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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방[重房]

무신들의 회의, 권력의 중추가 되다

미상

1 개요

중방(重房)은 고려 시대 무반(武班)에서 가장 높은 지위였던 상장군(上將軍)과 그 바로 아래의 대장군(大將軍)들이 모여 회의를 했던 기관이다. 무신집권기 초기에는 최고의 권력 기관으로 이용되었다. 충선왕(忠宣王) 시기에 잠시 폐지되었다가 복구되었고, 조선 시대에 들어와 완전히 폐지되었다.

2 무신 집권기를 만나 핵심 권력으로 변하다

중방이 언제 처음 설치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志)에서는 단지 “뒤에 또 중방을 설치하고, 2군·6위의 상장군과 대장군으로 하여금 모두 회합하게 하였다. 의종(毅宗)과 명종(明宗) 이후 무신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중방의 권한이 더욱 강해졌다. 충선왕 때에 〈중방을〉 폐지하였다가 다시 설치하였으며, 고려의 치세(治世)가 끝날 때까지 폐지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대체로 현종(顯宗) 시기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한다. 2군과 6위에는 상장군과 대장군이 각각 1명씩 있었으므로, 중방은 총 16명의 무신이 모여 논의를 하는 기관이었다. 고려 조정은 이렇게 무반 직위의 등급에 따라 회의 기관을 운영하였다. 중방 아래에는 장군방(將軍房), 그 아래에는 낭장방(郎將房), 또 산원방(散員房)·교위방(校尉房)이 설치되어 있었다.

무신 집권기 이전에 중방은 사료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167년(의종 21)에 국왕 의종이 내시(內侍)와 중방의 구성원들을 불러 모아 활쏘기를 시키고 비단을 상으로 내렸다는 기록만 보인다. 고려 시대의 사료가 전란 등의 영향으로 적게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굵직한 정치적 논의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 실릴 만한 자료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방뿐만 아니라 다른 관청에서 내부적으로 논의했던 자료도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1170년(의종 24)에 무신정변(武臣政變)이 발생하고 무신 집권기가 시작되면서 중방의 위상은 매우 높아졌다. 정변을 주도한 것은 상장군 정중부(鄭仲夫)와 견룡행수(牽龍行首) 산원(散員) 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였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정변 상황에서 이들이 정국을 독단적으로 끌고 가기는 어려웠다. 이들은 중방을 통해 고위 무신들의 동조와 협력을 이끌어 내며 정국을 운영하고자 하였다. “여러 무신이 중방에 모여 문신 가운데 살아남은 자를 모두 불렀는데, 이고가 그들을 모두 죽이려 하자 정중부가 저지하였다.”라는 기록이 당시의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특히 정변 이전에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았던 이의방이 중방에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주었던 듯하다. 훗날 이의방이 살해당하자 여러 무신들은 “국가의 중요한 권력이 중방에 속하게 된 것은 모두 이의방의 힘이었다.”라고 하며 살해 가담자들을 귀양보냈다. 이의방 살해는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이 주도했던 것으로, 이제 정국은 정중부가 주도하게 된 상태였다. 실제로 위의 사료에 나타나듯 이의방의 복수를 위해 정중부를 죽이려 한 자들은 중방에게 체포되어 유배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중방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무신들이 자신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던 이의방 살해에 가담한 자들도 처벌한 것이 당시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3 무신 집권기 초기의 각종 정치 활동을 주도하다

무신 집권기 100년 동안 고려의 정치는 무신들이 주도하였다. 정중부 등 특히 강력한 권력을 장악한 무신집정(武臣執政)이 가장 위에 있었으나, 여러 고위 무신들의 협력과 동조가 필요하였다. 고위 무신들도 중방을 통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중방에 모인 무신들은 국정 전반에 걸쳐 다양한 일을 처리하였다. 특히 반란 진압이나 적발된 역모 계획에 대한 처리, 반(反) 무신정권 인사에 대한 숙청 등에 관한 기록이 많이 보인다. 가령 1174년(명종 4)에 서경(西京)에서 조위총(趙位寵)이 군사를 일으켜 정중부 제거를 공언했던 ‘조위총의 난’ 당시, 그는 ‘상경(上京)의 중방이 북계(北界)를 토벌하려 한다’는 소문을 거론하였다. 중방에서 북계 지역의 동태에 의심을 품고 선제공격을 하려 하니, 그대로 당할 수는 없어서 거병하였다는 주장이었다. 즉 당시 중방이 군사 작전을 위한 회의체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178년(명종 8)에는 반란 계획에 대하여 고발이 들어오자 주모자로 지목된 사람들을 중방에서 잡아 처형한 기록이 보인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무신들이기에, 자신들의 안위에 대해 특히 예민하고 강경하게 반응하였다.

한편, 무신들은 고려의 정치 체제 자체를 무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려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특히 무신들이 부임할 수 있는 관직을 늘리려 했던 모습이 눈에 띈다. 이들은 1183년(명종 13)에 문반(文班)의 관직을 줄이자는 청을 올렸다. 또 자신들이 겸직할 수 있는 문관 조직의 범위도 확대하여, 결국 국왕의 측근인 내시·다방(茶房)까지도 겸직하였다. 심지어 사관(史官)과 예부시랑(禮部侍郞) 자리를 무신들이 겸하는 데에도 무신들이 중방에 한 호소가 작용하였다. 중방에서 무신들의 이익 도모 행위가 이루어지기도 하였지만, 무신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허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도가 지나치면 다른 무신들의 견제가 들어오기도 하였다. 가령 무신정변 때 공을 세워 위세를 부리던 고위 무신 조원정(曺元正)과 그의 두 아들이 횡포를 부리고 탐욕을 부리자, 중방에서 이들을 처벌하도록 조치했던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조치는 중방에서 순기능을 발휘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좀 더 보인다. 1178년(명종 8)에는 대장군 장박인(張博仁)과 김숙(金淑)으로 하여금 개경의 도로 상황을 조사하여 개인의 집이 관로(官路)를 침범했는지를 확인하고 문제가 있으면 복구하도록 하였다. 1181년(명종 11) 7월에는 재추(宰樞), 즉 재상들과 대간(臺諫), 중방이 함께 모여 시장에 유통되는 곡식의 상태와 규격에 대해 조사하고, 문제가 있으면 처벌하는 조치를 내렸다.

그런데 중방이 고위 무신들의 의사 결정 기구로서 높은 지위와 큰 권한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간혹 중방에 반발하는 중하위 무신들의 모습이 눈에 뜨인다. 가령 1177년(명종 7)에 중방에서 북방 지역의 판관(判官) 자리에 무신을 임명하지 않도록 하였는데, 무관들이 이를 주장한 장군의 길을 막고 폭언을 하여 처벌받은 일이 있었다. 또한 중하급 무신들의 조직인 장군방 등에서 중방의 조치에 반대하기도 하여, “지금 중방에서 일을 행하면 장군방에서 저지하고, 장군방에서 의견을 내면 낭장방에서 저지한다. 서로 모순이 되니 정령(政令)이 발표되어도 민(民)이 따르지 못하게 되었다. 하물며 형살(刑殺)은 임금의 권한인데도 신하가 마음대로 처단하고 있다.”라는 한탄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해관계가 엇갈리면 상관들의 조직인 중방에 대해서도 중하위 무신들이 반발을 했던 모습들이다. 무신 집권기의 정치구도와 사회상을 바라볼 때 흥미로운 점이다.

이후 최충헌이 집권하여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이른바 ‘최씨정권’의 시대를 열면서, 중방의 위상은 점차 낮아졌다. 최충헌은 교정도감(敎定都監) 등을 통해 정국을 주도하며 다른 무신들의 영향력을 낮추었다. 중방은 이후 대몽항쟁기와 원간섭기에도 존재하였으나, 무신 집권기 초기와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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