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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政房]

무신집권자, 조정의 인사권을 틀어쥐다

1225년(고종 12)

1 개요

정방(政房)은 고려 시대의 무신 집권기에 설치되었던 기관이다. 무신집권자였던 최우(崔瑀)가 이 기관을 설치하여 조정 관리들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인사 행정을 처리하였다. 최씨 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존속하였으나 몇 차례 폐지와 재설치가 반복되다가, 고려 말 우왕(禑王) 시기에 최종적으로 폐지되었다.

2 무신집권기의 정국 운영 방식 변화

1170년(의종 24) 8월, ‘무신정변(武臣政變)’이라 불리게 될 사건이 터졌다. 국왕 의종(毅宗)을 호위하던 무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었다.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이 주도한 이 사건은 고려에 큰 변화를 야기하였다. 문신(文臣)들이 정치를 주도하며 권력을 장악하고 상대적으로 무신들은 낮은 대우를 받았던 시대상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가 폭발했던 것이다. 문신과 무신으로 구성된 조정의 관리들이 재추(宰樞), 즉 여러 재상의 총괄 하에 국왕을 보좌하며 정치를 펼쳐왔던 구도 자체는 유지가 되었으나, 실질적인 권력과 재상직을 무신집권자들이 차지하며 국정을 농단하는 상황이 되었다. 국왕이나 문신들은 무신들에게 눌려 정상적인 정치 활동을 펼치기 어려웠다.

무신정권에 참여한 고위 무신들은 무반의 업무를 넘어 국정 전반에 관여하였다. 재상의 지위를 차지하고 국정 전체를 관장하기도 하였고, 왕의 명령을 출납하는 승선(承宣)이 되어 권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인사 행정을 담당한 이부(吏部)와 병부(兵部)의 직책을 맡아 인사권을 휘두르기도 했다. 또한 공식적인 직함과 관련 없이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바탕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무신들의 모습도 흔히 나타났다.

피바람이 부는 난세 속에서 이의방과 이고, 정중부, 두경승(杜景升), 경대승(慶大升), 이의민(李義旼) 등 무신 집권자들은 서로 죽고 죽이며 권력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1196년(명종 26),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그는 기존의 무신집권자들보다 한층 강력하게 고려 조정의 권력을 자신이 틀어쥐었다. 최충헌은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기반으로 삼고, 문무 관리들에 대한 인사 행정을 좌우하였다. 『고려사』에는 이에 대하여 “최충헌이 비로소 자기 집에서 내시 이부원외랑(內侍 吏部員外郞) 노관(盧琯)과 함께 문무관의 임명을 결정하여 보고하였다. 〈그러자〉 왕은 고개만 끄덕이고, 이·병부[二部] 판사(判事)들은 정당(政堂)에 앉아서 검열만 할 뿐이었다. 최충헌이 홀로 정병(政柄)을 오로지하며 혹은 좌우 측근에게 부탁하거나 혹은 뇌물을 바치고 아부하는 사람에게 모두 관직을 주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인사 행정 장악을 뒷받침할 기관을 만들었다. 바로 정방을 설치했던 것이다.

3 최씨 정권, 정방에서 인사 행정을 좌우하다

최우는 최충헌의 장남이었다. 1219년(고종 6)에 최충헌이 사망하자, 그는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권력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 최우는 종2품인 참지정사(參知政事)와 정3품인 이부와 병부의 상서(尙書),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에 올랐다. 관료체계상으로는 최우보다 높은 지위의 관리들이 있었으나 실권은 모두 최우가 가졌다.

최우는 각종 조직을 통하여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대규모의 사병(私兵)을 양성하여 무력 기반으로 삼고, 원래는 공적 조직인 삼별초(三別抄)도 사병처럼 부렸다. 아버지가 설치한 교정도감도 그대로 최우가 이용하였다. 최우는 또한 이전의 다른 무신집권자들과 다르게 문사(文士)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무신집권기에도 과거(科擧) 제도가 운용되었고, 급제자의 수도 앞 시기와 비교해 오히려 늘어났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문신들이 위축되었고 관직 부여가 권력자와의 관계에 큰 영향을 받았던 무신집권기의 특성상, 그 처지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최우는 이들을 자신의 문객처럼 맞이하여 수하로 부렸다. 이를 서방(書房)이라 불렀다.

1225년(고종 12), 최우는 마침내 정방을 설치하였다. 정방의 조직 체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하는 기록이 없으나, 사료에서 정색승선(政色丞宣), 정색상서(政色尙書), 정색소경(政色少卿), 정색서제(政色書題) 등의 직책이 확인된다. 『고려사』에는 최우가 정방을 통해 인사권을 행사했던 모습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백관이 최우의 집에 나아가 정부(政簿)을 올리니, 최우가 청사에 앉아서 그것을 받았다. 6품 이하 관료들은 당(堂) 아래에서 두 번 절을 올리고 땅에 엎드려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최우는 정방을 자기 집에 설치하고 문사를 선발하여 여기에 소속시켰으니, 이를 비칙치[必闍赤]라고 불렀다. 〈최우가〉 백관의 전주를 결정하여 비목(批目)을 써서 올리면, 왕은 다만 그것을 하점(下點)만 할 뿐이었다. 한번은 사노(私奴)의 아들인 안석정(安碩貞)을 어사중승(御史中丞)에 제수하자,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였으며 심지어 상소를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당시 정방에서 근무하였던 한 유능한 관리에 관한 아래의 일화는 최종 결정권을 최우가 오로지하였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전주(銓注)할 때는 모두 최우에게 묻고 가부를 결정하지 않으니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는데, 대답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우리 진양공(晋陽公)의 손을 빌렸는데 내가 어찌 끼어들겠는가?’라고 하니 그가 아첨함이 이와 같았다.

최우는 이러한 여러 조직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제도화하였고, 이렇게 형성된 권력은 다시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전해져, 최씨 정권은 60년 넘게 이어졌다. 그런데, 최씨 정권이 실질적으로 고려의 국정 운영을 장악했으면서도 기존의 관료 체계를 해체하지는 않았다는 점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정방을 통해 인사권을 장악했으면서도 원래 인사 행정을 담당했던 이부와 병부를 해체하거나 공식적으로 이 관서들로부터 인사권을 박탈하지는 않았다. 최우와 이후의 집정들은 이부와 병부의 장관을 자신들이 맡았다. 즉 인사 행정 책임자 권한을 자신들이 확보하되, 실제 행정은 공식 기관인 이부·병부가 아니라 자신들이 별도로 설치한 정방을 통해 시행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1258년(고종 45), 몽골과의 긴 전쟁 끝에 고려 조정에서는 갈등이 폭발하였다. 그 결과 최씨 정권의 후계자였던 최의(崔竩)가 제거되고 최씨 정권은 종말을 맞이했다. 그러나 정방은 폐지되지 않았다.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인사 행정을 담당하는 기구로 작동하면서, 나름의 효용성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최씨 정권을 제거한 주역이 정방을 국왕의 거처인 편전(便殿) 옆으로 옮긴 것은 상징적인 의미도 겸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후 한동안 임연(林衍) 등 다른 무신들이 권력을 차지했으므로, 이들이 정방을 통해 권력을 행사했던 풍조가 즉시 중단된 것은 아니다. 이후 고려 말까지 정방은 잠시 폐지되기도 하였으나 곧 다시 설치되곤 하며 국가 기관으로 운영되었다. 그 운영에 권력을 쥔 신하 혹은 세력이 개입하여 인사 행정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한다는 비판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던 모습이 확인된다. 폐지와 설치가 반복되면서 정방은 지인방(知印房), 차자방(箚子房) 등으로 이름이 달라지다가, 우왕 때 폐지되고 상서사(尙瑞司)로 개편되어 조선 시대까지 이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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