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려
  • 백련사 결사

백련사 결사

원묘 요세, 대중과 함께 정토를 희구하다

1216년(고종 3)

백련사 결사 대표 이미지

강진 백련사 사적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고려후기 천태종 승려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가 결성한 불교 결사로, 수행 방법에 있어 천태사상에 바탕한 염불정토신앙과 참회행을 특징으로 하며 자질이 낮은 중생까지도 널리 포함하는 대중성을 지녔던 것으로 평가된다.

2 결사의 의미와 기원

동아시아 불교의 결사(結社)는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등장하였다. 중국 동진(東晉)의 승려 혜원(慧遠)이 중국 강서성(江西省)의 여산(廬山)에서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여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수행한 것을 그 시초로 보고 있다. 이후 당과와 송의 시기를 거치면서 불교 결사는 민간까지 그 저변이 확장되며 발전을 거듭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통일신라 이래 결사의 흔적이 나타나며, 특히 고려후기 무신정권 성립 이후 불교계의 사상적 변화와 더불어 개혁적 신앙결사운동의 흐름이 두드러졌다. 그 가운데 양대 결사로 일컬어지는 것이 요세의 백련결사(白蓮結社)와 지눌(知訥)의 수선결사(修禪結社)다.

3 12세기 고려 사회의 혼란상과 불교계의 문제

12세기에 접어든 고려 사회는 정치적으로 소수 문벌의 권력 독점 심화, 사회경제적으로 권세가들의 토지 집적으로 인한 전시과 체제 붕괴가 진행되고 있었다. 사상적으로 불교는 정치와 더욱 밀착되어 극도로 세속화한 양상을 보이던 형편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불교계는 번영의 이면에, 수행의 본질을 잃고 부패와 타락상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결국 1170년(의종 24) 무신의 난이 일어나 고려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정치적 혼란상으로 치닫게 된다. 정치적 혼란과 정변이 지속되는 가운데, 귀족 못지않게 화려한 생활에 젖어 있던 불교계도 무인 세력과 대립하면서 큰 혼란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를 살다간 요세는 자신이 속한 당시 천태종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결사를 시작하였다. 고려에서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11세기 후반 송에서 자신이 접했던 천태종의 관행, 참법, 염불 등의 수행을 계승하였다. 이는 요세도 마찬가지나, 요세의 눈에 비친 고려의 천태종은 올바른 수행을 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수행이 퇴조하고 나태한 상태였기에, 이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송대 천태종의 사상과 실천법을 제대로 수행할 것을 주장하며 결사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4 요세의 생애와 구도행

요세의 자는 안빈(安貧)이고 속성은 서씨(徐氏)로 1163년(의종 17) 10월에 합천(陜川)의 속현인 신번현(新繁縣)에서 호장인 필중(必中)과 동향인으로 역시 서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요세의 아버지가 호장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합천 지역의 토호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2세였던 1174년(명종 4)에 출신지의 천락사(天樂寺)에서 균정(均定)을 스승으로 하여 출가하고 천태교관(天台敎觀)을 수학하였다. 23세에 승과에 합격한 후 천태에 뜻을 두고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한 결과 몇 년 지나지 않아 명망을 얻었다고 한다. 1198년(신종 1) 봄, 그의 나이 36세에 개경의 천태종 사찰인 고봉사(高峯寺) 법회에 참여했다가 그 분위기에 크게 실망하고 개경 땅을 벗어난다. 그 가을에 동지 십여 명과 함께 이름난 산들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영통산(靈洞山) 장연사(長淵寺)에 법당을 열었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李義旼)을 제거하고 집권한 지 2년째 되는 해에 명종을 폐위하고 신종이 왕위에 올랐으며 만적의 난이 발생하는 등 혼란이 이어지던 시기였다. 어지러운 현실과 더불어 불교계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로, 교단의 부패와 혼란을 마주한 요세 역시 같은 시기 수선사의 지눌처럼 은둔과 수행의 길을 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공산(公山)에서 결사를 이끌던 지눌이 요세에게 시를 보내어 함께 수선(修禪)하기를 권하였는데, 요세는 이에 응하여 지눌과 함께 수년간 수행하였다. 후에 지눌은 결사가 커지게 되어 팔공산 거조암(居祖庵)에서 송광산 정혜사(定慧社)로 옮겨가게 되는데, 이때 요세는 따라가지 않고 남원 귀정사(歸正寺) 주지인 현각(玄恪)의 요청으로 귀정사에 머물며 사명 지례(四明知禮)의 『묘종초(妙宗鈔)』를 강의하였다.

위와 같은 정황으로 보아 요세는 지눌과 함께 참선 수행하다 결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 요세에게 모종의 사상적 전환이 있었던 것으로 본다. 1208년(희종 4) 봄에 영암 월출산 약사난야(藥師蘭若)에 머물 때 요세는 ‘만약 천태의 묘해(妙解)를 발양하지 못하면 영명 연수(永明 延壽)의 120가지 병을 어찌 벗어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영명 연수가 『선종유심결(禪宗唯心訣)』에서 지적한 120가지의 병을 극복하려면 천태의 묘해에 의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요세는 참선에서 천태법화신앙에 의한 수행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실천행으로 참회행을 할 것을 강조하였는데, 『묘종초』를 강설하다가 ‘시심작불 시심시불(是心作佛 是心是佛)’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깨달은 바가 있어 자신도 모르게 크게 웃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그는 『묘종초』를 즐겨 강설하고 대중과 함께 참회수행을 하였다.

5 성실한 천태의 수행자 요세의 백련결사

요세는 지극한 참회수행과 준제신주(准提神呪)를 천 번 외는 다라니 염송, 53불을 12번씩 돌며 예경(禮敬)하는 맹렬한 수행을 극심한 더위나 추위에도 매일같이 하루도 쉬지 않고 지속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그의 성씨를 붙여 서참회(徐懺悔)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였다. 그는 『법화삼매참의(法華三昧懺儀)』에 의거하여 법화삼매를 수행하며 정토왕생을 구하고 법화참을 닦을 것을 적극 권하였다.

이 무렵 전남 강진에서 최표(崔彪)•최홍(崔弘)•이인천(李仁闡) 등이 찾아와 만덕산 옛 터에서 수행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1216년(고종 3) 가을, 80여 칸의 절이 완성되자 요세가 낙성법회를 개설하고 주석하였다. 바야흐로 백련결사가 결성된 것이다. 이후 백련결사는 지역적으로 크게 확산되었는데, 1222년(고종 9) 전북 남원 태수 복장한(卜章漢)이 찾아와 관내에 도량을 개설할 것을 요청하여 요세가 남원 백련산으로 갔다가 후에 다시 만덕산으로 돌아왔다.

1228년(고종 15) 천인(天因)과 천책(天頙) 등 개경에서 유학(儒學)을 공부하던 이들이 찾아와 요세에게 출가하였고, 이때부터 결사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증가하여 점점 규모가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1232년(고종 19) 4월 8일에 공식적으로 보현도량(普賢道場)을 설치하고, 1236년(고종 23) 제자인 천책으로 하여금 「백련결사문(白蓮結社文)」을 찬술토록 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백련결사를 표방하였다. 요세는 법화사상을 중시하는 가운데 참회와 다라니신앙, 정토신앙을 몸소 실천하였는데, 이는 보현도량의 수행내용이었다.

특히 「보현도량기시소(普賢道場起始疏)」에는 ‘이미 전도된 물줄기를 돌려 교관을 일으켜 감로수를 한량없는 곳에 뿌렸다’라고 하여 요세가 당시 불교의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해 교관과 송 천태종의 실천수행법을 택했음을 언급하였다. 이러한 요세의 실천과 신앙에는 천태 지의(天台 智顗) 이래 천태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북송 산가파(山家派)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요세는 정토왕생과 지의의 법화삼매를 중요한 행법으로 하였고 이러한 수행은 천인으로 계승되며 백련결사의 주요 수행법이 되었다.

6 백련결사와 무신정권의 관계

요세는 1237년(고종 24)에 고종으로부터 선사(禪師)를 제수받았으며, 1245년(고종 32) 입적한 후 국사(國師)로 추증되고 원묘(圓妙)라는 시호와 중진(中眞)이라는 탑명을 받은 바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요세는 이미 23세에 승과에 합격하였다. 출가 후 승과에 응시한 것은 동시기 다른 고승들과 동일하나, 이후 요세의 행보는 사뭇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요세는 개경의 고봉사 법회 이후 개경과 거리를 두었다. 요세의 비인 「만덕산백련사원묘국사비(萬德山白蓮社圓妙國師碑)」에 의하면 그가 도성 땅을 밟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실제로 개성을 벗어나 지방사회를 거점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요세를 초빙했던 최표가 강진지역 대표적 호족세력이었고 대방태수(帶方太守) 복장한(卜章漢) 등 백련사 개창 당시 요세의 주요 후원세력들 역시 강진과 전라도 일대의 호족과 지방관 등으로, 중앙세력이나 정권과 인연을 맺는 모습은 보이지 않아 지방사회를 거점으로 한 성격을 강하게 나타낸다.

특히 말년에야 선사를 제수 받았다는 기록을 제외하면 그의 행적에서 승계(僧階)나 승직(僧職)을 받았다거나 왕명으로 주석했다거나 하는 이력은 찾아볼 수 없다. 입적 후 국사에 추증될 정도의 고승이라면 승과 급제 후 승계가 승차되며 왕명으로 유수의 사찰 주지를 역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백련결사의 개창자인 요세에게 그러한 이력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 시기 결사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러한 면모는 수선결사의 개창자인 지눌에게서도 보이는데, 중앙 교단을 벗어나 새로운 수행 결사를 지향하고자 한 이들의 경향을 잘 드러낸다.

그러나 요세 문하에 업유자(業儒者), 곧 유학을 공부하던 천인과 천책 등과 같은 인물들이 출가하게 되면서 백련사는 중앙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천책으로 하여금 「백련결사문」을 찬술토록 하는 과정은 백련사가 최씨정권으로부터 관심을 받게 되고 중앙조정의 관료들이 백련사에 입사하게 되는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특히 예부시에 합격하고 문벌에 가까운 신분을 가진 천책의 출가는 그가 유학을 공부하던 시절에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과 동사생 및 좌주-문생 관계에 있던 이들이 적극적으로 백련사에 입사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들의 출가는 왕실 및 무인정권과 백련사의 유대를 두텁게 하는 데 일조하였으며, 이러한 양상은 천인이 요세를 이어 백련사 2세 사주(社主)가 되면서 본격화한다. 천인이 백련사에 주석하면서 지은 두 편의 축수재소(祝壽齋疏)에 그 정황이 잘 드러난다. 하나는 천인이 백련사 사주로서 처음 하안거를 열고 개당 설법할 때 당시 왕인 고종을 위한 축수재를 개최하며 작성한 소문이며 , 다른 하나는 무신집정자 최우를 위해 작성한 소문 이다.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중앙 교단 밖, 또한 수도가 아닌 지방사회에 근거를 두고 결사를 통해 수행에 집중하여 당시 불교의 문제점들을 바꿔가고자 한 신앙공동체는 결국 국가의 승정체제(僧政體制) 안으로 다시 포섭되는 결과를 낳는다. 백련사나 수선사 개창주였던 요세나 지눌이 입적 후 국사로 추증되는 것도 그렇지만, 승과 합격 사실이 없는 업유자 출신의 2세들, 즉 백련사의 경우 천인, 수선사의 경우 혜심(慧諶)이 승계를 지니고 더 나아가 입적 후 국사로 추증되는 것은 이들 결사가 승정체제 속으로 편입되는 것을 보여준다 하겠다. 이는 중앙교단으로의 편입을 의미하는 것으로, 교단 밖에서의 실천을 통해 불교의 변화를 추구한 결사의 원래 정신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현상이 곧 결사의 변질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승정체제는 사찰이나 교단이 존속될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하므로 결사가 계속 유지되기 위해 승정체제로의 편입은 필요한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7 백련결사의 역사적 의미

고려 후기 결사불교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미가 있다. 우선 왕실 및 문벌귀족 중심, 개경 중심의 보수적 귀족적 불교에서 지방 중심의 대중적 불교로 사상사적 전환을 이루었다고 평가된다. 특히 고려후기 결사들은 자신이 속한 교단에의 비판에서 시작되었고, 보수적 소수 문벌들에게 장악되었던 불교계의 모순을 지방의 향리와 독서층이 주도하여 개혁을 도모하였다. 이 시기 결사불교는 수행과 교화라는 두 방향에서 변화를 추구하여 사람들의 호응을 얻으며 영향력을 확대해 갔으며, 그 과정에서 점차 무신정권의 후원을 받게 되고 중앙 세력의 호응까지 이어지며 대몽항쟁기 불교교단의 중심이 된다.

이상이 결사불교의 공통적 의미라면, 특히 요세의 백련결사는 천태사상에 바탕한 염불정토 신앙과 참회행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정토신앙의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서민대중까지 포섭하여 저변을 크게 확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