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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학[太學]

고구려의 최고 교육기관

372년(소수림왕 2)

태학 대표 이미지

삼국사기(권8 고구려본기 제6)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태학(太學)은 기록으로 확인되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립 교육기관이다. 고구려 17대 왕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384) 2년(372)에 처음 설립되었으며, 이후로 고구려의 최고 교육기관으로 존속하였다. 태학에서는 귀족의 자제를 대상으로 경학과 군사학 및 무예 등을 가르쳤을 것으로 생각되며, 태학에서 배출한 인재는 곧 고구려 조정의 문무 관료로 출사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태학의 설립은 372년 율령의 반포와 불교 수용 등 고구려에서 일련의 국가체제 정비 시책이 추진되는 과정과 맞물려 진행되었으며, 특히 유교적 소양을 지닌 관료를 배출할 목적으로 세워졌다.

2 국가체제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태학 설립

4세기 중엽 당시 고구려는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371) 12년(342) 고구려는 전연과의 전쟁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고구려의 방어선을 분쇄하고 왕도 환도성마저 함락시킨 전연의 군대는 고국원왕의 부왕 미천왕(美川王, 재위: 300~330)의 시신을 탈취하고 왕모(王母)와 왕경인 5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고구려는 결국 전연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음으로써 전연과의 적대적 관계를 개선할 수 있었다.

이처럼 고구려가 전연과의 전쟁 여파로 어려움에 빠져있을 무렵 남쪽에서는 백제가 고구려를 압박해 왔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가 느슨하게 장악하고 있던 옛 대방군 지역, 즉 황해도 일대를 잠식해 들어오고 있었다. 백제의 북진을 저지하기 위해 고국원왕은 군사를 일으켜 369년과 371년 두 차례에 걸쳐 백제를 선제공격하였지만 패배하였고, 오히려 북진한 백제군에 의해 왕이 머물던 평양성마저 포위되고 만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는 가까스로 평양성을 사수할 수 있었지만, 전투 중에 고국원왕이 백제군의 화살을 맞아 전사하는 참변을 당하게 된다.

이처럼 고국원왕 시대 고구려는 대외적으로 수세를 면치 못했으며, 전쟁 중 왕도가 함락되고 고국원왕마저 전사하자 내부적으로도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된다. 따라서 고국원왕 사후 즉위한 소수림왕은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내치에 전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전쟁에서 여러 번 참패하고 국왕마저 전사하는 위기상황을 겪으면서 고구려 왕실의 위엄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에 소수림왕 2년(372) 고구려는 전진(前秦)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太學)의 설립하였으며 율령(律令)을 반포하는 등 일련의 체제 정비 사업을 진행하였다. 태학의 설립은 바로 이처럼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빠져있던 고구려 왕권이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조치였다. 특히 태학이 설립된 이듬해 고구려에서는 율령이 반포된다. 즉 태학의 설립은 율령에 기초하는 통치체제에 참여할 수 있는 관료층을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고구려의 태학 제도 수용과 관련하여 학계에서는 동진(東晉)의 태학을 받아들였다는 학설과 전진(前秦)을 통해 태학의 제도를 수용하였다는 학설이 맞서고 있다. 그런데 동진에서는 실제 태학의 운영이 부실하였다. 따라서 고구려는 전진의 황제 부견(苻堅)의 영향을 받아 태학 제도를 수용하였을 가능성이 더욱 크다. 전진의 황제 부견은 불교는 물론이고 유교 역시 중시하였으며, 학교의 진흥에도 깊은 관심을 표명했던 군주였다. 특히 강력한 유교진흥책을 실시하며 매월 1차례 태학에 친림하여 박사(博士)와 제생(諸生)을 독려할 정도로 유교와 교육을 중시하였다.

한편, 최근 학계에서는 고구려의 태학 제도 수용과 관련하여 전진 이전에 전연(前燕)의 영향을 고려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즉 전연과의 전쟁에서 참패한 이후 많은 고구려인이 전연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고구려로 되돌아왔고, 이들의 경험을 통해 고구려에서는 이미 지배층의 자제들을 교육하는 ‘학교제도’의 실상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태학 제도는 전연을 통해 먼저 학교제도에 대한 이해를 갖춘 바탕 위에서 전진의 태학 제도를 수용하여 성립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3 고구려 지배층 자제들의 등용문, 태학

태학은 지배층의 자제들을 교육하는 일종의 국립 교육기관이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태학은 ‘유교 교육기관’으로 설립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고구려의 태학 제도 설립에 영향을 주었던 전연의 교육기관인 동상(東庠)이나 전진의 태학에서는 유교만을 교육하지 않았다. 전연과 전진의 교육기관에서는 모두 유교와 함께 군사적인 학문이 함께 다루어졌다.

고구려 역시 전통적으로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중시하였고, 특히 태학이 설립될 시기에는 군사적인 능력을 갖춘 인재가 요구되고 있었다. 따라서 태학 설립 당시 주요 교육내용에는 유교만이 아니라 군사적인 학문과 군사훈련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즉 고구려의 태학에서는 유교를 비롯한 경학과 함께 군사학과 무예 등을 함께 가르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로 보아 결국 태학의 설립은 고구려 왕권을 수행하기 위한 관료군을 양성할 목적으로 시행된 조치라 할 수 있으며, 소수림왕 시대에 진행된 국가체제 정비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태학이 설립된 이듬해인 373년에 율령이 반포되면서 당시 고구려에서는 율령에 바탕을 둔 새로운 지배체제의 구축이 추진되고 있었다. 율령은 곧 인민을 지배하고 국가를 운영하는 기본적인 법체계로서 이를 통해 고구려 왕권은 체계적이고 일률적인 통치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율령에 기초하여 국정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이를 담당할 문서 행정에 능한 관료 양성이 필수적이었다. 곧 태학의 설립은 율령체제 구축을 위한 인재양성기관으로 출발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기록에는 고구려의 태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태학박사(太學博士)의 존재도 확인된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26대 영양왕(嬰陽王, 재위: 590~618) 11년(600)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이란 인물이 왕명으로 『신집(新集)』을 편찬하였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372년 설립된 고구려의 태학은 고구려 후기인 600년 무렵까지도 폐지되지 않고 줄곧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구려의 태학은 소수림왕 시대 이후로 2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고구려의 최고 교육기관으로서 유지되었다.

4 백제와 신라의 태학

태학은 대학(大學)으로도 불렸으며, 그 명칭은 멀리 중국 서주(西周) 시대부터 찾아진다. 서주는 중앙에 국학(國學)을 두었고 지방에는 향학(鄕學)을 두었는데, 이때 대학은 국학의 하나로 소학(小學)과 짝하였다. 대체로 15세 이상의 연령이 입학한 학교가 대학이었고, 그 미만의 연령이 수학한 학교가 소학이었다.

이후 중국 한(漢) 나라 무제(武帝) 시대에 이르면 본격적인 학교제도가 마련되게 된다. 이때 설립된 중앙의 학교가 바로 태학이었다. 이후로 태학은 시대를 거치며 여러 나라마다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였고, 그 명칭도 태학(太學)·대학(大學)·국학(國學)·국자학(國子學)·국자시(國子寺) 등으로 일정하지 않았다.

한편, 태학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한국의 고대 삼국이 모두 설치·운영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통일신라에서도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 2년(682) 국학(國學)을 처음 두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신라의 국학은 경덕왕 시대에 태학감(太學監)으로 고쳐 불렸다가 혜공왕 시대에 다시 국학이라는 명칭으로 복귀하였다. 즉 신라도 국학 혹은 태학이라 불리는 교육기관을 운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백제의 경우는 문헌 기록을 통해 태학의 존재가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에서 발견된 백제 유민 진법자(陳法子)의 묘지명에는 백제의 태학과 관련하여 약간의 정보를 전하고 있다. 즉 「진법자 묘지명」에는 “(진법자의) 증조부는 춘(春)이니 본방(백제)의 태학정(太學正)으로 은솔(恩率)이다(曾祖, 春, 本邦太學正, 恩率).”라는 구절이 전하고 있어, 진법자의 증조부가 백제의 ‘태학정’이란 관직을 역임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진법자 증조부의 활동 시기가 대략 백제 위덕왕(威德王, 재위: 554~598) 시기로 추정되므로 늦어도 6세기 무렵에는 백제에 태학이 설립되었음이 확인된다.

이처럼 고구려를 비롯해 백제와 신라에서도 찾아지는 태학은 모두 나라에서 세운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한원(翰苑)』에 인용된 「고려기(高麗記)」에는 국자박사(國子博士)라는 관직도 보인다. 국자박사는 그 명칭으로 보아 국자학(國子學)의 교수직이었다고 추정되는데, 곧 이를 통해 고구려에서도 태학 설립 이후 어느 시점에 국자학이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자학은 278년 중국 서진(西晉)에서 처음 설치하였고 5호 16국 시대와 남북조시대를 지나며 몇몇 나라에서 운용되다가 당(唐)나라 때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이 건립되면서 국자학-태학의 국학 체계가 정착되었다. 이로 보아 고구려 말기에 가면 고구려에서도 태학과 함께 국자학이 운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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