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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군영[五軍營]

임란의 경험에서 나온 조선 후기의 수도 방어 체제

1593년(선조 26) ~ 1884년(고종 21)

오군영 대표 이미지

관(關, 훈련도감이 이조에 보낸 관문)

e뮤지엄(국립민속박물관)

1 개요

오군영은 임진왜란 이후 도성과 수도 외곽의 방어를 위해 새로 마련된 다섯 개의 군영을 말한다. 수도를 방어하는 중앙의 군영으로 훈련도감(訓鍊都監),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 등 삼군영이 있으며, 수도의 외곽 방어는 총융청(摠戎廳), 수어청(守禦廳)이 담당하였다. 그 가운데 훈련도감이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에 설치되어 가장 이른 시기에 마련되었으며, 어영청이 1623년(인조 1), 총융청이 1624년(인조 2), 수어청이 1626년(인조 4)에 차례로 설치되었다. 이후 1682년(숙종 8) 금위영이 설치됨으로써 조선 전기 오위(五衛) 체제의 군사제도는 오군영체제로 전환되었다.

2 오군영의 시작, 훈련도감의 창설

1592년(선조 25) 20만에 달하는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해오자, 조선 전기 중앙의 5위와 지방의 진관(鎭管) 및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새로운 군사조직의 필요성을 제기하였으며, 전란 극복을 위해 군사체제의 재정비를 서둘렀다.

새로운 군사조직의 편성에는 명(明)의 병법이 큰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시 명나라 군사 4만 명이 조선을 원조하러 왔을 때 명의 장군 낙상지(駱尙志)는 유성룡(柳成龍)에게 군사 훈련의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이에 유성룡은 선조의 허락을 받아 낙상지에게 금군의 훈련을 하도록 했으며, 곤방(棍棒)·등패(籐牌)·낭선(狼筅)·장창(長鎗)·당파(鐺鈀)·쌍수도(雙手刀) 등의 기예를 습득시켰다.

이듬해 1593년(선조 26) 8월에는 훈련도감의 설치가 구체화되었다. 선조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활과 포(砲)를 비롯해 무예(武藝)를 훈련시키는 방법을 의논하도록 하였다. 훈련도감의 훈련 방식은 척계광(戚繼光)의 병서인 『기효신서(紀效新書)』에 나오는 포법(砲法), 사법(射法), 감법(砍法)의 삼수기법(三手技法)을 토대로 하였다. 평양성 전투에서 명나라 화기(火器)에 대한 효과를 인식한 조선은 조총의 제조 및 운용에 힘썼으며, 이에 적합한 병법을 찾았던 것이다.

훈련도감은 처음에는 정식 군영이 아닌 임시 아문으로 설치되었다. 포를 주로 사용하는 포수(砲手)를 가장 먼저 두었고, 이후 의용대를 살수(殺手),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사수(射手)로 편입시켜 1594년(선조 27) 이후에는 삼수병(三手兵) 체제가 마련될 수 있었다. 훈련도감의 조직은 의정(議政)이 겸임하는 도제조(都提調), 병조판서와 호조판서가 겸하는 제조를 중심으로 대장, 중군 각 1명, 별장 2명, 천총 2명, 국별장(局別將) 3명, 파총 6명, 종사관 6명, 초관 34명으로 지휘부를 구성하였다.

이러한 훈련도감의 군병은 고용된 급료병(給料兵)으로, 국왕의 호위 뿐 아니라 도성의 수비 및 순라를 담당하여 5군영의 중심이 되었다.

3 수도 방어의 핵심, 삼군영의 형성

인조대에 이르러서는 어영청이 설치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즉위한 인조는 후금(後金)의 압박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따라서 1624년(인조 2) 이귀(李貴)를 어영사(御營使)로 임명하여 국왕을 호위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어영군(御營軍)의 시초가 되었다. 어영군은 이괄(李适)의 난 이후 훈련도감과 함께 수도 방위는 물론 국왕 호위를 전담하는 중앙군으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어영청은 1652년(효종 3) 이완(李浣)을 어영대장으로 삼고 5부(部), 별삼사(別三司), 별중초(別中哨) 등으로 편제되었으나, 숙종 때 금위영과 함께 5부(部) 25사(司) 125초(哨)로 정비되었다.

금위영은 1682년(숙종 8) 3월 설치되었다. 훈련도감 대장을 겸하고 있던 병조판서 김석주(金錫冑)는 군제변통절목(軍制變通節目)을 올려 훈련별대(別隊)와 정초군(精抄軍)을 합하여 금위영이라는 하나의 독립된 군영을 마련하였다. 금위영은 초기에는 병조판서가 금위대장을 겸하였으나 1754년(영조 30)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의 건의로 겸임 제도를 폐지하였다. 이후 금위영은 훈련도감, 어영청과 함께 수도 방어의 핵심 군영이 되었다.

이러한 어영청과 금위영은 모두 향군으로 조직되었으며, 조선 전기 부병제 하의 번상군(番上軍)이 아닌 국가에서 급료를 받으며 장기간 복무하는 장번군(長番軍)이었다. 이들은 각지에서 서울로 올라와 상주하며 도성을 시위하였다.

삼군영의 관사는 모두 서울에 위치했는데, 훈련도감의 경우 본영인 북영(北營)을 북부 광화방 원동(苑洞)에 두었다. 그 예하의 분영으로 남영(南營)은 돈화문 밖에, 북일영(北一營)은 경희궁 무덕문(武德門) 밖에, 서영(西營)은 경희궁 숭의문 밖에, 신영(新營)은 경희궁 흥화문 밖에 설치하였다. 이 밖에 광지영(廣智營)은 응봉 아래에, 하도감(下都監)은 훈련원 동쪽 남부 명철방에 두었다.

어영청은 동부 연화방에 본영을 두었다. 분영인 남소영(南小營)을 남창, 화약고와 함께 남부 명철방 남소동(南小洞)에 설치했으며. 동영(東營)을 창경궁 선인문(宣仁門)과 경희궁 개양문(開陽門) 아래에 두었다. 또한 집춘영(集春營)은 창경궁 집춘문(集春門) 밖에, 북이영(北二營)은 경희궁 무덕문(武德門) 밖에 두었다.

금위영은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밖 중부 정선방에 본영을 두었는데 ‘신영(新營)’이라고도 하였다. 분영으로 남별영(南別營)을 남부 낙선방 묵사동(墨寺洞)에 설치했으며, 남창(南倉), 하남창(下南倉) 등도 주변에 마련하였다. 서영은 창덕궁 경추문(景秋門) 건너편에, 남영은 경희궁 개양문 위에 두었다.

4 삼군영의 도성방어 임무

1746년(영조 22) 영조는 도성 방어를 위해 수성절목(守城節目)을 반포하여 서울 5부의 민호를 각각 삼군영에 분속시켰다. 이때 5부의 각 계(契)는 깃발을 만들었는데 훈련도감은 황색, 금위영은 청색, 어영청은 백색이며, 여기에 각 부의 명칭과 삼군문의 소속을 표시하였다. 삼군영의 수성 분계를 보면, 훈련도감은 북부를 중심으로 서부중부 지역 일부를 방어했으며, 금위영은 남부를 중심으로 서부중부 일부를 방어하였다. 어영청은 동부를 중심으로 남부와 중부서부 일부 지역을 방어했다.

수도 방어를 위해 궁궐을 포함하여 도성 안팎의 순라도 철저히 행하였다. 군영별로 보면, 훈련도감은 서쪽으로는 돈의문에서 종각, 남쪽으로는 숭례문에서 마포, 서강 지역을, 동쪽으로는 흥인문 밖에서 종암에 이르는 곳을 순찰하였다. 금위영은 도성 안은 동대문과 서대문을 각각 경계로 남으로는 남산 주변에서 북으로는 삼청동까지 순찰했다. 도성 밖은 서빙고, 마포를 거쳐 망원정에 이르는 경강지역 주변을 순찰하였다. 어영청은 도성 안의 경우 오간수문을 기준으로 청계천 주변과 서대문에서 종각까지 순찰하였다. 도성 밖의 경우는 서대문 밖 아현에서 모화관(慕華館), 홍제원까지, 동대문 밖에서 왕십리, 뚝섬, 제기동, 종암동까지, 마포, 용산 등지를 순찰하였다.

이처럼 삼군영이 한성부 전체 지역을 순찰하는 데에는 총 246명의 군사가 동원되었다. 한 군영이 3일에 한 번씩 8패로 나누어 총 24명의 패장이 군사 222명을 인솔하며 도성 안팎의 야간 순라를 행하였다.

삼군영은 도성이나 궁장 등이 무너진 곳이 없는지도 매일 살폈으며, 무너진 곳은 담당 군영에서 책임지고 수축하였다. 이때 삼군영의 담당 구역은 숙정문(肅靖門) 동편 무사석(舞砂石)에서 돈의문 북편까지 훈련도감에서 담당하였고, 돈의문에서 광희문(光熙門) 남촌(南村)까지 금위영에서 담당하였다. 또한 광희문에서 숙정문까지는 어영청에서 담당하였다.

5 총융청과 수어청, 수도 외곽을 방어하다

총융청과 수어청은 북한산성·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수도 외곽지역을 방어하였다. 먼저, 총융청은 인조대 이괄의 난을 거치면서 수도 외곽의 방어가 필요하게 되어 1624년(인조 2) 설치되었다. 총융청을 처음 설치할 때에는 사직동(社稷洞)의 북이영(北二營)에 군영을 개설하였다. 그러다가 1669년(현종 10)에 삼청동(三淸洞)으로, 1747년(영조 23)에는 북한산성의 관리를 위해 연융대(鍊戎臺)로 이건하여 북한산성 중심의 경기 북부 수도의 외곽 방어를 담당하였다.

수어청은 1626년(인조 4) 남한산성을 축성하고 이 일대의 방어를 위해 설치되었다. 군영으로의 체제는 1656년(효종 7)에 갖추어졌는데, 이때 산성 입수(入守)를 위한 속영체제(屬營體制)가 처음으로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남한산성 남북으로 침입하는 외적의 방어를 경기 주변 군사에 한정하지 않고 적의 침입로에 있는 군현의 군사까지 속영체제에 편입시켜 산성의 방어에 주력하였다.

수어청은 한성부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경청(京廳)을 설치했으며, 지휘관인 수어사(守禦使)는 한성부윤이 겸직하였다. 그러나 1795년(정조 19) 정조는 수어청의 조직을 개편하여 경청을 혁파해 남한산성으로 이전하고 광주부윤을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승격시켜 수어사를 겸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수도 외곽을 방어했던 수어청과 총융청은 정조대 이후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수어청은 사실상 명목만 유지할 뿐이었으며, 총융청은 1793년 장용외영(壯勇外營)이 설치되면서 여기에 이속되었다. 그러다가 순조대 장용영이 혁파된 후 다시 복구되었다가 1884년(고종 21)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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