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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군[승병][僧軍[僧兵]]

군사로 동원된 승려 그리고 노역 담당자

미상

승군[승병] 대표 이미지

처인성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승군(僧軍)은 사원에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사원을 지키고, 또는 군의 일부로 차출되는 부류의 승려이다. 그들은 고려전기 외적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신설된 군 조직 가운데 ‘항마군(降魔軍)’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편제된 적도 있고, 때로 정권의 향방에 따라 권력자의 무력적 기반으로 동원되거나 무장한 저항세력이 되기도 하였다.

승군에 차출되는 승려들은 승도(僧徒) 또는 수원승도(隨院僧徒)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 승도는 군사적으로 동원되는 것뿐 아니라, 역(役)에 징발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국가 공역(工役)에 주요 노동력으로 기능하였는데 사원에 소속되어 승려 집단의 하위를 구성하여 국가에서는 일반 백성을 동원하기 어렵거나 부족할 경우 동원되곤 하였다.

2 군(軍)에 동원된 승려들

승군은 사원에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사원을 지키고, 또는 군의 일부로 차출되는 부류의 승려이다. 이들은 주로 승도, 수원승도로 기록되어 있으며 사원에 소속되어 노역에 종사하며 승려 집단의 하위를 구성하여 자체적으로 사원을 지키는 역할도 하고, 국가에서 군대를 동원할 때 군사로 징발되기도 하였다.

다만 승도의 경우 일부 기록에서는 불법(佛法)을 수행하는 승려 일반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므로 일률적으로 사원에 예속된 하층의 승려 집단, 승군, 역에 동원되는 승려들로만 볼 수는 없다. 예컨대 997년(목종 즉위)에 왕의 즉위를 기념하여 사면령을 내리고 문무관과 승도에게 1급을 더해주었다고 한다. 1084년(선종 1)에 구산문(九山門) 참학(參學) 승도들이 진사(進仕)의 예(例)에 의거하여 3년에 1번 선발을 요청한 바 있다. 즉 승도는 대체로 수원승도, 재가화상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1010년(현종 1)에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였고 지채문과 탁사정이 승려 법언(法言)과 함께 군사 9,000명을 이끌고 참전하여 거란 군사들의 머리 3,000여 급을 베었다. 승려 법언은 이러한 전공(戰功)을 세우고 전사하여 후에 고위 승계(僧階)에 해당하는 수좌(首座)로도 추증되었다.

이후 1102년(숙종 7)에 윤관이 여진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2년 뒤인 1104년에 거란과의 전투에 대비하려는 목적으로 기존의 무반과는 별도의 무관 조직인 별무반(別武班)을 신설하였다. 그리고 별무반 산하에 ‘항마군(降魔軍)’을 설치하여 승도를 편제하였다. 이때 동원된 이들은 수원승도로 기록되어 있다. 그 존재 양상에 대한 설명도 부기되어 있는데 그들은 사원에 예속된 존재로서 군현의 일반 백성과 같았고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며 많게는 천백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러한 수원승도의 모습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묘사된 재가화상(在家和尙)과 통한다. 1123년(인종 1)에 고려에 체류한 송 사신단의 일원인 서긍(徐兢)은 고려 승려의 다양한 층위를 거론하면서 재가화상을 소개한 바 있다. 여기에는 그들은 집에 거주하며 혼인하여 자식을 기르면서 자기 기용(器用)을 휴대하며 공상 공역에 동원되고 전쟁이 발발하면 자기 식량을 가지고 군대의 일부로 참여하여 용감하게 싸웠으며 고려가 거란에 승리한 것도 그들의 힘이라고 언급되어있다.

1216년(고종 3)에 거란을 격퇴하기 위해 개경 사람들 중에 종군이 가능한 자들을 군대에 속하게 하였는데 승려도 동원되었다. 1232년(고종 19)에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하자 몽고 장수 살례탑이 처인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처인성에 피난해 있던 승려 김윤후가 화살을 쏘아 살례탑을 죽이는 성과를 낸 바 있다. 그는 백현원(白峴院)에 있던 승려였다. 이후 1359년(공민왕> 8)에 홍건적이 침략하였을 때도 승도가 동원되었다. 왕은 전 첨의찬성사 권적에게 승병을 거느려 정벌하도록 하였다.

승군이 국가에서 민란을 진압할 때도 동원되었음은 물론이다. 1135년(인종 13)에 묘청 일파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김부식이 파견되었고 이때 종군한 승려 관선이 도끼를 메고 선봉으로 나가 적을 공격하여 십 수인을 죽여 관군이 승리의 기세를 타고 서경을 대파시켰다. 또 승려 상숭이 도끼를 메고 역격하여 십 수인을 죽여 적을 달아나게 하였다는 기사도 전한다. 이때 활약한 관선, 상숭은 승려 개인의 활약이라기보다는 그들이 거느린 승병들의 성과라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김부식이 진압에 임하는 과정에서 토산을 쌓았을 때 동원된 승도 550명도 있었는데 이들 역시 종군한 승려들이었을 것이다.

1176년(명종 6)에 공주 명학소 민 망이와 망소이 등이 당여를 불러모아 공주를 함락하였다. 2월에 왕이 장사 3,000명을 모집하여 대장군 정황재에게 남적을 토발하게 하였다. 병마사가 아뢰기를 장졸이 많이 전사하였으니 승려를 모집하여 군대를 정비하기를 요청하였다. 장사 3,000명으로 망이 망소이 등의 남적과 싸웠으나 불리해져 승군을 모집하여 보강한 것이다.

승도는 때로 정권의 향방에 따라 권력자의 무력적 기반으로 동원되거나 무장하여 저항하기도 하였다. 1126년(인종 4)에 왕이 외조부이자 장인이었던 권신 이자겸을 축출하려 하였을 때 의장이 현화사의 승도 300여 명을 동원하여 대응하였다. 현화사 승려 의장은 의 아들이었다.

1217년(고종 4)에는 흥왕사(興王寺)·홍원사(弘圓寺)·경복사(景福寺)·왕륜사(王輪寺)·안양사(安養寺)·수리사(修理寺) 등의 승려들중 종군하는 이가 최충헌을 죽이기를 도모하여 먼저 공역 선동자였던 김덕명의 집을 파괴하고, 최충헌의 집으로 향하다가 살해당하였다. 이때 죽은 승도가 800여 명이었다. 같은 해 대장군 지윤심을 양광충청도방어사로 삼아 도내병 및 승군을 통솔하여 거란을 방어하게 하기도 하였다.

3 역(役)에 동원된 승려들

수원승도(隨院僧徒)는 많은 기록에서 반은 승려이고 반은 속인[半僧半俗]의 성격을 띠어 사원에 예속된 승려의 하층부로 묘사되는데 재가화상(在家和尙)의 개념과 통한다. 수원승도에 대해서는 그 성격이 다양하게 논의되어왔으며 기본적으로 사원의 토지를 경작하는 전호(佃戶)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에 더하여 사원의 사병(私兵) 또는 국가에서 동원하는 군사의 성격이 짚어지기도 하였다. 이는 수원승도의 존재 양상이 사료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수원승도가 선발되어 군대의 일원으로 편제되거나, 전투에 동원된 것이 승군이었다. 그들은 외침 혹은 민란이 발생하였을 때 적극 활용되었고 실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또한 사원 자체가 당대의 권력자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으므로 이들 승도는 권력의 향방에 따라 무력적 기반으로 동원되기도 하였고, 또는 그들 스스로가 무장한 저항 세력이 되어 권력자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인종대 이자겸, 무신집권기 등 권신(權臣)의 행보에서 두드러진다. 이 경우 수원승도는 승려 집단의 일원이기는 하지만 수계(受戒)하여 수도(修道)에 매진하는 승려 일반이 아니라 승려 집단의 하부에 위치하는 존재로서 군사적 성격을 띠는 승군이 된다.

수원승도는 군대 이외에 국가에서 진행하는 대규모 역사(役事)에도 많이 동원되었다. 주로 왕실 사원을 지을 때 또는 건축물을 조영할 때 활용되었다. 일반 백성들은 농사에 메어있으므로 농번기를 피해야 하였다. 그런데 승도의 경우 수도자는 아니어도 사원에 소속된 승려이므로 신역(身役)의 의무에서 벗어나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각자의 식량을 마련해가며 일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노는 손[遊手]'으로 여겨졌다. 국가에서 역사에 이들을 동원하는 것은 백성을 힘들이지 않는 방법일 뿐 아니라 국고를 낭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장점으로 이해되었다.

한편 승군을 노역(勞役)에 동원된 승도의 다른 이름으로, 보다 유연하게 파악하기도 한다. 고려시대 ‘군(軍)’은 전쟁에 동원되는 부류 외에도 왕실의 진영(眞影)을 모셔둔 진전(眞殿) 사원에 배정된 위숙군(圍宿軍) 과 같이 전쟁이나 무장 군인과는 거리가 먼 부류도 군으로 칭해졌고, 조선초에는 승군으로 칭해지면서 역사에 동원되는 승려들의 모습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인종대 서경의 반란을 진압하는 전투가 전개되던 중에 김부식은 전략의 일환으로 토산(土山)을 쌓았다. 이때의 역사에 승도 550명이 동원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전쟁 중의 역사였기 때문에 이들 승도는 승군의 일원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즉 수원승도는 군대에 동원되면 승군으로 역할을 하였고, 역에 동원되면 노동력으로 기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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