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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조선 왕조 500년의 국가·사회 운영을 주도했던 최상위 지배 신분층

미상

1 양반의 개념

신분(身分)은 혈연이나 직업, 거주지, 소유 재산 등에 따라 등급이 나누어지고 각각의 등급은 서로 구별되는 정치·경제·사회적 지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가는 사회 계층을 의미한다.

조선 시대의 법제적 신분은 크게 양신분(良身分)과 천신분(賤身分)으로 구분되었다. 양신분은 관직에 나갈 권리가 있고 국가에 조세(租稅)와 군역(軍役)의 의무를 갖는 자유민이었다. 반면 천신분은 원칙적으로 관리가 될 수 없으며 조세·군역의 의무도 없으며 타인이나 관(官)에 예속되어 있는 부자유민이었다. 이처럼 법제적으로는 양·천의 두 가지 신분으로 나누어졌지만, 실제에서는 보다 다양한 신분 계층이 나타났다. 즉, 혈연·직업[관직]·재산 등에 따라 양신분 내에서 여러 개의 등급이 나뉘어졌고, 그 중 최상위 등급이 최고의 지배 집단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데, 이 계층이 바로 양반(兩班)이다.

양반이라는 용어가 처음부터 지배신분층을 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원래 양반은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함께 지칭하는 관제상의 용어였다. 즉 고려·조선시대에 국왕이 조회(朝會)를 받을 때 남향(南向)한 국왕을 기준으로 동쪽에 문반[문신 관료]이 서고 서쪽에 무반[무신 관료]이 섰는데, 이들 문반과 무반을 합하여 양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1392년(태조 1) 10월 이조전서(吏曹典書) 유양(柳亮)은 오랫동안 폐지된 문무 양반의 정안(政案)을 다시 시행할 것을 건의했는데, 이때의 문무 양반은 현직의 문무 관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양반은 원래 관제상의 용어였으며, 따라서 처음에는 문·무반의 관직을 가진 사람들만 양반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고려 말·조선 초에 관계(官階)와 관직 체계가 정비되고 양반관료체제(兩班官僚體制)가 확립되면서 양반이 가리키는 범위가 점점 확대되었다. 즉 문·무반의 현직 관리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가문까지도 양반으로 지칭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농민을 비롯한 다른 양인(良人)과는 구분되는 신분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예를 들어, 1406년(태종 6) 6월에 의정부(議政府)는 양인으로 속량된 이들 중 역(役)을 피해 도망하는 자가 많아 장차 양반과 섞일 폐단이 우려된다고 했는데, 여기서의 양반은 신분적 용어인 양인과 대칭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신분적 의미로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또, 1482년(성종 13) 1월에 조정에서 왕순례(王循禮)와 이영상(李永常)의 노비 송사에 대해 논의할 때 대사헌 김승경(金升卿)이 “왕순례의 가계[族]는 아마 양반은 아닌 듯합니다.”라고 했는데, 여기서의 양반도 가계와 연결된 신분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양반은 문무 관직자를 가리키는 관제상의 용어에서 점차 다른 양인들과는 구분되는 지배신분층을 뜻하는 신분적 용어로 바뀌어 나갔다.

2 양반의 형성 ⑴ - 고려의 양반

문무반의 현직 관료를 지칭하는 관제상의 양반 개념은 양반관료체제가 처음 실시된 고려 초기부터 사용되었다. 고려는 특정 혈통의 신분만이 고위직을 독점했던 신라의 골품제(骨品制)를 폐지하고 고려 개국을 지지한 여러 세력들을 등용하여 양반관료제를 정비해 나갔다. 하지만 고려에서는 문반의 지위가 무반보다 높아서 관료제 운영이 과도하게 문신 중심으로 치우쳐 있었으며 무과(武科)도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한 양반관료제였다고 하기는 어렵다.

광종(光宗) 대 이후 개국공신 세력이 퇴조하고 신라의 6두품(六頭品) 출신들과 지방 향리(鄕吏) 출신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 관료로 활발히 진출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향리 출신들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고려에서는 향리 중에서도 부호장(副戶長) 이상의 손자나 부호정(副戶正) 이상의 아들, 즉 상층 향리의 자제들만 문과(文科)에 응시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향리 중에서 과거를 통해 중앙의 양반 관료로 진출하는 이들은 호장층(戶長層)의 상층 향리들이었고, 하층 향리들은 계속해서 지방의 향직(鄕職)에 메여 있게 되었다. 그 결과 향리는 양반관료로 상승한 부류와 계속 향리로 남아있는 부류로 분화되었다. 그리고 양반으로 상승한 향리들은 양반층 내의 통혼(通婚) 및 음서제(蔭敍制) 등을 통해 대를 이어 관직을 이어나감으로써 문벌귀족(門閥貴族)을 형성하였다.

고려 후기에 들어서면 양반관료층을 형성하는 계층들이 확대되었다. 먼저 무인집권기(武人執權期)에는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양반관료층을 형성했으며, 기존의 문벌귀족들과 통혼하면서 자신들의 신분을 상승시켰다. 또, 최씨정권(崔氏政權) 이후에는 문학(文學)과 행정실무에 능한 문신들이 활발하게 관료로 진출하였다. 원간섭기(元干涉期)에는 친원세력(親元勢力)들이 원의 후원을 등에 업고 새로운 양반관료층으로 발돋움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성리학을 수용한 신흥 유신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정부에 진출하였다. 공민왕 대에는 여러 전란을 거치면서 전공(戰功)을 세운 무장(武將) 세력들이 크게 성장하여 양반관료층의 한 축을 형성하였다. 특히 전공자들에 대한 포상으로 첨설직(添設職)이 남발되면서 양반층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상과 같이 고려 말에 이르러 양반관료층이 크게 증가한 반면 관직의 정원이나 관료 복무의 대가로 지급할 토지 등의 경제 기반은 한정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양반관료층 내부에서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경쟁과 대립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고려 말 권문세족(權門勢族)과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의 대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지만, 새로 출사한 관료들에게 지급할 토지 등의 경제 기반이 부족했던 것도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이성계(李成桂) 등 무장 세력과 연계한 신진사대부는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이후 사전개혁(私田改革) 등을 통해 권문세족의 정치·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키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통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건국한 후, 명실상부한 양반관료체제를 확립하였다.

3 양반의 형성 ⑵ - 조선 초기의 양반

조선을 건국한 혁명 세력들은 새 나라의 사회 신분을 재편하는 작업을 추진했는데, 양반과 관련해서는 고려말에 지나치게 증가한 양반층을 줄이고 지배신분층을 재정리해 나갔다.

먼저 조선 정부는 향리들이 양반관료로 상승하는 것을 억제하였다. 향리는 고려 초부터 과거(科擧)·군공(軍功) 등을 통해 양반관료로 진출했는데, 고려 말에 그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향역(鄕役) 담당자가 부족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이미 고려 말부터 향리의 과거 응시를 대폭 제한하는 조치들을 취했으며, 이는 조선 초에 들어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고 이미 양반관료가 된 향리들의 경우에도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거나 특별한 군공이 세운 일이 없는 이들은 다시 향리로 환원시켰다.

세종 대부터는 향리들에게 지급하던 외역전(外役田)을 폐지했으며, 녹봉도 지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원악향리(元惡鄕吏)를 처벌하는 법 규정을 제정하여 향리들이 지방에서 토착세력으로서 가졌던 영향력을 제도적으로 차단하였다.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향리는 양반관료로의 상승로가 크게 차단되었으며, 점차 지방의 향역 담당자로 격하되었다. 그 결과 향리는 양반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면서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 정부는 서리(胥吏)나 기술관, 양반의 서얼(庶孼) 등에 대해서도 각종 제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이들이 양반관료로 진출하는 것을 억제하였다. 서리에 대해서는 과전(科田)과 녹봉의 지급을 정지했고 승급(昇級)을 위한 근무 일수를 양반보다 길게 했으며, 근무 일수를 채운 서리들이 진출할 수 있는 관직수도 크게 제한하였다. 기술관에 대한 차별은 15세기 후반부터 나타났는데, 기술관직을 체아직(遞兒職)으로 한정했고 직전(職田)을 지급하지 않았으며 정3품 당하관 이상으로는 승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양반의 서얼에 대해서도 제한 조치가 나타났다. 양반의 서얼자손은 문과의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할 수 없었고, 기술직이나 잡직에만 한품서용(限品敍用)되었으며, 봉사(奉祀)나 상속(相續) 등에서도 차별대우를 받았다. 또 재가(再嫁)한 부녀자의 자손도 문무과와 생원·진사시에 응시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상과 같이 조선 초기 집권층들은 향리·서리·기술관·서얼 등에 대한 여러 제한 조치를 통해 이들의 관직 진출을 억제함으로써 양반층의 수를 줄여나갔다. 그 결과 조선의 지배층은 점차 양분화되어 양반은 현직 관료 및 그 가족·가문까지 통칭하는 상급 지배신분층으로 자리매김하였고, 향리·서리·기술관·서얼 등은 양반층에서 분리·격하되어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중종대에 이르러 법제상, 사회관념상 다소 모호했던 양반의 범주가 보다 명확하게 법제화되기에 이르렀다. 중종 재위 기간 동안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에 사민입거 대상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사족(士族)’들을 입거 대상에 포함 시킬 것인가의 여부가 논란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사족을 사민 입거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에 동반하여 사족의 범주가 결정되었는데 이것이 사회적 지배계층, 즉 양반에 대한 정의와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사족에는 문무과출신자와 그 자손, 친족과 외족에 현관(顯官)을 지낸 관직자가 있는 자, 생원과 진사, 친공신의 후손 등이 포함되었다. 이리하여 조선 초기까지 지배계층을 다소 모호하게 표현하던 용어인 양반은 중종대 이후 보다 법제적인 근거를 가지는 용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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