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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재소[京在所]

유향소를 관리, 감독하라

미상 ~ 1603년(선조 36)

경재소 대표 이미지

괴산 연풍향청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경재소는 조선 전기 지방 군현의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기관인 유향소(留鄕所)를 통제하기 위해 중앙인 서울에 만들어진 기구이다. 경재소는 고려의 사심관제(事審官制)를 계승한 것으로, 설치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435년(세종 17)에 대대적인 체제 정비가 이루어졌다. 구성원으로는 좌수(座首), 참상별감(參上別監), 참하별감(參下別監) 등이 있다. 경재소는 유향소 좌수(座首)의 임면, 향리 규찰, 풍속 교정 등의 임무를 맡았으나, 수령권이 강화되면서 1603년(선조 36) 폐지되었다. 경소(京所)라는 이칭이 있다.

2 경재소의 성립

고려 말 조선 초 지방사회에는 품관층(品官層)과 향리층(鄕吏層)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품관층은 지방 토호 출신으로 과거나 음서를 통해 관료가 되어 중앙에 진출한 부류들이다. 이들은 관직자로 중앙에 남아 있는 거경품관(居京品官)과 향촌으로 돌아가 생활하는 유향품관(留鄕品官)이 있다. 유향품관은 자신들을 향리와 구분 지으며 그들의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경재소는 조선 초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지방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성립되었으며, 고려시대 사심관과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 정부의 고위 관리로 본향의 경재소를 서울에 설치하면서 그 예하에 해당 군현의 분소로서 유향소를 설치, 운영하였다. 이러한 경재소가 조선시대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경재소의 명칭은 1390년(공양왕 2) 태조 이성계의 본향인 화령부(和寧府)에서 작성한 이성계 호적에서 나타나 고려 말에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3 경재소의 구성

경재소는 1435년(세종 17) 제도화되었다. 경재소는 좌수 1인, 참상별감 2인, 참하별감 2인 등 총 5인의 경재소 임원을 두었다. 이들은 향촌 내 공무를 맡도록 하되, 본향 수령의 정치에는 간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만약 이를 어긴 사람은 처벌하였다.

경재소 임원에는 그 고을에 친조부모, 외조부모, 처부모(妻父母)의 세계(世系)가 있는 자를 임명하였다. 재경관료 뿐 아니라 왕족도 경재소 임원에 임명되는 사례가 있었다. 함경도의 경우 이성계의 고향이므로 대군과 왕자들을 경재소 임원으로 임명하여 여러 읍의 경재소를 관장하게 하였다. 1438년(세종 20) 세종은 함길도 경원과 경흥에 경재소를 설치하여 종친의 관장 하에 풍속을 살피도록 하였다. 이 지역이 국경 주변이라는 특성상 국방에만 집중하여 풍속이 교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종은 이 지역 양반의 자제들을 선정하여 관리로 서용하도록 하고, 진양대군(晉陽大君, 훗날 세조) 이유(李瑈)는 경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은 회령,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는 경흥, 광평대군(光平大君) 이여(李璵)는 종성의 경재소를 관할하여 각각 본 고을을 총괄하게 하였다. 1447년(세종 29)에는 임영대군과 역양대군(歷陽大君) 이염(李琰)에게 명하여 종성(鐘城)과 온성(穩城)의 경재소를 나누어 관리하게 하였다. 이 밖에 순성군(順城君) 이개(李𧪚)는 전라도 무진군(茂珍郡)의 경재소를,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는 아산현(牙山縣)의 경재소를 관장하였다.

그러나 경재소의 임원을 왕족으로 임명하자 폐단이 발생하였다. 경재소의 설치 목적은 토성(土姓)인 조정의 관리를 당상, 별감으로 삼아 그 지역의 풍속을 바로잡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자 및 왕족들이 본향(本鄕)의 당상관이라 칭하고서 그 고을의 아전이 서울로 올라오면 침책(侵責, 물품 수납에서 각종 트집을 붙여서 강요함)을 가하는 폐단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1503년(연산군 9) 특진관 송질(宋軼)은 왕자들을 경재소에 참여시키지 말도록 왕에게 청하기도 하였다.

4 경재소의 임무

경재소의 임무는 먼저 유향소의 좌수와 별감을 임명하는 일이다. 경재소에서는 향리에 거주하는 자로서 현직(顯職)을 지냈고 사리(事理)를 잘 아는 사람을 뽑아서 유향소의 직임을 맡겼다. 부(府) 이상은 정원을 4인으로 하고, 군(郡) 이하는 3인으로 정하여 유향소의 좌수와 색장(色掌)을 삼았다.

이처럼 유향소의 좌수, 별감이 경재소에 임명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경재소가 출신 지역의 사무를 주선하고, 유향소의 인사를 임명, 감독하는 기능을 장악하였기 때문이다. 수령은 유향소의 불법이나 부정 등을 알아도 독자적으로 처벌하지 못하고 경재소에 알려야만 했다. 그러면 경재소가 유향소의 임원을 해임 또는 처벌하였다.

지역 내 풍속을 교화하는 임무도 맡았다. 유향소의 임원으로 풍속을 무너뜨리고 백성을 침해하는 등의 폐단을 일으키면 관찰사 뿐 아니라 경재소에서도 탄핵하여 징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1500년(연산 6) 사헌부 장령 신숙근(申叔根)은 풍속 교화를 맡은 유향소와 경재소가 도리어 풍속을 어그러뜨린다고 주장하였다. 이유인 즉 각 군현의 이속(吏屬)들이 서울에 오면 음식물을 많이 준비하여 경재소의 사람들을 접대하였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들에 대한 침학이 심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월 초하룻날 수리(首吏)가 숙배(肅拜)할 때에는 유밀과(油蜜果, 밀가루에 기름과 꿀을 반죽하여 만든 과자)를 갖추어 접대하기도 했다. 신숙근은 이러한 폐풍(弊風)이 없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향중 인물의 천거도 경재소의 몫이었다. 제주도의 경우 도민의 자제를 서용할 때 경재소의 추천장이 있어야 했다. 1428년(세종 10) 전 사정(司正) 고상심(高尙深)은 제주 경재소의 천거로 사섬 직장(司贍直長)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당시 좌사간 김효정(金孝貞)은 고상심의 관직 제수에 반대했다. 그는 인재 등용은 국가의 중요한 일 중 하나인데 경재소의 추천장만으로 관직을 제수하면 이를 남용할 폐단이 발생한다고 걱정하였다. 하지만 경재소에서 천거하는 인물을 관직에 등용하는 것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외에 경재소는 지방 공물의 납부에도 책임을 지고 있었다. 지방에서 세공(稅貢)으로 바치는 여러 물품은 고을의 수령이 민간에서 수합하여 문서에 기록하고 관리를 차임하여 보냈다. 그러나 관리가 서울에 이르면 몰래 숨어서 흥리인(興利人, 여러 곳을 왕래하며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과 공모하여 팔아버리고 납부하지 않는 폐단이 많았다. 따라서 각 군현에서 물품의 이름과 수량 및 받아들이는 아전의 성명을 기록하여 경재소에 공문을 보내면, 경재소에서는 문서를 점검하고 여러 관사에 납부를 독촉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납부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면 경재소의 관원을 처벌하였다.

5 경재소의 폐단과 철폐

지방의 유향소를 관리, 감독하기 위해 만든 경재소 또한 폐단이 많았다. 경재소의 임원들이 자신의 지위를 악용해 사적 재산을 경영하였으며, 이는 결국 백성들의 고통으로 이어졌다. 세조 때 우의정 홍윤성(洪允成)이 홍산현(鴻山縣)의 경재소를 맡자, 홍산 현감인 유소(劉昭)는 그를 위해 연호군(煙戶軍)을 동원하여 나계문(羅季文)의 동산 안에 있는 소나무를 모두 베었다. 또한 홍윤성이 많은 양인(良人)을 자기 소유로 하여 집에 숨기자, 유소는 군적(軍籍)에 사망의 의미인 물고(物故)라고 적고 이들을 누락시켰다.

성종 때 심응(沈膺)은 김포현(金浦縣)의 경재소를 맡으며 향리를 학대하였으며, 거둬들인 속전(贖錢)을 모두 가져다 썼다. 더욱이 군현에 속전을 요구하기도 하였는데, 바친 것이 성에 차지 않으면 수령을 꾸짖기도 하였다. 중종 때 박담손(朴耼孫)은 고령(高靈)의 경재소 임원으로 본 고을에서 바치는 초둔(草芚, 거적 등을 만들 수 있는 짚, 띠, 부들 따위)을 대신 바치고 그 값을 군현 민들에게 배로 거두어 쓰는 등 폐단이 많아 파직되었다.

이러한 경재소의 폐단이 발생하자 기구의 혁파 논의가 중종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원래 경재소의 설치 목적이 고을 풍속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로잡기 위해서인데, 그것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뿐 아니라 백성과 하급 관리를 침탈하는 폐단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양상은 선조대에 이르러서도 반복되었다. 결국 1603년(선조 36) 선조는 비변사의 건의에 따라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군현의 폐단이 되는 경재소를 일체 혁파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유향소의 임명권 및 감독권은 수령에게 돌아가게 되었고, 유향소는 수령의 지휘·감독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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