목하였다. 648년 (金春秋)는 그의 셋째 아들인 문왕과 함께 당나라 사행에 나섰다. (金春秋)의 목적은 당과의 군사동맹 뿐 아니라 그동안 간접적으로 전해 듣던 당의 내부 구조와 동향을 직접 살펴 여러 선진문물을 입수하려는 데에 맞추어져 있었다.

당 방문 기간 중 김춘추는 그곳 국학에 가서 석전과 강론을 참관하였다. (金春秋)는 당의 국학을 참관할 정도로 유교적 통치질서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金春秋)는 귀국 이후 신라의 대내외적 모순을 극복하고 강력한 집권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의관제(衣冠) 개편을 시작으로 당 제도의 도입과 더불어 관제개혁을 본격화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전통적 질서에 기반한 귀족적 관료와 달리 국왕에 협력하며 유교적 통치를 보좌해줄 관료 양성을 시도하였다. 바로 진덕왕 5년에 국학의 관료로서 대사 2인을 둔 것인데, 이것이 신라 국학의 시작이라 하겠다.

3 신라 중대 국학의 운영

삼국통일을 거치면서 기존보다 확대된 영토와 백성을 지배하게 된 신문왕은 통치 질서와 지배체제에 대한 개편을 진행하였다. 신문왕은 즉위 이듬해인 682년 관료의 선발을 전적으로 담당하는 관부인 위화부를 정비하였다. 이후 2개월 뒤에는 관료를 양성하는 국학을 세우고 최고 책임자로 경(卿) 1인을 두었다. 관료를 선발하는 위화부와 관료를 양성하는 국학이 같은 해에 정비된 것은 능력 있는 관료를 양성하고, 유능한 관료를 선발하겠다는 신문왕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이처럼 진덕왕 5년 대사의 설치로 시작된 국학은 신문왕 2년에 이르러 제도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문왕 2년 국학의 제도적 완비에 실무적 책임을 지고서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은 당대의 최고 지식인으로서 뛰어난 문장가였던 강수와 유교 경전에 대해 탁월한 견식을 갖췄던 설총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학은 유학적 소양을 지닌 인재 양성이라는 목적에 맞게 운영되었다. 먼저 교육내용을 살펴보면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기본 공통 과목으로 삼고 『주역(周易)』, 『상서(尙書)』, 『모시(毛詩)』, 『예기(禮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선(文選)』을 각각 2개씩 묶어 3그룹으로 나누어 가르쳤다.

국학의 재학 연령은 15세에서 30세까지로 당의 국자감에 입학할 수 있었던 연령이 14세에서 19세였던 것을 감안하면 그 연령 폭이 매우 넓었다. 이는 국학이 미성년자에만 한정하지 않고 성년에게도 폭 넓게 허용되었음을 의미한다. 국학의 재학 연령을 넓게 설정한 이유는 당의 국자감이 관품(官品)을 보유한 자에게는 입학이 전혀 허용되지 않은 것에 반해 국학은 대사 이하의 관등을 가진 자는 입학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관등을 가진 성년이 국학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국학이 미성년자 대상의 초사자(初仕者) 교육 뿐 아니라 관료로 진출한 사람의 재교육까지 담당하였음을 말해준다.

국학의 교육과정은 9년을 기한으로 하였으며, 아둔한 자는 중도에 쫓아내거나 재능이 있는 자는 9년이 넘어서도 재학을 허가하였다.

4 국학과 독서삼품과

신라 하대(下代) 원성왕 4년에 새로운 인재등용법으로써 독서삼품과가 시행되었다. 독서삼품과는 이전처럼 골품이나 천거 혹은 궁전(弓箭), 즉 활쏘기로 관료를 선발하는 방식이 아닌 유교 경전으로 시험을 통해 인재를 등용하는 방식으로 신라의 관료선발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였다.

독독서삼품과는 학생들의 유교경전 이해 정도에 따라 상, 중, 하로 나누어 선발하였다. 하품(下品)은 『곡례(曲禮)』, 『효경』을 읽은 사람이었으며, 중품(中品)은 『곡례』, 『논어』, 『효경』을 읽은 사람, 상품(上品)은 『춘추좌씨전』과 『예기』 또는 『문선』을 읽어서 그 뜻에 능통하고 아울러 『논어』와 『효경』에 밝은 사람으로 하였다. 만약 오경(五經)과 삼사(三史) 그리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글에 두루 능통한 사람은 등급을 뛰어넘어 이를 등용하였다. 즉 유교 경전을 읽어 하품, 중품, 상품으로 나누어 관리를 채용하였으며, 오경과 삼사, 제가백가에 능한 사람은 등급을 뛰어넘어 발탁하였다고 한다. 『곡례』와 『효경』을 기본으로 하면서 하품에서 특품으로 올라갈수록 기본적인 것에서 광범위한 지식으로 확대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서삼품과는 국학생 뿐 아니라 도당유학생이나 기타 유학에 대한 지식이 있는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독서삼품과가 비록 국학 학생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이를 통해 관리로 진출하는데 유리하였던 자들은 역시 그들이었을 것이다. 독서삼품과의 시험 과목 편성으로 볼 때 정상적인 과정을 밟아 졸업하는 국학 학생들이라면 상품(上品)에 속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이 9년을 상한으로 배운 과목의 극히 일부분만을 시험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서삼품과는 국학 학생들에게 관료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자 졸업시험과도 같은 의미를 지녔을 것으로 보인다.

소성왕(昭聖王, 799~800) 원년(799)에는 청주(菁州) 거로현(居老縣)을 국학생의 녹읍으로 삼았다. 이는 독서삼품과 실시에 짝하여 국학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보다 확실하게 마련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조치로 보인다.

5 도당유학의 유행과 국학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선덕왕(善德王) 9년 5월에 처음으로 당에 유학생을 파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기록 그대로 믿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전체적인 상황을 볼 때 도당유학은 김춘추가 당을 다녀간 진덕왕 2년 이후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신라의 유학생 파견은 나당전쟁(羅唐戰爭)으로 인하여 잠시 단절되었다가 성덕왕대에 이르러 신라와 당 양국 관계가 호전된 후 다시 진행되었다. 성덕왕 27년 왕의 동생(王弟)인 김사종(金嗣宗)을 당에 보내 왕족이나 고위귀족 자제의 (당나라) 국학 입학을 청하여 허락받음으로써 나당전쟁 이후 끊겼던 유학생이 다시 파견되었다.

신라 중대에는 왕족이나 고위귀족의 자제들을 선발하여 당에 유학시켰다. 따라서 그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대에 들어서는 유학생의 숫자도 크게 늘었고 아울러 유학생의 출신도 다양해졌다. 희강왕 2년 당시 당의 국자감에서 수학하고 있던 신라 학생은 216명이었으며, 문성왕 2년에는 수학 연한을 넘긴 학생 105명을 한꺼번에 집단 귀국하도록 한 일도 있다. 신라에 국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많은 학생들이 당의 국자감에서 공부한 이유는 하대에는 신라 국학생보다 도당유학생이 신라에서 더욱 우대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도당유학생이 늘어날수록 국학 출신자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좁아졌을 것이다. 이처럼 도당유학이 유행할수록 국학의 위상은 저하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경문왕과 헌강왕대에 이르면 다시 국학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경문왕과 헌강왕은 직접 국학에 행차하였으며, 경덕왕대에 태학감으로 변경하였다가 혜공왕대 환원되었던 국학의 명칭을 다시 국자감으로 변경하였다. 또한 당의 국자감의 예에 따라 국자감 체제를 국자학, 태학 등으로 구분하였다. 이는 고구려 후기에 태학이 국자학과 태학으로 구분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경문왕, 헌강왕 대에 국학은 이름만이 아니라 그 구조가 바뀌는 큰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진성여왕 3년부터 농민들이 곳곳에서 봉기하면서 신라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고, 국학의 역할은 유명무실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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