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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행성[征東行省]

고려 속의 원(元), 정동행성

1280년(충렬왕 6) ~ 1356년(공민왕 5)

1 개요

정동행성은 원 간섭기 고려와 원을 매개하던 관청이다. 1280년(충렬왕 6) 8월 원의 일본 원정을 지원하기 위한 군사기구에서 시작되어 통치기구로 변모하였다. 정동행성의 등장을 계기로 고려 국왕은 정동행성승상(征東行省丞相)에 임명되어 원의 관료제 속에 위치하게 되었으나, 고려와 원 관계의 특수성에 의하여 정동행성의 위상 및 역할은 원에서 설치한 여타 행성들과는 차별화되었다. 하지만 양국 관계의 안정성이 흔들릴 때마다 원의 지방관청이라는 태생적 한계로 인하여 정동행성은 논란의 중심에 놓였고, 결국 1356년(공민왕 5) 공민왕(恭愍王)의 반원운동(反元運動)에서 개혁 대상 일순위에 오르게 되었다.

2 군사기구에서 통치기구로

정동행성은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의 약칭이다. 일본 원정을 위하여 원 중서성에서 지방에 설치한 출장 기관을 의미한다. 몽골은 동아시아 정벌을 단행하면서 정복지에 행성을 설치하였는데, 남송의 멸망 이후 행성은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어 오늘날 중국 지방 단위인 성(省)의 시초가 되었다. 원 제국 내지(內地)에 설치된 이들 행성은 대규모 군사 활동을 원조하거나 정복지의 사무 처리를 위한 임시기구로 설치되었다가 지방 통치를 위한 관청으로 상설화된 것이었다. 고려의 정동행성 또한 도입 과정에서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1280년 8월, 제2차 일본 원정을 앞둔 원 세조(世祖)는 정동행성을 설치하여 전방사령부의 역할을 위임하고 흔도(忻都)와 홍차구(洪茶丘)를 우승(右丞)에 임명하였다. 이어 10월에는 충렬왕(忠烈王)의 요청에 따라 충렬왕을 좌승상(左丞相)으로 삼았다가 12월에 우승상(右丞相)으로 승진시켰다. 정동행성은 일본 원정군의 출정에 맞추어 1281년(충렬왕 7) 3월 고려로 이전되었고, 제2차 일본 원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다가 원정이 실패함에 따라 1282년(충렬왕 8) 1월에 폐지되었다. 이후 1283년(충렬왕 9) 1월에 다시 설치되어 4월 충렬왕이 정동행성 좌승상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원 내부 사정으로 원정이 중지되자 1284년(충렬왕 10) 5월에 폐지되었다. 1285년(충렬왕 11)에도 일본 원정 논의와 함께 재설치되었으나 군사기구로서의 필요성이 사라지면 다시 폐지되기를 반복하였다. 이와 같이 임시 군사기구로서 치폐를 반복한 전기 정동행성을 연구자들은 ‘군전행성(軍前行省)’으로 분류하고 후기 정동행성과 구분한다.

1287년(충렬왕 13) 5월 충렬왕이 행상서성평장정사(行尙書省平章政事)에 임명됨에 따라 정동행성은 고려에 다시 등장하였다. 이때 행중서성에서 행상서성으로 명칭이 바뀐 것은 원 관부의 위상 변화에 따른 것이다. 후기 정동행성으로 불리는 1287년 이후의 정동행성은 원 내지 행성들의 관청화(官廳化) 추세에 조응하여 통치기구로 변모하였다. 이전과 달리 정동행성은 고려 조정과 별도로 원 조정에 하성절사(賀聖節使)나 하정사(賀正使)를 파견하였고, 유학제거사(儒學提擧司)·좌우사(左右史)·이문소(理問所)·도진무사(都鎭撫使)와 같은 소속 관부와 낭중(郎中)·원외랑(員外郞)·도사(都事) 등 소속 관원을 두었다. 하지만 정동행성은 원 내지 행성들처럼 실질적인 지방통치기구로 기능하지는 못하였다. 대부분의 시기 동안 정동행성은 고려 내정에 관여하지 않고, 고려와 원을 매개하는 외교업무 또는 일본방어 정도의 제한적 기능만을 수행하였다.

3 정동행성승상이 된 고려국왕

1280년 10월 충렬왕의 자청으로 정동행성좌승상의 직위가 주어짐으로써 고려국왕은 원의 관료제 안에 위치하게 되었다. 충렬왕의 선례를 토대로 이후 즉위한 고려국왕들은 대체로 정동행성승상·부마·고려국왕이라는 복합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원의 관료이자 황실의 사위, 그리고 일국의 국왕이라는 상이한 정체성은 원 간섭기 내내 고려국왕권의 원천이 되어 때로 국왕권을 공고히 만들기도, 제약하기도 하였다.

충렬왕이 정동행성승상을 자청한 이유는 원 간섭기 초반 부원세력(附元勢力)의 횡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 부원배였던 흔도·홍차구는 원 간섭기가 시작되던 원종(元宗) 재위기부터 공공연하게 고려국왕의 권위를 실추시켰고, 제1차 일본 원정 시에는 원수(元帥)의 직책을 맡아 고려로 들어와 군권을 남용하고 물자를 약탈하였다. 나아가 원 조정에 고려를 모함하여 수차례 고려를 곤경에 빠뜨렸다. 충렬왕은 세조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통혼하여 원 황실의 부마가 되었음에도 이들 부원배를 충분히 제압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충렬왕은 제2차 일본 원정을 앞두고 전방사령부인 정동행성의 승상을 자청함으로써 비로소 정동행성우승인 흔도·홍차구보다 상위의 지위를 획득하여 이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원의 입장에서는 고려국왕을 정동행성승상에 임명함으로써 고려로부터 일본 원정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약속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고려국왕의 정동행성승상 임명은 양국의 이해가 합치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원정이 종료되고 정동행성이 상설화된 이후에도 고려국왕이 정동행성승상을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원 내부의 역학구도에 기인한 것이었다고 이해된다. 1287년 동방3왕가의 일원이었던 내안(乃顔)의 반란을 시작으로 몇 년 동안 원 제국은 동서 종왕(宗王)들과의 권력 투쟁에 휩쓸렸다. 이에 충렬왕은 자진하여 내안 토벌군을 파견하는 등 세조의 우방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냈고, 그 여파로 1290년(충렬왕 16)에는 내안의 잔당이었던 합단(哈丹)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다. 따라서 원 세조는 고려국왕이 원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위계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분명히 할 필요에서 정동행성승상의 직위를 유지시켰다. 고려 또한 정동행성이 고려의 내정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에 원 관료제에 포섭되는 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이와 같이 정형화된 양국 관계는 오늘날 ‘세조구제(世祖舊制)’라는 틀로 설명되고 있다.

4 정동행성의 위상과 그 변화

정동행성의 구성과 역할은 원 내지의 행성과 완연하게 달랐다. 원 내지의 행성은 승상·평장정사(平章政事)·우승·좌승(左丞)·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의 재상이 임명되고 휘하에 좌우사·검교소(檢校所)·조마소(照磨所)·가각고(加閣庫)·이문소·도진무사·유학제거사 등의 소속 관부를 거느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반면 제2차 일본 원정기를 제외하면 고려의 정동행성에 고려국왕이 겸직한 승상 이외에 재상이 임명된 적은 없고, 승상의 직위는 일반 관직과 달리 고려국왕의 세습직이 되었다. 소속 관부로도 좌우사·이문소·도진무사·유학제거사·의학제거사(醫學提擧司)만이 확인된다. 소속 관부의 역할을 보면, 대부분의 시기 정동행성의 좌우사는 대몽외교 업무만을 담당하였다. 형벌을 담당하던 이문소와 교육·과거를 담당한 유학제거사·의학제거사 또한 고려의 내정에 관여하지 못하였으며, 도진무사는 유명무실한 관서에 불과하였다. 고려의 내정은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와 같이 고려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자체의 관부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나아가 소속 관원의 선발 또한 승상인 고려국왕이 적임자를 추천하면 원 조정에서 추인하는 방식을 원칙으로 하였다.

정동행성의 특수성은 원 세조 시기 구축된 고려와 원의 관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때에만 보장되었다. 고려의 정국이 분열되거나 고려의 국왕권이 위협받을 때에는 고려와 원의 관계 또한 변질되면서 정동행성의 위상이 흔들렸다. 증치행성(增置行省)이나 입성책동(立省策動)과 같이 정동행성을 원 내지의 행성과 동일한 지방관청으로 변모시켜 고려에 대한 원의 지배를 실질화하려는 움직임은 원 간섭기 전반에 걸쳐 꾸준히 나타났다.

증치행성은 원에서 행성관을 파견하여 정동행성을 직접 통제한 사건이다.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忠宣王)이 아버지 충렬왕을 밀어내고 즉위하였다가 다시 충렬왕에게 선위한 중조(重祚) 사건이 발생하고 이듬해에는 충렬왕의 측근이었던 한희유(韓希愈)가 충선왕 측근들에게 무고당하는 사건이 이어지자, 충렬왕이 관료들을 장악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원 조정은 활리길사(濶里吉思)와 야율희일(耶律希逸)을 각각 정동행성의 평장정사와 좌승에 임명하여 고려로 파견하였다. 활리길사 등은 충선왕의 개혁을 모두 원점으로 돌리고 관리들을 처벌하는 등 고려의 내정에 적극 개입하였다. 나아가 노비법(奴婢法)과 같은 고려 재래의 전통과 관습까지 변개하려는 급진적 시도를 하였다. 이에 고려는 그간의 공훈과 세조구제 등을 거론하며 원 조정에 격렬한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결국 인민을 화합시키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활리길사가 파면됨에 따라 정동행성을 실질화하려는 움직임은 중단되었다.

충렬왕 시기부터 충혜왕(忠惠王) 시기까지 고려는 7차례의 입성책동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입성책동은 형식적 기구였던 정동행성을 원 내지의 행성과 동일하게 변모시켜 고려를 원의 일부로 복속시키려는 시도였다. 입성책동은 발의자가 누구였는가에 따라 다른 성격을 지녔다. 일반적으로 충렬왕과 충선왕 시기에 있었던 초반 두 차례의 입성책동은 고려 외부에 있는 원 관료에 의하여 촉발된 것으로, 요양행성(遼陽行省)의 영향력을 확대하거나 요양행성에 대한 충선왕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에서 제기되었다고 이해된다. 반면 3차 이후 입성책동은 심왕옹립운동(瀋王擁立運動)과 같은 고려 내부의 정쟁에서 확장된 것이었다. 고려국왕의 반대편에 선 세력이 고려국왕을 위협하는 방편의 하나로 정동행성의 위상을 거론하며 고려의 내지화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5 반원운동의 타겟으로 부상한 정동행성

증치행성과 입성책동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충혜왕 시기까지 정동행성의 특수성은 유지되었고, 정동행성과 고려국왕의 관계는 원만하였다. 하지만 7차 입성책동 이후 양자의 관계는 어긋나기 시작한다. 이는 기씨일가(奇氏一家)의 부상에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고려에서 원에 보낸 공녀 기씨가 황태자 아유시리다라(愛猷識理答臘)를 출산하고 1340년(충혜왕 후1) 제2황후로 책봉됨에 따라 고려의 기씨일가는 원 황실의 외척이 되어 고려국왕이었던 충혜왕과 대립할 만큼 힘을 갖추게 되었다. 기황후의 오빠였던 기철(奇轍)은 1343년(충혜왕 후4) 진행된 7차 입성책동의 주역으로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충혜왕이 폐위되어 원으로 압송된 후에는 권정동성사(權征東省事)에 임명되어 정동행성을 장악하였다.

충혜왕 폐위 후 충목왕(忠穆王)·충정왕(忠定王)·공민왕(恭愍王) 등 차기 고려국왕을 선정하는 데까지 영향을 미쳤던 기씨일가는 정동행성, 특히 정동행성이문소를 중심으로 세력을 공고히 다지며 고려의 국왕권을 제약하였다. 충목왕 시기 정치도감(整治都監)의 개혁 과정에서 기삼만(奇三萬)이 옥사하자 정동행성이문소에서 정치도감을 공격하였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정치도감은 원 황제의 명령으로 설치된 개혁기구였음에도 기황후 세력과 연계된 정동행성의 공격을 받고 폐지되었다. 따라서 공민왕 5년의 반원개혁에서 기씨일가 등 부원세력의 집결지였던 정동행성, 특히 이문소는 일순위 개혁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공민왕은 기철과 그 일당을 척살한 후 좌우사를 제외한 정동행성의 소속 관부들을 혁파하고 원 조정에 표문을 올려 정동행성의 인사 추천 권한을 다시 고려국왕에게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후 정동행성은 공민왕의 친명(親明) 정책에 의하여 기능이 지속적으로 축소되었다가 위화도 회군 이후 자연스럽게 폐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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