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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파[畿湖學派]

율곡 이이의 학문을 계승하다

미상

기호학파 대표 이미지

율곡 이이 초상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개요

기호학파는 16세기 중엽에 형성된 학파로,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근간을 둔 학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의 학문을 계승한 학인들로 동일한 학문 집단을 구성하였다. 특히, 퇴계 이황을 종장(宗匠)으로 하는 경상도 지역의 영남학파와 지역적, 학문적 구별이 분명히 되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학파라고 할 수 있다. 사상적으로 이(理)와 기(氣)가 모두 발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理)를 중시한 퇴계와 달리, 이는 움직이지 않고 기만 발한다고 해서, 기(氣)를 중요시하는 학문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기호학파의 문인들은 인물성동이론과 예학사상, 절의정신에서 중요한 학문적 성과를 이룩하였고, 조선의 실학(實學)과 양명학(陽明學) 연구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2 경기와 호서, 호남을 중심으로 율곡의 학문을 계승하다

기호학파는 본래 경기도를 가리키는 기내(畿內) 지역과, 충청도 전역을 가리키는 호서 지역만 학파의 범주에 들어갔다. 그러나 전라도 광주(光州) 출신의 명망 있는 학자인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의 학풍이 전해지는 호남 지역도 포함하여 기호학파의 범주에 편입하였다.

기대승은 엄밀히 말하면 퇴계학파에 속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퇴계 이황과는 전혀 다른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가지고 있고, 이 견해를 이이가 습득하여 발전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이이는 전라도 장성(長城) 출신의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에게 지도를 받았다는 설도 있다. 즉, 기호학파의 대표학자인 율곡 이이의 학문적 계보가 이들 호남 지역 학자들과 긴밀한 연관이 있음으로, 호남 지역도 기호학파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3 기호학파의 문인들과 학문적 계보

기호학파는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의 문하에 있던 인물들로 정의할 수 있지만, 이들은 인근 지역에 거처하며 우애를 돈독히 하였고 학문적 교류도 잦았기 때문에 문인 또한 중복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학맥이 가장 잘 드러나는 율곡 이이의 제자를 중심으로 기호학파의 명맥을 살펴보겠다. 기호학파에 속하는 율곡 이이의 문하는 직접적인 사승(師承) 관계를 맺고 있던 제자와, 그의 학설을 지지하며 기호 지역에 거주하는 학인들이 모두 포함된다.

대표적으로 김장생(金長生), 조헌(趙憲), 정엽(鄭曄), 이귀(李貴), 안방준(安邦俊)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율곡의 학문을 계승하면서, 한편으로 정치적으로도 동일한 붕당을 구성하였는데, 이를 ‘서인(西人)’이라 한다. 율곡의 제자 가운데 문인이 가장 활발했던 제자는 김장생이었다.

김장생의 문인은 아들이었던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장유(張維), 이유태(李惟泰), 조익(趙翼) 등이 있었다. 이들 역시 각각 강력한 학인 집단을 구성하여 정치적으로도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효종이 즉위한 이후 김집과 송시열 등은 중앙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정치인이기도 하였다. 김장생문인 가운데는 김집과 송시열의 제자들이 성행하였다.

김집의 문하로는 유시(兪棨), 윤선거(尹宣擧) 등이 있었고, 송시열의 문하로는 권상하(權尙夏), 윤증(尹拯), 김창협(金昌協), 김만중(金萬重), 정호(鄭澔) 등이 있었다. 특히 송시열은 다수의 문인이 학문적, 정치적으로도 성장하여 주류를 점하고 있었다.

우선 권상하의 문하로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외암(巍巖) 이간(李柬)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같고 다름에 관한 치열한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했다. 또한, 윤증의 문하로 박태보(朴泰輔)와 권이진(權以鎭)이 있었고, 정제두(鄭齊斗)도 그 학맥에 영향을 받았다. 김창협의 문하로는 어유봉(魚有鳳)이 있었다. 이처럼, 송시열 제자의 제자들까지로 문하가 넓어지며 기호학파는 상당히 성세하였다.

다만 송시열은 제자 윤증과 회니시비(懷尼是非)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산(尼山)에 살던 윤증은 회덕(懷德)에 살던 송시열에게 부친 윤선거의 묘지명을 부탁했다. 그러나 송시열이 윤선거ㄴ를 비난하고, 그의 묘지명을 무성의하게 짓자 윤증이 송시열을 비판하면서 대립하게 되었다. 급기야 서인은 두 사람을 지지하는 세력에 따라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파하게 되었다.

한편, 이 외에도 율곡을 간접적으로 흠모한 학자들로 이단상(李端相)과 김창흡(金昌翕), 이재(李縡) 등이 있었다. 특히 이재의 문하에서 김원행(金元行), 임성주(任聖周)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또한 김원행의 문인으로 박윤원(朴胤源)과 황윤석(黃胤錫), 홍대용(洪大容) 등의 학자가 나왔다. 박윤원의 문인으로는 홍직필(洪直弼)이 있으며, 그의 문인이 임헌회(任憲晦)이고 또 그 문인이 바로 전우(田愚)이다. 한편, 홍대용의 영향을 받은 박지원(朴趾源)과 박제가(朴齊家)를 중심으로 실학사상이 발전하였고, 정약용(丁若鏞)은 이들의 사상을 집대성하였다.

이처럼 수많은 율곡의 문인과 그 제자들로 이루어진 학통이 바로 기호학파의 정수를 이루고 있었다. 이 가운데 김장생이 율곡의 가장 중요한 제자로 여겨지고 있으며, 김장생에서 송시열로, 또 권상하로, 또 한원진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기호학파 가운데 학문적 사승 관계가 가장 두드러졌다. 한편, 송시열의 다른 제자인 김창협의 학맥으로 이재, 김원행, 박윤원, 홍직필, 임헌회, 전우로 이어지는 사승 관계도 조선후기 성리학의 중요한 학맥의 하나로 계승되었다.

4 율곡의 학문을 발전시켜 다양한 성과를 이루다

기호학파는 대체로 율곡 이이의 주기적(主氣的)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서 영향을 받아 학문의 발전적 계승을 통해 수많은 성과를 이룩하였다. 기호학파의 주요한 학문적 성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율곡 이이의 주기적 사단칠정론이다. 16세기 중엽부터 시작되었던 사단칠정에 대한 해석을 놓고 퇴계 이황은 사단은 이가 발한 것으로, 칠정은 기가 발한 것으로 해석하였던 것에 반해, 율곡은 이는 움직이지 않고, 사단칠정은 모두 기가 발한 것에서 나온다고 해석하였다. 즉, 기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인데, 이 때문에 율곡을 주기론자로 이해하기도 한다.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의 이기론과 사단칠정론은 조선 성리학의 학문적 발전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논쟁으로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의 분화가 명확해지고 율곡을 지지하는 계열은 서인으로, 퇴계를 지지하는 계열은 동인으로 하는 정치적 분화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둘째,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의 예학사상(禮學思想)이다. 김장생의 예학은 당대에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예학은 윤리나 도덕일 뿐 아니라 법률에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중요한 학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전례문답(典禮問答)』으로 국가 의례를 개진하였고, 『가례집람(家禮輯覽)』과 『상례비요(喪禮備要)』를 통해 사대부의 예절도 정리하였다. 이러한 저서는 이후 국가와 개인 의례의 전범이 되어 조선 예학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의 예학 사상은 그 아들인 신독재 김집에게 이어져 더욱 정교하게 발전되었다.

셋째, 남당 한원진과 외암 이간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이다. 권상하의 제자였던 한원진과 이간은 인성과 물성의 본질에 대한 논쟁을 펼쳤다. 인간의 본성인 인성(人性)과 동식물의 본성인 물성(物性)이 근본적으로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었다. 한원진은 기본적으로 인성과 물성의 차이를 지적했는데 이를 지지하는 자들은 주로 권상하의 제자들로 호서지방에 주로 거처하여 호론(湖論)이라 불렸다. 이간은 인성과 물성의 동일함을 지적했으며 이를 지지하는 자들은 주로 김창협의 제자들로 경기지방에 거처하여 낙론(洛論)으로 불렸다. 이들의 논쟁은 조선후기 성리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넷째, 중봉 조헌의 애민과 절의정신이다. 이는 성리학이 추구한 위국애민(爲國愛民)을 보여주는 의리를 실천한 학풍이었다. 이는 단지 성리학자들이 학문만 숭상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국가수호와 방어, 국왕에 대한 충성으로 연결시켜 수많은 애국지사를 만든 단초가 된 학풍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조헌의 절의정신은 19세기말 위정척사(衛正斥邪)로까지 이어져 민족주의적 경향을 강고히 하는데 기여하였다.

다섯째, 홍대용의 영향을 받은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등의 실학 사상이다. 홍대용은 율곡사상을 사숙(私淑)한 김원행의 제자였다. 홍대용은 실용적 학풍을 강조한 학자로서 그의 영향을 받아 연암과 다산 등 조선후기 대표적인 실학자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들 개혁적인 실학자들의 학풍은 이후 박규수(朴珪壽)나 김옥균(金玉均) 등의 근대 개화론자에게까지 사상적 영향을 심어주는데 기여하였다.

여섯째, 윤증의 영향을 받은 정제두의 양명학이다. 양명학은 ‘심즉리(心卽理)’라고 하는 명대 학자 왕수인(王守仁)의 주장에서 나왔다. 즉,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누구나 마음이 있으므로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정제두는 양명학을 성인(聖人)이 되는 공부법으로 인정하며 수용한 최초의 학자였다. 당시 주자성리학을 연구하는 일변도의 풍토와 달리, 정제두는 양명학을 받아들여 조선 성리학의 사상적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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