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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영[壯勇營]

정조, 국왕 호위 전담부대를 만들다

1788년(정조 12)

장용영 대표 이미지

장용영 본영도형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장용영(壯勇營)은 1788년(정조 12) 정조가 자신의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기존에 설치된 장용위(壯勇衛)를 확대, 개편한 군영이다. 설치 초기에는 국왕 호위, 궁궐 숙위, 도성 수비 등의 임무를 실시하였다. 그러다가 점차 정조의 지속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병력이나 재정 규모가 크게 증가하며 오군영(五軍營)과 대등한 위치에까지 올라 정조대 최고의 군영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장용영은 정조 사후인 1802년(순조 2)에 이르러 정조의 개혁에 반대하는 심환지(沈煥之) 세력에 의해 혁파되었다.

2 장용영의 첫 출발, 장용위(壯勇衛)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정조는 정치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친위부대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직접적인 계기는 1777년(정조 1) 7월 한밤중에 존현각(尊賢閣)에 자객이 침입한 사건이었다. 정조는 호위군관 강용휘(姜龍輝)와 전흥문(田興文) 등이 가담한 역모 사건이 일어난 것보다도 역도(逆徒)들이 궁궐 담장을 넘고 존현각 지붕에까지 오르는 등 궁궐 숙위가 허술한 것에 더 큰 불만을 제기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조는 왕의 호위 군영을 설치할 명분을 얻게 되어 그해 11월 숙위소(宿衛所)를 설치하였다. 또한 홍국영(洪國榮)을 숙위소 대장으로 삼아 궁궐의 모든 숙위 업무를 통제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설치의도와 달리 숙위소가 홍국영의 사병(私兵)처럼 운영되자, 정조는 이를 혁파하였다.

숙위소 혁파 후 궁궐 내 호위가 점차 허술해지자, 정조는 1782년(정조 6) 무예출신(武藝出身) 및 무예별감(武藝別監)을 지낸 자 가운데 30인을 골라 명정전(明政殿) 남쪽 회랑에 근무하게 하였다. 그리고 1785년(정조 9) 9월에 추가로 20명을 더 선발하여 자신의 호위부대인 장용위를 창설하였다. 정조가 장용위라는 호칭을 내린 것은 오위의 한 위를 본 딴 것이다. 이러한 장용위는 장용영(壯勇營)의 시초가 되었으며, 이후 지속적인 병력 충원을 거쳐 1788년(정조 12) 장용영으로 바뀌었다. 장용영은 내영과 외영으로 나뉘는 등 크게 정비되었으며, 『대전통편(大典通編)』 훈련도감조에 실리게 되어 공식기구가 되었다.

3 정조의 친위부대, 장용영

1788년(정조 12) 설치된 장용영의 병력은 오군영과 기타 군문의 병력 감축 및 조정을 통해 충원되었기 때문에 일부 군영의 기능과 병력에 변화가 발생했다. 우선 호위청(扈衛廳)과 용호영(龍虎營)은 국왕의 호위를 담당한다는 기능 면에서 장용영과 중복되었다. 따라서 호위청은 1793년(정조 17)에 장용영으로 이속되었고, 용호영은 1791년(정조 15)에 기존의 7번(番)에서 6번으로 줄이며 감원한 100명은 장용영으로 이속하였다. 또한 훈련도감의 무예청 병력 30명, 별기군(別技軍)과 난후초(攔後哨) 병력이 감축되어 장용영으로 이속되는 등 장용영은 오군영의 일부 병력을 옮겨와 운영되었다.

이러한 장용영은 1793년(정조 17) 내영과 외영을 두면서 그 규모가 더욱 확대되었다. 장용내영은 수도인 한성부에 설치되었으며, 내영의 지휘관인 장용영병방(壯勇營兵房)은 장용사(壯勇使) 또는 장용영 대장으로 개칭되었다. 구성은 3초(哨)의 선기대(善騎隊) 외에 5사(司) 체제로 구성되었다. 5사는 전·후·좌·우중사로 전사(前司)는 수원, 후사(後司)는 지평·양근·가평 등, 좌사(左司)는 수원 인근, 우사(右司)는 고양·파주, 중사(中司)는 도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 일대를 포함하였다.

장용외영은 1793년(정조 17) 수원에 화성이 축조되고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수원부를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수원유수가 장용외사(壯勇外使)와 행궁정리부(行宮整理府)의 직을 겸하게 했으며 그 아래에 판관 1인을 두었다. 이러한 편제는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인 장헌세자(莊獻世子)의 현륭원(顯隆園)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외영은 행궁을 교대로 방비하는 입방군(入防軍) 20초와, 유사시에 동원해 성내의 군사를 돕도록 하는 인근 고을의 협수군(恊守軍) 22초로 구성되었다.

4 장용영 군병의 거주지를 마련하다

정조는 과거 효종조에 훈련도감의 분영인 하도감(下都監)을 설치하고, 훈련도감의 군사를 동촌(東村)으로 이주한 예에 따라 1787년(정조 11) 장용영의 청사를 종묘 앞인 이현(梨峴) 부근에 건립하였다. 청사의 규모는 내대청 24칸, 제조와 대장의 업무 공간인 외대청 12칸, 종사관의 업무처인 군기대청 8칸 반, 지구관청 16칸, 군기고 30칸 등 총 446칸이다. 이후 1788년(정조 12)에 북창 191칸, 1789년(정조 13)에 직방(直房) 76칸을 만들고, 1790년(정조 14)년에 야소(冶所) 99칸 등 총 812칸의 청사를 대규모로 건립하였다.

아울러 정조는 장용영 소속 군사들을 청사 주변인 동부 연화방으로 모아 거주하도록 하였다. 또한 여러 곳에 산재해 거주하는 장용영의 군병들을 통화문(通化門) 동쪽, 이현 위쪽으로 이주해 살도록 하였다. 이 같은 정조의 조치에 따라 창경궁 동쪽인 선인문(宣仁門)에서 남쪽으로 이현 동구까지의 궁성 지역에 장용영 군병의 집단 거주지가 마련되었다.

이후 1793년(정조 17) 5월에 장용영은 군병들이 거주하는 이현 주변을 ‘장용영좌계(壯勇營左契)’와 ‘장용영우계(壯勇營右契)’로 나누었다. 장용영좌계는 27통(統) 135가(家)로, 장용영우계는 26통 130가로 이루어졌는데, 모두 장용영에 소속시켜 한성부와 동부(東部)에서 관할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계의 운영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각종 절목을 제정했다. 먼저 오가통제에 따라 존위(尊位) 2원, 중임(中任) 2인, 통수(統首)를 두어 계를 관리하였다. 중임 2인은 좌우 두 계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뽑았으며, 통수는 통 안의 근면하고 유능한 자로 선발하였다. 또한 호적 파악을 명확히 하고자 각 통에 이사를 오거나 가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해당 통수가 존위에게 보고해서 바로 통안(統案)을 수정하였고, 식년마다 좌계와 우계의 거주 장적(帳籍)을 모아 장용영의 제조를 통해 한성부로 전달되게 했다. 이 밖에 창경궁 주변이기 때문에 질병과 오물에 대한 단속, 금령 위반, 이웃 간의 싸움, 잡기, 술주정에 대한 단속, 방역 부과 등을 만들어 장용영계를 운영하였는데, 이 또한 한성부에서 감독하지 않고 장용영에서 담당했다.

장용영계의 운영은 1796년(정조 20)에 더욱 구체화되었다. 1793년(정조 17)에는 가(家)-통(統)-계(契)로 계가 구성되었던 것이 1796년(정조 20)에는 5가(家)를 1통으로, 5통을 1동(洞)으로 만들어 동에 동장(洞長)을 두었다. 전체 통수도 1793년(정조 17)에는 장용영좌계 27통, 장용영우계 26통이었던 것이 좌우계 각각 26통으로 1통이 감소되었다. 통 안에 거주하는 자는 장용영 소속 및 무예청 차비(差備) 소속의 친족이 아니더라도 들어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구분하여 통 안의 장용영 소속은 원호(元戶)라고 불렀으며, 그 외의 사람은 허접(許接)이라고 칭하였다.

이처럼 정조가 장용영계를 설치한 것은 외형적으로는 군병으로 하여금 궁성을 수호하고 주변의 오물을 청소시켜 궁궐 주변을 깨끗이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장용영 장졸들이 오만해져 민폐를 끼칠 경우 정조 자신이 추진해야 할 군제 개혁에 차질이 빚어지기 때문에 이들을 집단 거주시켜 동계(洞契) 조직을 통해 스스로 통제, 관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5 순조대 장용영의 혁파

왕권 강화를 위한 정조의 친위군영인 장용영은 1800년 정조의 사망과 함께 혁파되는 수순을 밟았다. 1801년(순조 1) 공노비가 혁파되자, 발생하는 재정 결손분을 장용영에서 대신 지급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그리고 1년 뒤 장용영의 혁파는 영의정 심환지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선왕인 정조가 ‘지금 좌우(左右)에서 나를 모시고 있는 내시(內侍)들은 모두 일시적인 방편에서 나온 것이니 후세에는 이것을 법으로 삼을 수 없다.’고 했음을 강조하며 장용영 혁파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심환지의 주장에 의정들이 찬성하자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는 장용영의 혁파를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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