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성균관

성균관[成均館]

조선 최고의 유학 교육기관

1298년(고려 충렬왕 24) ~ 1894년(고종 31)

성균관 대표 이미지

대성전(성균관 문묘)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성균관은 유생 교육과 문묘 의례의 두 가지 사안을 처리했던 기관이다. 성균관에는 소과(小科)에 급제한 생원, 진사와 서울과 지방의 양반자제들이 입학하여 문과 급제를 목적으로 학문에 정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학교에 문묘(文廟)를 두어 중국과 한국 유현(儒賢)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따라서 성균관의 관원들은 유생을 교육시키는 교육자이면서,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祭官)이기도 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관제가 개편될 때까지 고려말기부터 조선까지 500년 넘게 존속하며 유가 사상의 정수를 전달하는 국가의 최고 교육기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 성균관의 성립 배경과 연혁

성균관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인재를 양성하는 기능을 지닌 관서이다. 신라시대의 국학(國學)과 고구려의 태학(太學)까지 연원을 소급할 수 있으며, 고려에 들어와서는 중국의 명칭을 따라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여 인재 양성의 기능을 하였다. ‘성균(成均)’을 관서의 명칭으로 처음 사용한 것은 고려 충렬왕 때였다.

1298년(충렬왕 24)에 국학(國學)을 성균감(成均監)으로 개칭하면서, 교육 기관에 ‘성균’의 칭호를 썼고, 1308년에는 성균관(成均館)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1356년(공민왕 5)에 국자감으로 환원되었지만, 1362년(공민왕 11)에 다시 성균관으로 개칭하였고, 조선은 이 명칭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하였다. 사실 ‘성균’의 명칭은 중국의 교육기관 명칭인 국자감을 사용하기는 참람하다는 판단에서, 원 간섭기의 임금과 신료들이 중국의 관서 명칭을 피해 사용한 것이다. 공민왕이 국자감을 다시 복구하려고 하였던 것은 자주개혁의 의지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관서의 명칭은 성균관으로 확정되었다. 이는 중국에 원을 대신하여 명이 들어서면서, 여전히 대국에 사대하려는 집권층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율학(律學)이나 산학(算學)과 같은 잡학(雜學) 교육도 함께 시켰던 국자감과 달리, 성균관은 오로지 유학(儒學) 교육만 전념하는 기구로서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 명칭을 유지한 것이다.

고려의 수도 개성에 있던 성균관은 1395년(태조 4) 천도가 행해지면서 한양의 새 건물로 옮겨졌다. 1478년(성종 9)에는 존경각(尊經閣)이 건립되고 성균관을 둘러싼 천(川)인 반수(泮水)가 완성되며, 성균관의 강역이 일단락되었다. 임진왜란으로 건물이 전부 소실되어 수년에 걸쳐 수리해야 했지만, 성균관의 상징성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선시대 내내 최고의 교육기구로 자리하던 성균관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관제가 개혁되어 학무아문(學務衙門)의 산하에 ‘성균관급상교서원국(成均館及庠敎書院局)으로 변혁되었고, 이듬해에는 직제도 개편되었다. 결국 일본에 병합된 지 1년만인 1911년에 경학원(經學院)으로 개칭되면서 본래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3 교육과 의례를 통해 유교 정신을 전수하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성균관의 역할은 유학(儒學)을 가르치는 직임을 관장한다고 하였다. 고려시대 국자감이 주로 인재의 양성에만 초점이 맞추어졌다면, 성균관은 인재 양성은 물론 교화와 의례 기능까지도 추가되었다. 이는 성균관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 ‘성균(成均)‘은 ‘쓸모 있게 다듬어지지 않은 인재를 완성 시킨다’는 뜻의 ‘성인재지미취(成人材之未就)’와 ‘가지런하지 못한 풍속을 고르게 한다’는 뜻의 ‘균풍속지부제(均風俗之不齊)’의 두 구절에서 첫 글자를 따서 이름 지었다. 즉, 이름에서부터 인재를 양성하고 풍속을 교화하는 기능을 내세우고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 성균관은 크게 두 가지의 주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성리학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학문의 전당이었고, 또 하나는 국가의 관리와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의 산실이었다. 특히, 성리학 보급과 관련하여 성균관에서는 유학의 선성(先聖)과 선현(先賢)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것이 중요했다. 이는 성균관의 공간 배치에도 녹아들어 있다. 즉, 문묘(文廟)인 대성전(大成殿)을 중심으로 한 제사 공간과 명륜당(明倫堂)을 중심으로 한 교육 공간이 철저히 양분되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성균관의 기능을 살펴보자.

첫째, 교육 기능이다. 일상적인 교육은 강학(講學)과 과시(課試)로 구분할 수 있다. 강학은 말 그대로 상재(上齋)와 하재(下齋)에 속한 유생들을 대상으로 학문을 연마하는 것이다. 과시는 평가 결과에 따라 유생들에게 혜택을 주는 시험을 말한다. 황감(黃柑)이나 전강(殿講) 등이 이들에게 주는 혜택이다. 황감은 제주도의 황감(감귤)이 올라오면 특별히 열리는 비정기적인 시험이었고, 전강은 1년에 4번 유생을 대상으로 시험하여 여러 혜택을 수여하는 것이었다. 시험에서 우수한 점수를 받으면 과거에 쉽게 급제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도 하였다. 즉, 정기적인 과거 시험으로 관리에 등용되는 일반 양반들과 달리 성균관의 학생들은 별도의 부정기적인 시험으로 관리에 채용될 수 있는 특혜를 받았던 것이다.

성균관의 교육 기능으로 쉽게 오해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처럼 유생들이 교관에게 매일 일정한 수업을 듣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정해진 교육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생들은 각자가 알아서 공부하였고, 필요에 따라 교관과 토론을 하거나 공부 내용을 보고하였다. 따라서 강학의 기능보다 학생들을 평가하고 과거에 급제시켜 관리로 채용하는 데 더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둘째, 문묘를 중심으로 한 의례 기능이다. 의례는 정기적인 석전(釋奠)과 삭망전(朔望奠)이 있었고, 그 외에 비정기적인 의례도 있었다. 석전은 매년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거행하는 가장 중요한 제사 의례였고, 그 외에 문묘가 훼철되거나 수리할 때에 위패를 옮기면서 별도의 의례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성균관에는 대성전과 동서무(東西廡)를 갖추고 있는데, 여기에는 공자와 중국의 유현(儒賢)들, 그리고 신라부터 조선까지 중요한 현인들을 모시고 있었다. 이곳은 조선의 국가이념이라 할 수 있는 유학을 발전시킨 인물들의 위패를 모신 공간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성균관은 이들 선현에 대한 제사와 여러 의례를 거행하는 공간이자, 행사를 담당하는 주체로서 기능하였다.

이처럼 성균관은 교육과 선현에 대한 제사 기능을 두루 갖춘 조선왕조 최고의 교육기구였다. 그러나 조선후기로 가면서 성균관은 여러 특전으로 인해 학문 연구보다는 입신양명의 출세 도구로 이용되어 교육의 기능이 퇴화되었다. 이에 따라 양반들은 서원(書院)을 중심으로 사학(私學)을 부흥시키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성균관은 신망받는 인재들로 교관을 구성하였고, 아무나 입학할 수 없었던 국가 공인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4 성균관의 관원과 구성원

성균관의 구성원은 관원과 학생으로 양분할 수 있다. 성균관은 교육기관이지만, 명실상부한 국가 중앙관서의 하나였다. 따라서 성균관을 구성하는 핵심은 여기에 배속된 중앙관원이라고 할 수 있다. 성균관의 직제는 조선이 건국된 직후에는 고려시대의 제도를 답습하였다. 따라서 성균관을 대표하는 자리로 정3품 당상관인 대사성(大司成)이 총 책임을 지고, 이어 종3품의 좨주(祭酒) 1인, 정4품의 악정(樂正) 2인, 정5품의 직강(直講) 1인, 정6품의 전부(典簿) 1인, 정7품의 박사(博士) 2인, 종7품의 순유박사(諄諭博士) 2인, 정8품의 진덕박사(進德博士) 2인, 정9품의 학정(學正) 2인, 정9품의 학록(學錄) 2인, 종9품의 직학(直學) 2인, 종9품의 학유(學諭) 4인을 배속시켰다.

그러나 쓸모없는 관원을 줄이고자 했던 세조의 관제 개혁으로 정비되었고, 그것이 그대로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이때 확정된 관제는 겸직(兼職)으로 임용하는 정2품의 지사(知事) 1인, 종2품의 동지사(同知事) 2인과, 실직(實職)으로 정3품의 대사성 1인, 종3품의 사성(司成) 2인, 정4품의 사예(司藝) 3인, 정5품의 직강 4인, 정6품의 전적(典籍) 13인, 정7품의 박사 3인, 정8품의 학정 3인, 정9품의 학록 3인, 종9품의 학유 3인이었다. 즉, 겸직으로 새롭게 지사와 동지사가 포함되었고 좨주와 악정 대신에 사성과 사예가 편성되었으며, 박사도 간소화되는 변화가 있었다.

성균관의 지사와 동지사는 겸직이었지만 대사성보다 상위에 존재하는 관직이었다. 물론 대사성은 성균관을 책임지는 실무 역할을 하였지만, 대사성의 위에 상징적으로 학문이 뛰어난 자를 지사와 동지사로 임용하여 성균관의 위상을 높이는 역할을 하였다. 지사는 주로 문형(文衡)의 칭호를 받는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이 겸임하였다. 문형은 국가 최고의 학자에게 수여되는 상징적인 관직이었으므로, 성균관 지사를 겸임하며 국가 학문 기관의 영예를 높여줄 수 있었다.

성균관의 관원들은 대사성부터 학유에 이르는 관원이다. 이들은 모두 문관만 차출되었고 성균관의 주요 업무를 도맡아 수행하였다. 이들은 의례에 참여하는 제관(祭官)이면서, 교육을 담당하는 학관(學官)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였고, 유생들에게는 스승으로서 교육에 참여하며 평가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외의 각종 행정적 사무 역시도 이들 관원이 나누어 맡았다.

조선 후기에는 주목해야 할 새로운 관직이 추가되었는데, 좨주(祭酒)와 사업(司業)이라 불린 직임이었다. 이들은 학행이 다른 자들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사람을 뽑으라고 법전에 명시되었다. 이들 직임은 법에 명시한 관직으로서 조선후기 산림(山林)에 은거한 학자들에게 내리는 명예로운 직임이었다. 특히 좨주는 산림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로서 사표(師表)를 이룰만한 인물이 선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대사성보다 명망 있는 사람, 즉 상징적 존재로서 실력과 덕행을 모두 갖춘 사람을 차출하여 사표로 삼았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장생(金長生), 장현광(張顯光),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신규식 윤선거(尹宣擧), 허목(許穆), 윤휴(尹鑴), 박세채(朴世采), 윤증(尹拯) 등이 좨주를 역임하였다. 이 가운데 김장생과 김집, 송시열과 송준길, 박세채는 문묘(文廟)에 종사되는 18인의 동방현인(東方賢人)에도 포함되었다.

5 성균관 유생의 나날

성균관의 유생은 시기에 따라 변화는 있지만 대개 150~200인 정도의 규모를 유지하였다. 이들은 상재생(上齋生)과 하재생(下齋生)으로 구분되는데, 상재생은 소과(小科)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로 들어온 사람들이었고, 하재생은 유학(幼學)으로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일정한 시험을 통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성균관 학생들은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에서 숙식하면서 공부하였는데 이들은 식당에 비치된 명부인 도기(到記)에 서명해야 했다. 이를 근거로 원점(圓點)을 계산하여 300점 이상을 받은 학생만 관시(館試)라고 하는 성균관 유생들에게만 부여한 별도의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성균관 학생들은 학내 교칙을 준수할 의무가 있었는데, 주자학 이외의 불교나 노자와 같은 이단(異端)의 책을 읽거나 스승을 모독하거나 품행이 단정치 못하는 등의 다양한 사유로 처벌될 수 있었다. 반면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등의 여러 특혜도 받았다.

유생들은 자체적인 기구인 재회(齋會)를 만들어 내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였다. 재회의 회장은 장의(掌議)였는데, 이들은 내부 문제뿐 아니라 대외적 문제에도 발언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조정의 사안에 대해 상소를 올리거나, 이단에 대한 배척을 요구하거나, 선대 유신(儒臣)을 문묘에 배향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유생들은 문과 급제를 목적으로 공부하는 학생들로 정치적 현안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였고, 때로는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도 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