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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학파[江華學派]

조선에 양명학을 도입하다

미상

강화학파 대표 이미지

하곡문집(霞谷文集)

e뮤지엄(강화역사박물관)

1 개요

강화학파는 하곡 정제두와 그의 학문적 영향을 받은 제자들에 의해 전승되었던 조선시대 학파의 한 갈래이다. 정제두는 말년에 강화도로 들어와 여러 제자를 양성하고 이들과 친족 관계를 맺으며 학문을 승계하였다. 정제두는 주자학 일색이던 조선 사회에서 양명학의 방법을 학문에 도입하여 특유의 사상적 계보를 보이는 인물이다. 정제두의 뜻을 잇는 학자들이 강화도에 주로 모여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강화학파라고 불렀다. 한편, 이들의 학문적 특성이 양명학에 있는 것을 강조하여 ‘양명학파(陽明學派)’라고 부르거나, 정제두의 학문이 양명학 이외에도 다양하였기 때문에 정제두의 학파라는 의미로 ‘하곡학파(霞谷學派)’로 칭하기도 한다.

2 하곡 정제두, 양명학을 공부하다

정제두는 1649년(인조 27)에 태어났다. 본관은 영일(迎日)이고, 호는 하곡이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정유성(鄭維城)이다. 부친은 정상징(鄭尙徵)이며, 모친은 호조판서 이기조(李基祚)의 딸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정제두의 스승은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였다. 정제두는 80년에 가까운 삶을 살며 학문적으로 다양한 종적을 남겼다. 그런 그의 행적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조선 사회에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양명학을 연구하여 발전시키고, 조선에서 처음으로 사상적인 체계를 세웠다는 점이다.

양명학은 중국 유학(儒學)의 한 갈래이다. 춘추전국시대에 공자(孔子)가 주창한 유학은 시대가 지나며 발전해갔다. 송대(宋代)에 주자(朱子)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립되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朱子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 사상의 핵심이 성(性)과 이(理)에 있었기 때문에 성리학(性理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자에 의해 정리된 성리학은 이후 중국 유학의 주류가 되었다. 주자가 해석한 방식을 따르지 않으면 이단으로 여겨져 배척되기도 하였다.

중국 명대(明代)에 왕수인(王守仁)은 주자 일변도의 해석에 대해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유학에 접근하였다. 사실 주자학이나 양명학이나 모두 공자 시절과는 다른 새로운 유학(儒學)이다. 두 학문 모두 공부를 통해 욕심을 없애고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동일한 목표를 가졌다. 다만 어떻게 성인이 되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주자학은 지식이 있는 학자가 아니면 접근하기 어려웠던 것에 반해, 양명학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心]을 통해 성인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방법론을 지녀서 조금 더 쉬운 접근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즉, 주자학은 위로부터 백성을 계몽시키려는 학문이었고, 양명학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이 모두 평등하게 도(道)를 깨달을 수 있다고 여긴 학문이었다.

주자학은 고려 말에 수용되었고, 조선 건국 이후 국가의 핵심 사상이 되었다. 이후 16세기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에 의해 학문적인 진보가 있었다. 17세기 송시열(宋時烈) 등 다수의 성리학자들은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한편, 불교, 도교를 비롯하여 주자학이 아닌 유학은 모두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양명학은 이미 16세기에 조선에 알려졌지만, 이 역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제두에 의해 양명학이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이미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학풍이었지만, 조선에서는 양명학의 학설이 뒤늦게 체계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3 강화학파의 학문, 전주이씨 덕천군파를 통해 승계되다

하곡 정제두는 젊은 시절에 주자학을 공부하였으나 그 학문에 의문을 품었다. 그리하여 주돈이(周敦頤), 정호(鄭顥) 등의 학문도 공부하였고, 30대에 이르러 『전습록(傳習錄)』을 통해 양명학을 수용하게 되었다. 정제두는 당시 이단으로 취급받던 양명학을 공부한다고 표방하지는 못하고 홀로 몰래 공부하며 그 방법을 체득하고 정리하였다. 정제두는 61세였던 1709년(숙종 35)에 소론이 정치적으로 위험에 처해지자 강화도로 은거하였다. 이후 정제두는 20년간 제자를 양성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정제두가 강화도에 머물자 그를 존경했던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물론 정제두의 아들인 정후일(鄭厚一)과 그 손자 정지윤(鄭志尹)은 일찍부터 강화학파의 한 축을 이루었다. 여기에 정제두와 통혼 관계를 맺은 여러 집안에서 강화학파를 크게 발전시켰다. 강화학파의 형성과 발전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전주이씨(全州李氏) 덕천군파(德泉君派)였다. 강화학파는 전주이씨 덕천군파처럼 주로 친인척 집단을 중심으로 학문적 이해를 공유하였다.

전주이씨 덕천군파는 대부분 소론계에 속했다. 이들은 정제두와 마찬가지로 영조 연간부터 정치적 탄압을 당해 강화도에 이거하였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였다. 그는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켜 노론을 숙청하는 데 앞장섰고, 그래서 당시에 역적이 되었던 이진유(李眞儒)의 조카라는 이유로 중앙정계에서의 활동에 항상 제약이 있었다. 그는 1732년(영조 8) 강화도에 들어가 정제두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후 그의 형제와 자손들도 강화도에 합류하였다. 특히, 이광신(李匡臣)은 정제두의 심학(心學)을 계승하였고,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던 정제두의 학문 방향이 양명학이었음을 천명하였다. 이광찬은 불교를 적극 받아들여 강화학파의 한 맥을 이루었다.

이광사의 자식 항렬에서도 강화학파의 맥을 잇는 학자들이 연이어 나왔다. 이광사의 아들 이영익(李令翊)이 정제두의 손녀사위가 되면서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그 역시 정제두의 심학을 계승하였다. 이긍익(李肯翊)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편찬하였고, 국사(國史) 연구에서 강화학파의 학맥을 이었다. 이광명의 아들인 이충익(李忠翊)은 학문을 실천적으로 연구하라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양명학 연구에 매진하였다. 이충익의 손자인 이시원(李是遠)과 이지원(李止遠)은 이충익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이들의 학문은 다시 이시원의 손자인 이건창(李建昌), 이건승(李建昇), 그리고 이건방(李建芳)에게 연결되었다.

물론 전주이씨 가문 이외에도 신대우(申大羽), 윤순(尹淳), 심육(沈錥), 이진병(李震炳)과 같은 인물들이 정제두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었다. 심육은 혈육이 끊겨서 이들이 강화학파를 잇진 못했지만, 심육과 형제나 다름없던 홍양호(洪良浩)가 강화학파와 연관을 맺으며 가학으로 전승하였다. 또한 심육 일가인 심대윤(沈大允)도 경학 연구에서 강화학파를 계승하였다. 신대우 역시 정제두의 손녀사위였고 정제두의 유집을 정리하는데 힘을 쏟았다.

4 강화학파의 학문적 계보

강화학파는 정제두의 제자에 대한 구분 방식이 학자들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3층위에 걸쳐 제자들이 존재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정제두가 직접 가르친 친견제자(親見弟子)와 그 제자들의 제자인 재전제자(再傳弟子), 그리고 재전제자 이후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친견제자의 범주에서도 정제두가 젊어서 가르친 제자와, 노년에 가르친 제자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친견제자를 전기 친견제자와 후기 친견제자로 나누어 4층위로 보기도 한다. 여기서는 4층위에 걸친 강화학파의 전승 양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세대는 정제두에게 직접 학문을 배운 제자들로 친견제자라고 한다. 이들은 전기 제자와 후기 제자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제두의 문인은 양명학을 계승한 제자들을 중심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정제두는 양명학과 주자학을 모두 학습하였고 또 시기에 따라 다양한 학문 방법론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은 정제두가 젊어서 가르친 제자와, 노년에 가르친 제자가 습득한 학문이 달랐다.

전기 친견제자들은 심육과 윤순, 이진병 등이다. 이들은 주자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양명학을 긍정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정호(程顥)의 학문에 긍정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전기 친견제자들의 전승 양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후기 친견제자들은 이광명, 이광신, 이광사 등이다. 이들은 좀 더 나아가 양명학에 긍정적 성향을 띠고 있었고, 이에 따라 정제두의 양명학적 성향을 후대에 전승한 계열로 강화학파의 핵심적인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2세대는 정제두의 재전제자들이다. 즉, 정제두 사후에 그의 제자들이 키워낸 학자들이다. 재전제자의 범주에 들어가는 인물은 친견제자 이후의 인물부터, 구한말 이건창 이전의 제자들을 포함한다. 이들은 정제두의 학문을 다양한 분야에서 계승하고 전승해 갔는데, 특히 국사와 국어 등 국학(國學) 분야에서의 성과가 두드러졌다.

국사학에서 대표적인 인물로는 『연려실기술』을 편찬한 이긍익이 있다. 또한 이광명의 아들인 이충익은 『군자지과(君子之過)』를, 이면백(李勉伯)은 『해동돈사(海東惇史)』를, 이시원은 『국조문헌(國朝文獻)』을 서술했다. 국어학 분야에서는 이광사의 정음을 계승한 이영익과 이충익, 서파(西陂) 유희(柳僖)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외에도 서예와 문학 등에서도 다수의 학문적 성과를 배출하였다. 정문승(鄭文升)의 서화는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에도 소개될 만큼 유명하였다. 이들은 양명학 뿐 아니라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3세대는 재전제자 이후의 제자들이다. 주로 구한말과 일제시기에 활동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이건창, 이건승 형제, 그리고 이건창의 제자인 정인보(鄭寅普)까지를 3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조선말기부터 일제강점기에 국학을 중심으로 애국(愛國)을 실천에 옮긴 학자들이었다. 독립운동가로는 김택영(金澤榮)과 박은식(朴殷植), 정인보 등이 강화학파를 계승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양명학의 실천적 방법을 준행하여 민족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처럼, 강화학파는 전기와 후기의 친견제자, 그리고 2세대와 3세대의 제자들이 대체로 유사한 학문적 특성을 공유하였다. 즉, 양명학이나 정호의 학설을 옹호하여 주자학의 병폐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실(實)을 강조했고 또한 박학(博學)의 경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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