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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

훈구파에 맞선 조선 중기 신진 정치 세력

미상

1 개요

조선 중기 훈구파의 전횡에 맞서며 새롭게 등장한 정치세력이다. 향촌의 중소지주적 배경을 가진 인사들, 즉 사림(士林)이라 지칭되던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림이라는 용어는 ‘사(士)의 무리’라는 의미로 고려 말 조선 초부터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15세기 말~16세기에 이르러서는 집단적인 의미가 강화되어 통용되고 있었다. 이는 사림으로 언급되는 특정한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사류(士類) 일반을 가리키던 이전의 의미에서 특정한 정치세력을 가리키는 의미로 변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16세기의 정치사 연구에서는 실록에서 통용되던 사림을 사림파로 등치시키는 가운데,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정치세력 가운데 하나로 규정하고 있다.

2 사림파의 형성

사림파는 성종 대 김종직(金宗直)과 그의 문인들의 활발한 정치활동을 계기로 결집되고 있었다. 성종은 훈구파를 제어하려는 목적에서 영남 출신의 김종직과 그의 문도들을 적극적으로 중용하였다. 성종에 의해 발탁된 사림파 인사들은 주로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에 포진하여 훈구 대신들의 비리와 전횡을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다. 이렇듯 김종직 문인들은 삼사(三司)의 언론을 기초로 삼아 훈구파에 상대되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던 것인데, 성종 중엽에 이르러서는 김종직과 그의 문인들을 일컬어 ‘경상선배당(慶尙先輩黨)’이라 지칭하는 등 일군의 정치세력으로 인식되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었다.

3 사림파의 성장과 시련

사림파는 성종의 치세 후반으로 갈수록 국정 운영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언론을 통해 훈구 대신의 불법과 비리를 비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정책에 있어서도 자신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표명하였다. 재지사족의 자율적인 향촌 지배를 위해 유향소(留鄕所)의 복립(復立)을 주장하고,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여진 정벌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으며, 재상 후보자로 지목된 인사의 부적합성을 지적하며 임명 철회를 요청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명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명의 전달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성종대의 사림파는 김종직 문인들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영향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으며, 군주와 훈구 대신의 자의적인 정치운영에 비판을 제기하며 국정이 공론에 입각해 운영되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사림파의 성장은 연산군(燕山君)의 즉위 후에도 계속되었다. 불교식 위령제의 성격을 지닌 수륙재(水陸齋)를 개최하는 문제와 폐비 윤씨의 사당 건립 문제를 놓고 사림파는 연산군 및 일부 훈구 대신과 거세게 충돌하며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갈등은 김일손(金馹孫)의 사초 문제를 계기로 결국 무오사화로 이어지며 사림파의 성장에 제동이 걸리는 결과를 맞게 된다. 사림파의 과도한 정치적 성장에 피로감을 느끼던 국왕과 훈구 대신이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사림파의 제거에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연산군의 폭정은 갑자사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사림파는 물론이고 훈구파에게까지 반감을 사 결국 중종반정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사림파는 반정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재기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중종대의 사림파는 조광조(趙光祖)를 위시한 기묘사림의 등장으로 그 활동이 두드러지고 있었는데, 기묘사림들은 성종과 연산군대보다 한층 더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국정 전반에 걸쳐 개혁을 시도하였다. 조광조는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 조정에 등장하기 이전부터 명망이 높았는데, 1515년(중종 10)을 전후로 정국공신들이 퇴조하고 중종(中宗)이 새로운 정치적 동반자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발탁되었다. 조광조의 진출로 사림파는 강력한 구심점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후 공론정치를 추구하며 각종 사회문제에 대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기묘사림이 추진했던 개혁들은 크게 두 가지 계통으로 나뉜다. 첫째는 일상의 구석구석까지 성리학적 질서에 입각한 사회 운영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소학』‧『근사록』과 같은 성리학 서적들의 보급, 향약의 보급을 통한 향촌 질서의 재편, 정몽주(鄭夢周)‧김굉필의 문묘종사운동을 통한 유교 성인의 조선적 모델 설정, 소격서(昭格署)의 혁파로 대표되는 사전(祀典)체제의 정리, 외연(外宴)에서의 여악(女樂)의 폐지 등을 통해 성리학적 가치를 통한 사회 운영을 추구해 나갔다. 개혁의 두 번째 방향은 ‘누가 정치를 할 것인가’하는 문제로, 단순히 문장에 소질이 있는 사람보다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관료로 선발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퇴출시키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한 모색의 과정에서 천거를 통해 인재를 뽑는 현량과의 시행과 특별한 공로 없이 공신으로 선정된 이들에 대한 위훈삭제가 추진되었다.

하지만 기묘사림의 개혁은 그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며 자신들을 압박해 오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중종과 훈구 대신들의 음모로 좌절되고 만다. 소위 기묘사화가 일어나며 사림파가 조정에서 또 다시 실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묘사화 이후에도 사림파는 명종대 초반 을사사화를 당하며 또 한 차례의 시련을 겪게 된다. 하지만 이후로는 서원의 건립과 그를 기초로 한 학파의 구축을 시도해 나가며, 보다 온건하면서도 실질적인 기반의 확보에 힘쓰고 있었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너무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해 훈구파와 갈등하기보다는, 좀 더 긴 호흡을 가지고 차분하게 실력을 양성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고 할 수 있다.

명종대 후반에 이르러 척신정권은 내부 분열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사망을 계기로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게다가 명종(明宗)이 후사 없이 사망하게 되자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한 채 정파로서의 생명력을 잃게 되었다. 이에 사림파는 선조(宣祖)의 즉위와 함께 조정에 재진출 할 수 있었는데, 수차례의 사화를 겪는 진통 끝에 마침내 집권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사림파는 학파와 성리학적 공도에 입각한 붕당정치를 시행하면서 갈등도 적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는 견제와 균형을 통한 상호공존을 추구하며 공론정치와 도학정치의 실현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였다.

4 사림파 개념에 대한 이견

한편 학계 일각에서는 통설의 사림 및 사림파의 개념에 비판적인 입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실록에서 통용되고 있는 사림이라는 말과 지방의 중소재지지주의 의미가 일치하지 않으며, 성종대 이후 조정에서 사림파로 인식되는 사람들 중에는 영남이나 기호지역과 같은 지방 출신보다는 서울 출신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훈구파 가문의 후손들을 비롯해 명문거족 출신들이 많았다는 점 등이 통설을 비판하는 주요 내용을 이루고 있다. 아울러 성종대 이후 지속되고 있던 중앙 정계에서의 정치적 갈등의 심화는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에 따른 소산물이 아니라, 청요직계 관료들의 영향력 증대와 그로 인한 권력구조의 변동에서 기인한 현상이라고 이해하는 입장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견들은 아직까지는 기존의 통설을 대체할 만한 수준으로 정리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으로, 새로운 학설로 자리 잡기까지는 좀 더 성숙의 시간이 필요한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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