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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觀察使]

지방 최고의 행정장관이자 군사 지휘관

미상

관찰사 대표 이미지

대구 중구 경상감영 선화당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관찰사는 중앙의 행정관서와 지방의 수령을 연계하면서 도내(道內)의 행정, 군사, 사법을 처리하는 지방 최고의 행정장관이다. 흔히 감사(監司)로 칭했으며, 또 다른 호칭으로 도백(道伯), 외헌(外憲), 방백(方伯) 등이 있다. 관찰사는 고려의 안찰사(按察使) 및 안렴사(按廉使)의 후신으로 고려 말부터 존재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관찰사와는 기능이나 지위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라고 칭하다가 1466년(세조 12)에 관찰사로 개칭하면서 제도적인 완비를 보게 되었다.

2 조선 초 관찰사 제도가 성립되다

고려는 중앙의 통치력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 많았기 때문에 중앙의 통제가 일부 지역에 한정되었다. 한편, 조선은 건국 초부터 전국을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일원적인 행정체계 하에 두고자 했다. 그 방편의 하나로 지방 통치조직을 정비하기 시작하였고, 고려 안찰사, 안렴사의 후신으로 각 도에 관찰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관찰사 관련 제도가 건국 초기인 태조 대부터 확고하게 성립된 것은 아니었다. 1395년(태조 4) 충청도, 황해도, 강원도 지역에만 관찰사를 설치하고 충주, 해주, 원주에 각기 관찰사가 거처하는 감영(監營)을 두었다. 경기도의 경우 1402년(태종 2)에 좌도와 우도를 합하여 관찰사 1원을 두었으며, 평안도는 1413년(태종 13)에 처음으로 관찰사를 설치하였다. 함경도의 경우도 1444년(세종 26)에 처음 관찰사를 두고 함흥부(咸興府)에 감영을 설치하였다. 관찰사의 명칭은 세종 대까지 안렴사, 도관찰출척사 등으로 변경되어 불리다가 세조대에 들어와서 모두 관찰사로 개칭되었다.

관찰사는 각 도를 맡아 다스리며 관할 수령의 청렴과 부정을 고찰하고, 민생의 고락을 살피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관찰사의 임용에 매우 신중했다. 공평하고 정직하며 청렴한 사람으로 선정하여 파견하도록 했으며, 혼자 임무를 처리하게 되기 때문에 오랜 관직 경험을 바탕으로 사무를 익숙하게 잘 처리하는 사람으로 임명하고자 하였다. 관품은 종2품 이상의 문신으로 하였다. 왜냐하면 2품 이상의 고위직으로 임명해야 한 도를 다스리는 지방장관으로서의 면모가 갖추어지며, 지역 내 재지세력과의 관계나 대민정책을 수행하는 데 효과를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신으로 임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감영 안의 경력(經歷)이나 도사(都事) 중 1인은 반드시 문신으로 임명되어야 했다.

또한 관찰사는 의정부, 6조, 사헌부, 사간원의 추천을 통해 왕이 임명하되, 일정한 범위 내의 친족 간에는 동일한 관사나 통속 관계에 있는 관사에 취임할 수 없도록 하는 상피제(相避制)를 적용하였다. 임기는 고려의 안찰사가 6개월이었던 것에 반해 조선의 관찰사는 『경국대전』에 360일로 규정하였다.

3 도내의 행정·사법·군사를 책임지다

각 도에 파견된 관찰사는 왕을 대신하여 지방 통치의 임무를 수행하는 행정장관이다. 관찰사는 국가 수세(收稅) 확보와 관리에 책임을 지고 있었다. 조세와 공부(貢賦)는 국가 운영의 기본 재원이다. 관찰사와 수령은 조세 및 공부를 독려하여 책임지고 납부하였다. 따라서 호적(戶籍), 군적(軍籍), 요역(徭役)의 관리에 집중하였고, 경지(耕地), 산릉(山陵), 소택(沼澤), 광산(鑛山), 염분(鹽盆) 등의 각종 재원의 관리에도 힘썼다. 또한 농업이 기반이 되는 사회였기 때문에 관찰사나 수령의 가장 큰 임무가 권농이었다. 이를 위해 도내 제언의 수축, 벌목 금지, 농업기술 보급 등에 집중했다.

관찰사는 민의 교화와 진휼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 먼저 학교를 세워 백성들을 교화하였다. 관찰사는 목(牧), 도호부의 교수와 군현의 훈도(訓導)를 감독하고, 수령에 대한 고과 기준에서 「학교흥(學校興)」 문제에 비중을 두어 취급하였다. 또한 기민이 발생했는데도 제대로 구휼하지 않은 관찰사는 처벌하였다. 1459년(세조 5) 경기도의 백성들 가운데 떠돌아다니는 자가 많은데도 수령들이 제대로 진휼하지 못하고, 관찰사 또한 이를 관리하지 못하자, 정부에서는 이들을 모두 문책하였다. 떠돌아다니는 유이민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일도 관찰사가 담당하였다. 강원도, 황해도에서는 심한 가뭄으로 백성들이 다른 지역으로 많이 흩어지자 국왕은 경상, 전라, 충청, 함길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이들 유이민을 철저히 색출하여 본도로 돌려보낸 후 그 성명을 중앙에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관찰사는 수령을 감찰하는 역할도 하였다. 관찰사는 관할 지역의 순행을 통해 매년 6월과 12월에 두 차례씩 수령이 행한 업무를 공정하게 파악, 평가하는 고과를 행하였다. 관찰사의 순행은 감영이 있는 곳에서 출발해서 다시 감영으로 돌아오는데, 순행 행차에는 수백 명의 수행원과 4, 50필의 말이 동원되었다. 관찰사가 지나는 길목에 위치한 고을은 공사(公事) 보고와 지영(祗迎, 맞이하는 것) 및 응대의 책임이 있었다. 관찰사는 소관 지역을 둘러보며 해당 지역 수령이 반드시 해야 할 임무인 농상성(農桑盛), 호구증(戶口增), 학교흥(學校興), 군정수(軍政修), 부역균(賦役均), 사송간(詞訟簡), 간활식(奸猾息)의 수령칠사(守令七事) 실적을 상, 중, 하로 점수를 매겨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것은 수령의 포폄(褒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관찰사에게는 소문만으로도 수령을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사헌부를 내헌(內憲)이라고 부르고, 관찰사를 외헌(外憲)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관찰사는 형옥과 쟁송을 처결하는 사법적 기능도 수행하였다. 수령은 태형(笞刑) 이하의 죄를 지은 사람은 직접 처단할 수 있지만, 장형(杖刑) 이상의 죄인은 관찰사에게 보고한 후, 허락을 받고서 처벌할 수 있었다. 즉 관찰사는 형옥에 대한 강력한 권한을 가지며 3품 이하와 유형(流刑) 이하를 바로 판결할 수 있었다. 한편,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의 검험을 마친 후 가해자를 심문하였는데, 지방에서는 유수(留守) 또는 관찰사의 지시에 따라 초검, 복검의 두 검험관이 시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옥사의 내용에 문제점이 없으면 각 도의 관찰사는 왕에게 보고하였다. 만약 죄수 가운데 병든 자가 있으면 관찰사가 책임지고 다스려야 했으며, 옥사를 잘못 다스려서 죄인이 1년에 2명 이상이 사망하면, 전최(殿最, 관원의 근무 성적을 심사하여 우열을 매기던 일)에 반영되었다. 아울러 각종 쟁송에 대한 청원서인 소지(所志)를 결재하였다. 이는 관찰사의 업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몸이 아프거나 순력중이거나 상을 당하는 등의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에 매일 소지를 결재하였다.

마지막으로 관찰사는 군사상의 책무도 수행하였다. 원칙적으로 관찰사는 도내 모든 일을 총괄하고, 절도사(節度使)는 군사 관련 일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 관찰사가 병마절도사를 겸직하는 경우가 많아 특수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일반 행정과 군사 행정이 별도로 분리되지 않았다. 관찰사나 수령을 천거하거나 임명할 때 문무를 겸비한 자를 택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관찰사는 수령과 함께 봉화의 실태를 병조에 보고하였고, 군기를 점고하였으며, 군사를 조련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의 경우 8도 체제가 완성됨에 따라 왕은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막강한 임무를 관찰사에 부여하였다. 각 도의 관찰사는 왕을 대신하여 한 도의 행정을 총괄하는 행정장관으로서의 기능 뿐 아니라 수령을 감찰하는 감찰관, 군사지휘관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한 지방 최고의 외관(外官)이었다.

4 관찰사의 정무 공간, 감영(監營)

감영은 관찰사가 정무를 보는 청사이다. 관찰사를 감사로도 불렀으므로, 감사가 있는 영문(營門)이라는 의미에서 감영(監營)이라고 칭했다. 조선시대의 경우 8도제를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영은 모두 8곳에 두었다. 전라도는 전주, 황해도는 해주, 강원도는 원주, 함경도는 함흥에, 평안도는 평양에 감영을 두었다. 감영지가 이전한 곳도 있는데, 경기도의 경우 한성부 돈의문(敦義門) 밖에 경기감영을 두었으나, 1618년(광해군 10)에 영평(永平)으로 옮겼다. 충청도의 경우 1395년(태조 4)에 충주에 감영을 두었다가 1602년(선조 35)에 공주로 옮겼으며, 경상도의 경우 낙동강을 경계로 좌도와 우도로 각각 관찰사가 파견되기도 했다가 1601년(선조 34)에 대구로 감영지가 확정되었다.

감영은 관찰사의 영역과 부속 관원들의 실무 공간으로 구별된다. 관찰사가 사무를 집행하는 주 공간인 정청(正廳)은 선화당(宣化堂)이다. 선정을 베풀고 덕으로서 백성을 교화하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선화당은 삼문(三門)으로 구성되었으며, 감영의 중심축을 담당하였다. 강원감영을 예로 보면, 관찰사의 공간인 선화당을 중심으로 처소인 징청각(澄淸閣)과 내각, 패장의 직무소, 사당과 신당(神堂)과 같은 감영 내 제사시설, 창고 등 관찰사의 업무와 생활이 이루어지는 건물들로 구성되었다. 또한 연지(蓮池)와 정자, 화계(花階) 등 연회와 휴식을 위한 후원 공간을 두었다.

이처럼 조선시대 관찰사의 운영으로 전국은 일원적인 행정체계 아래 능률적인 지방 통치가 실현되었다. 정부가 관찰사제를 운영한 가장 큰 이유는 지방의 재지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관찰사의 품계를 조정하고, 행정, 감찰, 군사 등의 권한을 부여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구축하였다. 반면 관찰사의 임기를 정하고 상피제를 적용하는 등 규제도 마련하였다. 이러한 관찰사제도는 1910년 폐지될 때까지 지방통치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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