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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사대부

성리학을 탐구하며 이상 사회를 그리다

미상

1 개요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변혁을 이끌었던 세력을 지칭하는 학술용어이다. 사상적으로 이들은 성리학(性理學)을 공부한 학자였으며, 정치적으로는 무신집권기 이래로 노정된 고려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분투한 개혁세력이었다. 신진사대부가 등장하였을 당시 고려에서는 원(元)의 힘이나 국왕의 총애에 기대어 국정을 장악한 권문(權門)과 대대로 명망 높은 귀족가문이었던 세족(世族)이 긴밀하게 얽혀 공고한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소위 ‘권문세족’으로 통칭되는 이들은 구습을 고집하며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해왔는데, 신진사대부는 기존의 신진세력들과는 달리 이들과 영합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리학을 이정표로 삼아 고려사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으며, 이러한 의식적 활동 속에서 새로운 왕조 ‘조선’을 탄생시켰다.

2 신진사대부의 원형 ‘능문능리(能文能吏)’

일찍부터 한국사학계에서는 신진사대부의 원형으로 무신집권기의 ‘능문능리(能文能吏)’를 지목하였다. ‘능문’은 경학·사학·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훌륭한 문장을 창작할 수 있는 사람을, ‘능리’는 관리로서의 행정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을 지칭한다. 따라서 두 단어의 합성어인 ‘능문능리’는 곧 학자이자 정치가인 사대부와 ‘표면적으로’ 유사하다.

무신집권기는 기존의 질서가 흔들리던 시기였다. 수많은 문신들이 살해당하고 무신들이 수뇌부를 장악한 결과, 지배층의 구성과 정치운영 방식에서 큰 지각변동이 발생하였다. 능문능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그들은 대개 지방 향리 출신으로서 가문의 위세가 아닌 개인의 능력으로 중앙조정에 진출하였으며, 행정실무를 전담하면서 무신정권을 지탱하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능문능리는 후대의 신진사대부와 달랐다. 그들은 신진사대부처럼 현실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뚜렷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기득권층과 스스로를 차별화하지도 않았다. 단지 ‘학자적 관료’인 사대부의 모습을 구현하였다는 점에서 신진사대부의 ‘원형’으로 평가받을 따름이다.

3 성리학의 수용과 신진사대부의 등장

성리학이 수용된 이후 고려에는 비로소 신진사대부가 등장할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되었다. 기본적으로 성리학은 개인의 도덕적 수양 및 진리탐구가 정치의 일환이라는 전제 하에 국왕과 관료에게 새로운 역할을 기대한다. 나아가 엄격한 화이론(華夷論)과 벽이단론(闢異端論)을 바탕으로 한 사회의 풍속을 재단한다. 성리학을 접한 신진사대부는 점차 차별화된 자의식을 갖기 시작하였고, 성리학의 가르침을 이정표로 삼아 정치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고려의 변화를 추동하였다.

고려에 처음 전파되었던 성리학은 대개 원의 관학화(官學化)된 성리학이었다. 원은 과거시험인 제과(制科)에서 성리학을 채택하고 유학제거(儒學提擧)를 각지로 파견하여 성리학을 보급하였는데, 이러한 정책을 고려에도 그대로 적용하여 고려인들에게 제과 응시기회를 제공하였다. 나아가 안향(安珦)을 첫 번째 유학제거로 파견하여 체계적으로 성리학을 교육하였다. 이로부터 고려의 지식인층은 제과에 응시하기 위해 성리학에 천착하고, 자연스럽게 성리학이 강조하는 덕목들을 체화하기에 이른다.

충선왕(忠宣王) 시기에 고려의 성리학은 새로운 분기점을 맞이하였다. 충선왕이 원의 수도에 설립한 만권당(萬卷堂)을 통하여 고려의 지식인들이 요수(姚燧)·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頫)와 같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직접 교유하며 보다 다양한 성리학 사조를 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현(李齊賢)은 만권당이라는 새로운 통로를 적극 활용하여 고려의 성리학 이해수준을 높인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백문보(白文寶)·이곡(李穀)·이색(李穡)과 같은 인재들을 발굴해 심화된 학문을 전수하였으며, 이로써 신진사대부가 성장할 수 있는 광범한 기반을 만들었다.

4 신진사대부의 정치세력화

이제현 이후 비로소 고려의 성리학자들은 ‘신진사대부’라는 용어에 걸맞은 정치세력으로 발전해나간다. 이러한 분기점을 만들었던 이제현은 몸소 개혁정치를 주도하면서 이상적인 사대부의 모습을 후세에 보여주었다. 우선 그는 충혜왕(忠惠王)이 폐위되고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는 시점에, 국가의 공공성을 회복하고 권세가들의 침탈을 막기 위한 다양한 개혁안을 제시함으로써 향후 정치도감(整治都監) 활동의 방향성을 잡았다. 또한 그는 공민왕(恭愍王) 즉위 초반의 정국에도 참여하여 충목왕대에 성공하지 못한 내정 개혁을 다시 한 차례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색과 그의 문인(門人) 단계에 이르면 신진사대부가 보다 뚜렷한 정치세력으로 발전해나가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색이 성균관(成均館)을 재건할 때 함께했던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 등은 공민왕 말년에 신돈(辛旽)의 국정운영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유교 본위의 정치를 지향하였으며, 우왕(禑王)이 즉위한 뒤에는 이인임(李仁任) 일파가 다시 원(북원)과의 외교관계를 재개하는 것에 대해 극력 반대하였다. 비록 공민왕의 분노와 이인임의 탄압으로 이러한 정치활동들이 큰 성과를 가져오지는 못하였으나, 위험을 감수하고 집단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이 시기 신진사대부는 분명 과거와는 다른 자의식과 현실인식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5 신진사대부의 분열과 조선의 건국

신진사대부는 위화도 회군을 기점으로 두 세력으로 분열되어 정치적 갈등을 벌였다. 최영(崔瑩)의 요동정벌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던 신진사대부는 이성계(李成桂)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우왕을 몰아냈고,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며 구세력과의 단절을 꾀하였다. 이와는 달리 요동정벌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신진사대부는 이색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우왕의 아들 창왕(昌王)을 추대하였으며, 기존의 질서를 크게 뒤흔들지 않는 수준의 온건한 개혁을 추구하였다.

두 세력은 특히 토지제도의 개혁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이성계 일파가 토지겸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전(私田)을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반면에 이색 일파는 경솔하게 옛 법을 고쳐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경제적 이권을 획득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고려의 전통적 질서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고려사회를 개조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직결된 싸움이었다. 실제로 토지제도뿐만이 아니라 예(禮)를 해석하고 실천하는 방식, 불교에 대한 태도 등에서도 양자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는 다양한 이념적 논쟁을 낳았다. 그리고 고려의 전통적 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고자 하였던 이성계 일파가 우위를 장악한 결과, 고려는 종말을 고하고 급진적 신진사대부의 이념을 구현하는 새로운 왕조 조선이 탄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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