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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사[燕行使]

청의 수도 연경에 보낸 사신단

미상

연행사 대표 이미지

여지도의 의주 북경 사행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 개요

연행사(燕行使)는 조선왕조가 청(淸)의 수도인 북경에 정기적으로 파견했던 사행단이다. 명청 시기 조선은 중국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으며, 매년 사행단을 파견했다. 명대에는 천자의 나라인 천조(天朝)를 방문한다는 의미에서 조천사(朝天使)라 불렀지만, 청에 가는 사신단을 조천사라 부를 수는 없었다. 조선은 청과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으로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으며, 청은 조선에 중화(中華)이자 재조지은(再造之恩)이 있던 명을 멸망시킨 ‘오랑캐’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조선은 존숭의 의미를 지우고 북경의 옛 명칭인 연경(燕京)에 가는 사절이라는 뜻으로 연행사라 불렀다.

2 연행사의 종류와 구성

조선은 병자호란으로 명과의 관계를 끊고 청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으며, 명의 제도에 따라 청에 음력 1월 1일 신년 하례[정조(正朝)], 황제의 생일 축하[聖節], 동지(冬至) 조공의 명목으로 사행단을 보내 조공하고, 추가로 세폐(歲幣)를 보냈다. 청 입관 이후, 1645년(인조 23) 청은 동지, 정조, 성절, 세폐를 합친 삼절연공행(三節年貢行)을 신년 하례에 맞춰 보내도록 하였다. 매년 파견되는 정기 사행 외에 특별 사안이 있을 때 별사(別使)를 파견했다. 별사에는 왕이나 왕비의 죽음을 알리는 고부사(告訃使), 황제 등극이나 난의 평정 등 축하할 일이 있을 때 파견하는 진하사(進賀使), 책봉 등 정치적 외교적으로 청에 청할 일이 있을 때 가는 주청사(奏請使), 청 황실의 국상에 조의를 표하는 진향사(進香使), 감사를 표하는 사은사(謝恩使) 등이 있다. 한양에서 북경에 이르는 여정은 상당히 멀고, 사행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별사를 다른 사행과 함께 보냈는데 이를 겸행(兼行)이라 부른다.

사행단의 규모는 사행 시기와 임무에 따라 달랐는데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이중 정식 사신은 30명 정도의 정관(正官)이었다. 정관은 삼사(三使)라 불리는 정사, 부사, 서장관과 의원, 화원, 군, 역관으로 이루어진다. 고부사의 경우 부사가 없었다.

정사는 상사(上使), 상방(上房)으로도 불리며, 국왕의 대리인으로 사행단의 최고 수장이다. 정사 유고 시 부사가 정사의 직을 맡는다. 서장관은 속칭 삼방(三房), 행대(行台)로 불렸다. 사행 사무와 수집한 정보를 매일 기록한 문견록(聞見錄)을 작성하여 귀국 후 국왕에 보고했으며, 대간(臺諫)의 직분을 겸하여 사행단의 규찰을 점검하였다. 정관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역관으로 통역, 무역, 정보수집, 궁중 물품 구매 등의 사무를 맡았다. 역관의 수장은 당상역관(堂上譯官)으로 수역(首譯) 또는 대통관(大通官)이라 불렀으며, 보고서를 작성해 귀국 후 사행에서 수집한 정보를 국왕에게 보고했다.

3 연행노정

청으로 들어가는 국경 관문인 책문에서 북경에 이르는 연행노선은 청이 정했다. 한양에서 북경에 이르는 거리는 규장각에 소장된 『연행노정기(燕行路程記)』에 따르면, 3,069리(약 1,215km)였다. 1679년(숙종 5) 이전에는 요동에 들어서 우가장(牛家庄)을 거치는 노선이었지만, 우가장에 해양 방어를 위한 성보(城堡)가 세워지면서 이를 경유하지 않고 소흑산을 거쳐 광녕으로 가는 노선이 정해졌다. 이 노선은 1893년까지 유지됐다. 『통문관지(通文館志)』에 기록된 구체적 노선은 다음과 같다.

압록강(鴨綠江)-탕참(湯站)-책문(柵門)-봉황성(鳳凰城)-진동보(鎮東堡)-진이보(鎮夷堡)-연산관(連山關)-첨수참(甜水站)-요동(遼東)-변성(邊城)-거류하(巨流河)-백기보(白旗堡)-이도정(二道井)-소흑산(小黑山)-광녕(廣寧)-여양역(閭陽驛)-석산참(石山站)-소릉하(小淩河)-행산역(杏山驛)-연산역(連山驛)-광녕위(寧遠衛)-조장역(曹莊驛)-동관역(東關驛)-소하역(沙河驛)-전둔위(前屯衛)-고령역(高嶺驛)-산해관(山海關)-심하역(深河驛)-무녕현(撫寧縣)-영평부(永平府)-칠가령(七家嶺)-풍윤현(豐潤縣)-옥전현(玉田縣)-계주(薊州)-삼하현(三河縣)-통주(通州)-북경(北京)

1777(정조 1) 사행을 다녀온 이갑은 『연행기사(燕行記事)』에서 연행노선을 초절(初節), 중절(中節), 종절(終節)로 구분하였다. 초절은 의주에서 심양에 이르는 구간이다. 봉황성참(鳳凰城站)에서 십리하참(十里河站)에 이르는 동팔참(東八站) 구간은 산지·구릉·분지가 주를 이루며, 고도가 높지 않으나 산세가 험준해 연행 구간 중 가장 험난했다. 중절은 심양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구간으로 요하 하류 평원지대이다. 지형이 평탄했고, 19세기 이전 청 황제가 자주 심양으로 행차하였기에 길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다만 하천이 많아 겨울 이외 계절에 파견되는 별사의 경우 폭우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고, 봄에는 황사가 사행단을 곤욕스럽게 했다. 종절은 산해관에서 북경에 이르는 노선으로,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상업이 발달했다.

4 연행사의 북경에서 활동

연행사의 목적지는 북경이었다. 연행노정에 있는 대부분의 촌락과 도시들은 북경으로 가는 경유지였고, 심양을 제외하면 이틀 이상 머물지 않았다. 연행사는 북경에 30∼40일 정도 머물렀다. 북경에서의 활동은 공적 활동과 사적 활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공적 활동은 외교 문서인 표문(表文) 및 자문(咨文) 제출, 방물 납부, 습례(習禮), 조회(朝會) 및 연회 참석, 영상(領賞) 등 의례 활동이다. 연행사는 기본적으로 인신무외교(人臣無外交, 신하 된 자는 외교를 할 수 없다)의 원칙에 따라 외교 문서를 전달하는 것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방물은 청에 바치는 조공품으로, 의주에서 심양까지는 연행사가 운반했지만 심양에서 북경까지는 청 관원이 맡았다. 연행사가 북경에 도착한 후 보통 1∼2주 뒤 사신 관소인 회동관에 방물이 도착했고, 연행사는 이를 점검해 태화전 동측 내무부 창고에 납부했다. 사신은 조회에 참석하여 황제에게 인사드리는데, 조회에 참석하기 위해 예를 익히는 습례를 습례정에서 예부 관원의 지도하에 행했다. 조회는 태화전 앞뜰에서 열리는데, 정관만 들어갈 수 있었다. 사신이 참석하는 연회로는 예부가 주관하는 예부연과 회동관연이 있었으며, 건륭 후기에 외번연이 조공국 사신에게 확대되어 원명원에서 열리는 황실 연회에 참석했다. 영상(領賞)은 오문(午門)에서 하사품을 받는 활동이다.

공적 활동 이외의 연행사는 유람과 문인교류 등의 사적 활동을 했다. 홍대용의 『을병연행록』이나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을 통해 중국 체험의 내용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청초부터 공무 외 개인 활동이 자유로웠던 것이 아니다. 청은 명대에 시행된 사신에 대한 문금(門禁) 정책을 이어받았다. 사신들은 공무 외에 숙소인 회동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청 입관 이후 1683년 정성공이 세운 정씨왕국이 완전히 진압되기까지 청 내부 사정이 불안정하였기에 병자호란으로 굴복시킨 조선에 대한 통제를 풀지 않았으며, 회동관 문금도 엄격했다. 청 내부 안정이 공고해지고 18세기 전반 조청관계가 안정되면서 비로소 청의 통제가 느슨해졌고, 회동관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워져 연행사의 북경 내 사찰, 천주당, 시장 등 유람이 크게 늘었다.

연행사의 북경 내 활동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조선과 청 문인 간 교류도 활발했다. 1766년 2월 삼절연공사 서장관 홍억(洪檍)의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북경에 간 홍대용은 서적·문방상우·골동품 등을 판매하는 점포가 밀집한 번화가인 유리창에서 항주 출신 청나라 문인 육비(陸飛)·엄성(嚴誠)·반정균(潘庭筠)을 만나 친교를 나누고, 필담을 정리한 『건정동필담(乾淨洞筆談)』을 남겼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문인교류는 연행사의 일상적 풍경이 되었다.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는 활발했던 조청 문인교류의 양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세한도〉에는 청나라 문인 16명이 쓴 감상문이 덧붙여져 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김정희의 제자이자 역관이었던 이상적이 제주도에 위리안치된 스승으로부터 그림을 받아 1845년 사행 때 북경에 가져가 청나라 문인들과 함께 감상했기 때문이다. 1809∼1810년 연행을 다녀온 김정희는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과 사제관계를 맺었고 귀국 후 청나라 문인과 계속 교유해 북경 문단에서 이미 유명 인사였다. 이에 〈세한도〉 감상 모임에 많은 인사들이 모였고, 모두 감탄하며 감상문을 남겼다. 당시 김정희는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었지만, 연행사를 통해 조청(朝淸) 문인교류 네트워크 안에 있었다.

5 전통적 연행사의 변화와 종결

연행사의 주요 활동은 북경에서 이루어졌다. 북경은 황제가 사는 청나라의 수도였으며,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황제의 윤허가 필요했다. 연행사와 같은 조공사절이 북경에 들어갈 수 있었고, 17∼18세기에는 황실 화가나 천문을 관측하는 흠천감(欽天監) 관원으로 예수회 선교사들이 북경에 머물렀다. 하지만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톈진조약〉과 〈베이징조약〉으로 1860년 이후 서양 열강은 북경에 공사관을 세우게 되고, 외국인들은 북경을 포함한 중국 전역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다. 서양 세력에게 북경이 열리면서, 연행사의 서양에 관한 관심이 커지고 관찰이 늘었다. 조선은 병인양요, 제너럴 셔먼호 사건, 남연군묘 도굴 미수 사건, 신미양요 등을 겪으며 통상수교를 거부하고, 연행사를 통해 서양 세력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며, 서양 열강의 지속적인 압박에 대한 대응 방안을 모색했다.

하지만 1882년 조선이 청나라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맺으며 연행사의 역할은 크게 줄어들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통해 조선과 청은 이전의 육로무역을 벗어나 개항장을 통한 무역이 가능해졌고, 이전과 다른 근대적 통상사무를 처리할 외교 관원이 필요했다. 청은 한양을 비롯해 개항장인 인천, 부산, 원산에 외교 관원을 상주시켰다. 조선은 교섭 당시 연행사를 폐지하고, 북경에 상주하는 사절을 파견하겠다고 청에 요청했으나, 청의 거부로 천진에 공관을 설치해 관원을 파견하였다. 이후 조청 관계에 있어 근대적 통상사무의 중요성이 점점 커졌고, 주요 외교 사안도 파견된 관원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처리됐다. 연행사는 정해진 규정에 따라 청에 파견되었지만, 그 중요성이 크게 줄어들었으며 의례적인 임무만을 수행하였다.

형식적으로 파견되던 연행사는 청일전쟁으로 최후를 맞았다. 조선이 청에 보낸 마지막 연행사는 1894년 서태후의 육순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진하사(進賀使)였다. 이들은 청일전쟁 직전 조공-책봉 관계 속 파견되어 청일전쟁 이후 그 관계가 와해된 뒤 귀국했다. 한중관계의 근대적 전환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행단으로 그 이전의 연행과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다. 1894년 초 사행단의 파견이 결정되었으나, 동학농민운동이 격해지고 6월 초 청과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면서 사행단은 7월 12일에서야 한양을 떠나 청나라로 향했다. 7월 31일 사행단은 의주에 도착했고, 다음 날 청과 일본은 선전포고를 했다. 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 사행단은 8월 19일 압록강을 건넜다. 이후 심양을 거쳐 산해관에 도착했다. 사행단은 산해관에서 이전의 정해진 연행노선을 따르지 않고, 기차를 타고 천진에 있는 조선공관으로 향했다. 조선공관은 1882년 조선과 청이 체결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 의해 설치된 공관으로 근대적 통상사무를 처리하는 곳이었다. 천진에 도착하여 공관의 수장인 주진독리(駐津督理) 이면상과 종사관 서상교, 고종의 밀사로 온 민상호를 만나 상황을 파악하고 북경으로 향했다.

사행단은 9월 11일 북경에 도착했다. 북경에서는 청이 제공하는 회동관에서 머무르는데 관소 상태가 좋지 않아 전례 없이 3일 후 입주하였다. 진하사의 공식 일정은 11월에 끝났다. 하사품도 받았고 귀국하여야 했으나, 전쟁으로 귀국길이 막혀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광서제의 윤허를 받아 삼절연공사(三節年貢使)의 임무를 수행하며 회동관에 머물렀다. 하지만 청과 일본의 강화협상이 진행되고, 삼절연공사의 임무 또한 마무리되자 청은 사행단의 귀국을 종용했다. 1895년 3월 14일 사행단 일원 100여 명이 천진에서 배를 타고 우선 귀국했으며, 나머지 일행은 회동관에서 나와 정양문 밖 객잔에서 지냈다. 청이 제공하는 회동관에서 나왔다는 것은 청과 조선의 조공-책봉 관계 사실상 끊어진 것이었다. 4월 17일 청과 일본이 〈시모노세키조약〉 체결했으며, 제1조는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한다”였다. 조약을 통해 조공-책봉 관계가 완전히 와해된 것이다. 이후 남은 일행은 청나라 군함 진해호(鎭海號)를 타고 5월 25일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그들은 더 이상 연행사가 아니었으며, 연행사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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