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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원[司譯院]

외교 실무 관원의 양성과 통역 업무를 맡다

1393년(태조 2) ~ 1894년(고종 31)

사역원 대표 이미지

통문관안(通文館案)

e뮤지엄(국립고궁박물관)

1 개요

사역원은 조선시대 외국어 교육과 통역 실무 등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통문관이 있어서 외국어 교육만 담당하였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통역 실무까지 맡은 사역원을 별도로 설립하였다. 사역원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는 국가의 외교 방침을 수행하기 위해 주변 국가들의 언어를 익히고 통역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어인 한학(漢學)을 비롯하여, 몽골어인 몽학(蒙學), 만주어인 여진학(女眞學, 淸學), 일본어인 왜학(倭學)을 구분하여 관리하였다. 사역원 관원은 대부분 역과(譯科)에 합격한 중인들로 조선시대의 외교 실무관들이었다.

2 ‘사대교린’의 전담을 위해 사역원을 설치하다

사역원은 『고려사』 백관지 통문관조에 의하면, 1276년(충렬왕 2)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하고 한어를 습득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이로 보아 고려시대 통문관은 한어 교육을 위한 기구로써 사역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사역원은 1389년(공양왕 1) 기록에서 처음으로 확인된다. 이 당시 십학(十學)을 설치하고 여러 교수를 두었는데, 이학교수(吏學敎授)를 사역원에 설치하여 역학과 이학을 담당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1391년(공양왕 3)에는 한어와 역어, 이문 등을 담당한 기구로 통문관을 개칭한 한문도감(漢文都監)을 설치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1393년(태조 2)에 사역원을 새롭게 설치하여 한학을 습득하게 하였다. 이 당시 사역원은 고려 말의 사역원을 답습해 새로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사역원은 다양한 언어의 교육을 위해 교관인 훈도(訓導)를 설치하고 규모를 확대하였다. 1410년(태종 10) 1월에는 몽학 훈도관을 설치하여 몽골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보였고, 1414년(태종 14)에는 왜학의 학습을 사역원에서 주관하게 하였다. 1434년(세종 16) 6월에는 여진학 훈도를 설치하여 조선 초기 사역원의 직무 담당으로 한학과 몽학, 왜학, 여진학의 4개 언어가 확립되기에 이른다.

세종대 마지막으로 정비되는 여진학까지, 조선은 대외 관계에 있어 명만을 외교 대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북원(北元, 몽골)과 여진, 일본까지 염두에 둔 정책을 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역원을 설치하여 언어를 습득하게 하고, 또 통역의 실무를 맡겼던 것은 조선이 ‘사대교린’에 의한 대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였다. 특히, 뒤늦게 포함되는 여진과 일본은 대마도 정벌과 4군 6진의 개척이라는 고려 말부터 조선 세종대까지 수행된 일련의 대외정벌에서 이들과의 장기적인 군사 충돌보다는 외교 관계를 수립해 국경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조선은 ‘사대교린’을 수행하기 위한 통역 실무의 필요성과, 관련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그 사무를 전담할 관서가 필요하였다.

3 ‘사대교린’을 위한 통역 실무와 역관 양성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사역원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여러 국가의 언어를 통역하는 일이었다. 사역원에서 다루는 언어는 가장 중요한 주변국인 중국과의 관계를 위한 한학(漢學)이었지만, 한학과 함께 다양한 주변 국가들의 언어를 모두 담당할 필요가 있었다. 사역원에서 담당한 언어는 몽학(蒙學), 왜학(倭學), 여진학(女眞學, 淸學)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역원에서는 이들 4개의 언어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였다.

법제적으로 사역원은 통역이 주요 사무였지만, 통역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는 업무도 동시에 수행할 필요가 있었다. 사역원의 전신인 통문관은 통역 실무보다 외국어 교육 기능에 특화된 기관이었다. 조선 역시 통역 실무를 전담시키기 위해 해당 기구에서 외국어 교육의 역할까지 맡았다. 따라서 사역원의 기본 역할을 외국어 인재의 양성이라는 교육 담당과 외국과의 외교 관계를 위한 통역 담당으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사역원은 외국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기능, 즉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다른 관서와 달리 사역원에는 교수(敎授)나 훈도(訓導)와 같은 관직이 있었는데, 이는 모두 교육을 위해 설치한 관직이었다. 특히, 역관은 조선후기에 이르면 잡과에 입격한 중인들이 전담하게 되고 주요한 역관 가문이 관직을 독점하게 되는데, 이는 각 집안에서 어릴 때부터 전문적으로 외국어 기술자를 양성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매우 어린 나이에 생도에 입학하여 잡과에 합격한 이들은 일찍부터 능통한 외국어로 사역원의 외교 실무를 전담할 수 있었다.

이들은 사역원의 생도로 입학하여, 정식 교육을 받았다. 사역원에는 생도방(生徒房)을 설치하여 이들을 양성하는 데 노력하였다. 생도로 입학하는 숫자는 시대별로 변화가 생기긴 하였지만, 『경국대전』을 기준으로 하면 80명이 정원이었다. 입학한 이후에는 엄격한 관리를 통해 해당 언어의 습득에 매진시켰다. 이들은 『노걸대(老乞大)』, 『박통사(朴通事)』, 『역어지남(譯語指南)』, 『역어유해(譯語類解)』 등을 통해 학습하였다. 생도들은 취재(取才)를 거쳐 사역원 실무관료가 되거나 잡과의 하나인 역과(譯科)에 입격하여 고위 역관이 되는 길을 걷기도 하였다. 취재는 정식 과거시험이 아닌 특별 채용으로서 중요 교재를 강독하여 당락을 결정하였다. 역과 입격은 3년마다 진행하는 식년시와 별도의 특별 시험이 있는데 둘 다 정식 과거시험으로서 정해진 숫자만을 채용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사역원이 관장하고 있었다.

둘째, 사역원은 외국어의 통역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사역원의 통역 실무로는 사신 접대와 사행시에 주로 나타난다. 사신 접대는 명이나 일본, 여진 등 인접한 국가의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 이들을 접대하는 것이다. 외교는 당연히 고위 양반관료들이 담당하지만, 통역은 사역원의 역관이 맡았다. 외교 사행 때에도 역시 통역 실무를 맡은 역관이 동행하였다.

한편, 사역원에서는 외국어에 대한 번역 실무도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에 대해 입증할 근거는 없다. 사실 한문의 경우, 양반계층 대다수가 한문에 익숙한 만큼 번역 실무라는 것은 큰 필요가 없었다. 반면 통역은 직접 대화를 해야 하기 때문에 숙련된 인재가 아니면 어려웠다.

4 조선의 외교 실무관, 잡과 중인들로 구성되다

사역원은 정3품의 품계를 지닌 아문으로, 정3품 당하관인 정(正)이 실무 장관이다. 사역원에는 문과 출신인 양반 관료보다 잡과 출신인 중인 역관들이 중심이 되어 관서를 운영하고 있었다. 즉, 문과 출신은 겸직 책임자인 도제조 1인과 제조 2인, 한학교수 2인이고, 그 나머지는 대부분 중인이었다.

사역원의 직제를 보면 크게 경관직(京官職), 외관직(外官職), 서반군직(西班軍職)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역원 관원의 핵심은 경관직에 있다. 경관직은 도제조 1명, 제조 2명, 정3품 당하관인 정 1인, 종3품 부정(副正) 1인, 종4품 첨정(僉正) 1인, 종5품 판관(判官) 2인, 종6품 주부(主簿) 1인, 종7품 직장(直長) 2인, 종8품 봉사(奉事) 3인, 정9품 부봉사(副奉事) 2인, 종9품 참봉(參奉) 2인이 있고, 또 실직(實職)인 종6품 한학교수(漢學敎授) 4인, 정9품 한학훈도(漢學訓導) 4인, 청학훈도(淸學訓導) 2인, 몽학훈도(蒙學訓導) 2인, 왜학훈도(倭學訓導) 2인이 있다. 이들은 모두 32명이다. 여기서 정3품 정부터 종9품 참봉까지는 사역원의 실무를 담당한 역관들이고, 교수와 훈도는 교육을 담당한 역관들이다. 도제조와 제조는 당상관으로서, 사역원을 관리하는 책임자이지만 실직이 아닌 겸직으로 실무에 모두 관여하지는 않는다.

외관직은 외방 훈도(訓導)와 별차(別差), 겸군관(兼軍官)이 있다. 훈도는 모두 5명이다. 경상도의 부산포(釜山浦)와 제포(薺浦)에는 일본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왜학훈도 1명씩을 상주시켰고, 황해도 황주(黃州)와 평안도 평양, 의주에는 한학훈도를 1명씩 배치하여 중국 사신 접대의 업무를 보조하게 하였다. 또한 겸군관은 모두 9명으로 함경감영, 남병영, 의주와 위원(渭源), 초산(楚山), 벽동(碧潼), 창성(昌城), 만포(滿浦)에 한학을, 그리고 제주(濟州)에는 왜학을 보냈다. 사역원에는 서반군직이 배정되기도 하였는데, 교수와 훈도를 제외한 사역원 역관들이 돌아가며 받는 체아직이었다.

한편 사역원에는 원로하고 경험이 풍부한 자를 교회(敎誨)로 임명하여 차후 수행될 부경사행을 대비하게 하였다. 한학교회는 23명, 왜학교회는 10명이었는데, 사행이 결정되면 이 가운데 3명을 차출하였다. 부경사행은 역관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으므로, 그 후보군인 교회 역시도 역관 가운데 실력이 뛰어난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밖에 사역원에는 다수의 학생들도 존재하였는데, 이는 사역원이 외국어 교육도 전담한 기구였기 때문이다. 사역원 학생으로는 강이관(講肄官)과 생도가 대표적이다. 강이관은 양반 가운데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 한어를 공부하기 위해 온 경우를 말하며, 생도는 앞서 말했듯이 양가 자제나 서얼 자제들 가운데 직업적으로 역관을 준비하는 인원이 입학한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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