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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학파[嶺南學派]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학문을 계승하다

미상

영남학파 대표 이미지

퇴계 이황 초상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개요

영남학파(嶺南學派)는 16세기 중엽에 경상도에 근거를 둔 성리학자들의 학문적 유파를 통칭한다. 경상도 지역은 예로부터 유능한 학자가 많았는데 조선 전기에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을 필두로 하는 영학파(嶺學派)가 대세를 이루었다. 이후 그의 학통은 두 명의 유능한 학자에게 연결되었는데, 경상우도의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경상좌도의 남명(南冥) 조식(曺植)이었다. 이황의 문인들이 퇴계학파를, 조식의 문인들이 남명학파를 이루었고, 이들이 곧 영남학파였다. 이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상호 발전하였지만 남명학파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몰락하며, 대부분 퇴계학파로 흡수되었다. 따라서 이후 영남학파는 퇴계학파로 대표되며, 정치적으로는 주로 남인의 입장을 견지하고 조선후기의 정치, 사상계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2 경상도의 영학파,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분화되다

15세기 후반 영학파의 학맥은 고려 말의 성리학자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정몽주의 학통은 길재(吉再)와 김숙자(金叔滋)를 거쳐, 김종직에게 계승되었다. 김종직은 영학파의 영수로서 경상도를 기반으로 성장한 많은 제자를 두었다. 대표적으로 현풍(玄風)의 김굉필(金宏弼), 함양(咸陽)의 정여창(鄭汝昌), 경주(慶州)의 손중돈(孫仲墩), 안동(安東)의 이종준(李宗準), 청도(淸道)의 김일손(金馹孫) 등이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들은 각 지역의 대표적인 학자이면서 문하에 많은 제자를 두었다. 이 가운데 김굉필은 조광조(趙光祖)와 김안국(金安國)에게 학문을 전승하였다. 한편, 손중돈의 학문은 이언적 (李彦迪)에게 전달되었다.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 그리고 후대의 퇴계 이황은 우리나라 대표 유학자라는 뜻의 ‘동국오현(東國五賢)’으로 칭호로 거론되기도 했다. 다만 이들 영학파의 학문은 연산군 이후 수차례 발생한 사화(士禍)로 인해 중앙 정계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학파의 학통은 중앙 정계가 아닌 경상도 지역에서 발전적으로 계승되었다. 정여창과 김일손의 학문적 전통 아래 경상우도에서는 남명 조식이 등장하였고, 이종준, 이현보(李賢輔) 등의 영향 아래에서 경상좌도에서는 퇴계 이황이 굴기하였다. 이에 따라 조식의 문하를 남명학파, 이황의 문하를 퇴계학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외에 경상도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도 따르는 인물이 많아 여헌학파(旅軒學派)를 형성하였다.

이처럼 영남학파는 지역적으로 경상도를 거점으로 하면서도 서로 다른 학설을 가지고 논쟁을 했고 이들을 따르는 무리들도 분열되었기 때문에 영남학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다양한 학파의 분열과 통합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남명학파의 문인들과 ‘경의(敬義)’의 숭상

경상우도의 남명학파는 오건(吳健), 김우옹(金宇顒), 최영경(崔永慶), 곽재우(郭再祐), 정탁(鄭琢) 등이었다. 이들 가운데 남명 조식의 학통을 대표하여 유력한 제자로 불리는 학자는 수우당(守愚堂) 최영경, 각재(覺齋) 하항(河沆), 내암(萊庵) 정인홍(鄭仁弘),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있었다. 한강 정구는 퇴계 이황의 제자이기도 하여서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의 교류를 증명하는 학자라고 할 수 있다. 남명 조식의 문하 가운데에는 내암 정인홍의 문인들이 가장 성장하였다. 정인홍은 동인과 서인의 분당이 발생한 직후에는 동인의 편에 섰으나, 동인이 분리되어 북인과 남인으로 갈리자, 북인을 대표하는 학자로 성장하였다. 정인홍을 따라 남명학파의 다수가 북인 계열의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북인은 광해군 정권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광해군 재위기까지는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남명학파는 광해군대까지 퇴계학파와 더불어 영남의 2대 학파로서의 위상을 과시하였다. 하지만 1623년 인조반정 이후 급격히 쇠락하게 되었다. 이후 남명학파는 생존을 위해 역적으로 낙인찍힌 정인홍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하였다. 한강 정구의 문인들은 자신들의 학문적 유파를 퇴계학파로 강조하였다.

다만 정인홍의 문인인 동계(桐溪) 정온(鄭蘊)과 남명의 제자인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는 문도들을 이끌고 남명학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세대를 거듭하면서 세력이 축소되기 시작하여 대부분 퇴계학파에 흡수되었다. 특히 동계 정온의 학통을 이어받은 정희량(鄭希良)과 조성좌(曺聖佐)가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가담했던 정황이 드러나 철저하게 탄압을 받으면서 그 명맥이 끊기게 되었다.

남명학파의 사상적 특징을 보면, 조식의 학풍을 이어서 ‘경의(敬義)’에 가장 힘을 썼다. 경의란 마음을 곧게 한다는 의미의 경과 마음 바깥의 일을 반듯하게 처리하는 의를 합친 말이다. 즉, 마음 안과 밖을 올곧게 둔다는 의미이다. 이에 따라 공리공담을 배척하고 실천적 학문을 행하였으며, 기절과 의리를 숭상하는 학풍을 추종하였다. 이에 따라 곽재우, 정인홍과 같이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장으로 몸소 나서는 학자도 많았다.

4 퇴계학파의 문인들과 ‘주리설(主理說)’의 발전

경상좌도는 퇴계 이황을 종주로 하였다. 이황은 정몽주에서 이언적 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도통(道統)을 정립하고, 조광조와 이언적 의 학통을 자신에게 이어지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에 따라 수많은 학자들이 이황의 문하에 출입하였고, 그의 학설은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퇴계를 따랐던 대표적인 학자는 기대승(奇大升), 홍가신(洪可臣), 정사성(鄭士誠), 조호맹(曺好孟) 등이 있었으나, 가장 핵심적인 제자는 월천(月川) 조목(趙穆),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정구였다.

조목의 학맥은 예안, 봉화, 영주로 퍼져 갔고, 유성룡의 학맥은 안동, 상주, 예천, 용궁, 의성으로, 김성일의 학맥은 임하, 영해, 영양으로 퍼져갔다. 정구의 학맥은 두 계통이 있는데 여헌 장현광의 학통은 성주와 인동, 경주로,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학통은 서울로 전파되어 근기학파를 이루었다. 이처럼 퇴계의 학맥은 제자들에 의해 경상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조목은 동문수학한 유성룡보다 남명의 제자인 정인홍과 친분이 두터웠다. 따라서 광해군 정권 시기에 그 문하에서 관직에 진출한 인물이 많았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북인 정권이 몰락하면서 조목의 문하 역시 분열되어 유성룡과 김성일의 학파에 흡수되었다.

유성룡은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그를 중심으로 하는 학맥은 관료 지향적이면서 국가의 사회경제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유성룡의 학맥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에게 전수되었다. 정경세는 경전과 예학에서 깊은 이해를 드러냈다.

김성일은 임진왜란 중에 사망하여 당대에 학맥을 유지할 수 없었으나, 이후 장흥효(張興孝)와 갈암(渴巖) 이현일(李玄逸), 이휘일(李徽逸) 형제가 그 학맥을 전수하였다. 특히, 이현일은 숙종대 퇴계학파의 영수가 되면서 김성일에서 이현일로 이어지는 학통이 영남학파의 존장(尊長)이 될 수 있었다. 이 계통은 정치보다는 학문에 힘을 써서 퇴계학파의 학문적 성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정구는 조목이나 유성룡, 김성일에 비해 오랜 기간 생존하였던 덕분에 많은 제자를 거느릴 수 있었다. 정구는 광해군 시기에 같은 남명의 제자였던 정인홍과 절교하면서 남명학파에서 퇴계학파로 학통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의 학통은 영남지방에서는 장현광이 이어갔고, 중앙에서는 허목이 계승하였다.

이후 영남학파는 경상도 지역에 세거하였던 ‘영남(嶺南)’과 중앙 정계에서 관직생활을 하였던 ‘경남(京南)’으로 분화되어 갔다. 특히, 허목의 계통을 ‘경남(京南)’이라 하였는데, 이들은 중앙 정계에서 남인 계열로 활동하였다. 이 계통은 여러 차례의 환국에서 정치적 부침을 겪으며 쇠락하기도 하였지만, 성호(星湖) 이익(李瀷)과 채제공(蔡濟恭) 등이 중앙에서 남인의 정치적 영향력을 지속하고 있었다. 이익의 제자는 정약용(丁若鏞), 안정복(安鼎福), 이가환(李家煥) 등이 있었다.

한편, ‘영남’은 김성일의 학통을 이은 이현일의 학통이 종장을 선언하며 영남지역의 영수로 자리하였다. ‘영남’은 18세기 이후 주로 지역 사회에서 선현들의 유지를 받들어 학문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끊임없이 중앙의 ‘경남’과 제휴하면서 중앙정계에도 일부 진출할 수 있었다.

퇴계학파는 퇴계의 철학 사상 가운데 ‘이기호발설(異氣互發說)’과 ‘사칠이기분대설(四七異氣分對說)’ 등의 핵심 사상을 옹호하면서 주리설(主理說)을 발전시켜갔다. 이황의 철학은 이에는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기에는 상대적 가치를 부여하여 서로 차등을 둔 것이 핵심이다. 이러한 퇴계의 학문을 전승하고 고수하면서 발전시켜갔던 것이 퇴계학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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