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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

어진이들이 모인 곳, 학문의 중심에 우뚝 서다

1420년(세종 2) ~ 1456년(세조 2)

집현전 대표 이미지

경복궁 수정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집현전은 조선 세종 2년에 고제(古制)를 연구하고 경전과 역사를 강론하고 군주의 자문에 대비하기 위해 설치된 기관으로서, 세조 2년까지 존속되었다.

2 집현전의 성립

원래 집현전은 중국에서 한(漢)대 이후 존재했던 기관이나 본격적으로 제도가 정비된 것은 당(唐) 현종대로서, 학사를 두고 책의 보관이나 편찬, 왕의 교서 등을 짓는 일 등을 담당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기능을 하는 유사한 기관이 삼국 시기부터 존재하였으며, 집현전이라는 명칭의 기관이 설립된 것은 12세기 고려 인종대가 처음이었다. 문신들을 뽑아 왕을 시종하게 한 기관 중 연영전(延英殿)을 고쳐 집현전으로 설치하였다. 이후 직제에 몇 차례 변화가 있었으나 고려 말에는 유명무실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 건국 직후에는 고려 시기 관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였기 때문에 집현전 역시 존속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기관 자체는 여전히 제 기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399년(정종 1) 조박(趙璞)이 집현전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서적을 수장하고 문신들이 모여 경적을 강론하여 자문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고위 관직자로 제조관을 삼고 문신 5품 이하 관원을 확충하기도 하였으나, 이듬해 집현전을 보문각(寶文閣)으로 개칭하였다.

인재 양성의 중심 기관과 자문을 담당할 기구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태종대에도 이어져서 여러 차례 집현전을 설치하자는 건의가 올라왔으며, 이는 세종 즉위 초반에도 여전하였다. 세종대 집현전을 본격적으로 설치하고 기구를 확충한 것은, 이렇듯 조선 초 이래 문신을 양성하고 자문을 대비할 기구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가능하였다.

1420년(세종 2년) 본격적으로 집현전의 관제를 정비하며, 궁궐 안에 기관을 설치하였다. 지금의 경복궁(景福宮) 수정전(修政殿) 자리가 바로 세종대 집현전이 있었던 장소이다. 설치 당시의 관제는 다음과 같았다.

영집현전사(領集賢殿事, 정1품)·대제학(大提學, 정2품)·제학(提學, 종2품) 각 2인으로서 이들은 모두 겸직이었다. 그 이하로 부제학(副提學, 정3품)·직제학(直提學, 종3품)·직전(直殿, 정4품)·응교(應敎, 종4품)·교리(校理, 정5품)·부교리(副校理, 종5품)·수찬(修撰, 정6품)·부수찬(副修撰, 종6품)·박사(博士, 정7품)·저작(著作, 정8품)·정자(正字, 정9품)가 있었는데, 이들이 녹관(祿官)이었으며 이들은 경연관을 겸임하였다.

고려 시기의 유사 기관인 수문전(修文殿)이나 집현전, 보문각도 대제학과 제학은 2품 이상으로 임명하고 직제학, 직전 직각 등의 관원도 3, 4품으로 임명하였다는 점에서 관품만 놓고 보면 조선에 들어서 특별히 높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들 관청이나 건물이나 직무도 없이 문신에게 관직만 주었을 뿐이어서 실질적인 기능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고려 말 이래 집현전이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자주 나온 이유였다. 그러나 세종대에 와서 유사한 이들 기관을 모두 집현전으로 통폐합하고 관사를 궁궐 안에 두며, 나이가 젊은 사람을 중심으로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전담하게 함으로써 기관에 실질적인 위상과 역할을 부여한 것이다. 또한 같은 품일 경우에는 반열에서 제일 앞에 두어 그 권위를 높여 주었으며, 사헌부의 감찰을 받지 않게 하는 등, 집현전의 위상을 확실히 높이고자 하였다.

설치 초기 학사의 숫자는 10인이었으나, 차츰 늘어서 1435년(세종 17)에는 최고 32인까지 이르렀으나, 이듬해인 1436년에 20인으로 축소하여 고정되었다. 학사는 문사(文士) 중에서도 재능과 행실이 좋은 나이 어린 사람을 임명하였는데, 문과의 급제자 중 상위권이 많았다. 이외에도 서리(書吏)를 별도로 배속해 말단 행정 실무를 맡게 하였다.

집현전은 인재를 양성하고 문풍을 진작시키는 데 그 설치 목적이 있었으므로, 많은 도서를 구입하여 집현전에 보관하였다. 또한 휴가를 주어 공부할 수 있게 하였는데, 이른바 사가독서(賜假讀書) 제도의 원형이었다. 1426년(세종 8)에 첫 사례가 보이며, 세종대 약 세 차례의 사례가 확인된다. 처음 사가독서는 본인들의 집에서 실시하였으나 나중에는 산중의 절에 모여서 강론하게 하였다. 인재 양성이라는 목적을 위해 집현전 학사에 한번 임명하면 되도록 다른 관직으로 옮기지 않고 그 안에서 차례로 승진하여 직제학이나 부제학까지 이르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세종조 후반이 되면 다른 관직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3 집현전 약사(略史)

집현전이 존속된 기간은 37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역할과 성격이 변화하여 시기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학자들 간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이 크게 3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기는 1420년(세종 2)∼1427년(세종 9)으로서, 집현전의 역할과 기능이 성립되던 시기이다. 집현전은 원래 설치 당시의 직무였던 국왕 경연 이외에 왕세자의 서연, 사대문서(事大文書) 작성과 사신을 접대하는 외교 업무도 맡았다. 또한 사관(史官)의 역할, 시관(試官)으로 과거 주관, 지제교(知製敎)로서 왕명을 제술하는 등 다양한 분야로 기능이 확대되었다.

제2기는 1428년(세종 10)∼1436년(세종 18)으로서, 집현전의 인원수가 증대되었고 종친의 교육을 담당하는 종학교관으로 왕실 교육까지 그 업무가 확장되었다. 또한 당대의 의례, 각종 제도 정비 등과 관련하여 고제(古制)를 연구하고 편찬 사업을 진행하였던 시기이다.

제3기는 1437년(세종 19)∼1455년(세조 2)로서 집현전의 정원이 20명으로 축소 조정되었는데, 세종의 건강 때문에 경연이 폐지되면서 서연을 전담하게 되었다. 또한 세손 교육이 추가되고, 1442년(세종 24) 세종의 신병으로 인해 세자의 정무 처결 기관인 첨사원(詹事院)이 설치되면서 집현전 학사들은 종래 맡아왔던 서연직(書筵職)과 함께 첨사원직까지도 거의 전담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세자의 정무를 협찬하고 언론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집현전이 점차 언관화되며 정치성을 띠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다수의 집현전 관원과 대간이 교체 제수되었는데, 이를 통해 집현전 활동의 중심이 학문, 연구 분야에서 정치, 언론 분야로 변천되었다.

이러한 성격 변화는 집현전 출신들이 세조대 정치 비판 세력으로서 집결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며, 결국 1456년(세조 2) 6월에 집현전 학사 일부와 그 출신자들이 주동이 되어 도모한 사육신 사건으로 집현전이 혁파되었다. 그러나 성종대에 비슷한 성격의 기관인 홍문관(弘文館)이 설립되며 그 기능은 일정하게 계승되었다.

4 집현전의 역사적 의의

집현전은 짧은 시간 존속하였으나,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세종대 집현전은 국가적으로 추진한 각종 도서를 편찬하고 고제를 연구한 중심기관이었다. 역사서로는 『치평요람(治平要覽)』,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정관정요주(貞觀政要註)』, 『역대병요(歷代兵要)』,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등을 집현전에서 편찬하였다.

국가의 의례 정비와 공법(貢法) 등의 실시 과정에서 집현전은 고제를 참고하여 자문을 하였으며, 유교 윤리서로 『효행록(孝行錄)』과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또한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하여 『운회언역(韻會諺譯)』,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을 편찬하였으며, 훈민정음을 활용하여 『용비어천가주해(龍飛御天歌註解)』와 『사서언해(四書諺解)』 등의 성과를 내었다.

그러나 고제를 바탕으로 한 자문은 사실상 국왕의 요청과 의도에 따라 이루어졌고, 이들 외에도 고위 관료들이 함께 참여하여 논의하였기 때문에 실제 이들의 의견이 중요하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세종대의 이러한 문화적 성과와 한계를 넘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세종대 집현전 학사들 대부분이 성종대까지 조선의 각종 정책을 수립하고, 학문과 정치를 이끌어간 고위 문인관료가 되었다는 점이다. 성종대까지 이루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 조선 전기의 주요한 제도적 정립과 문화적 업적을 이룩한 주체도 역시 대부분 집현전 출신들과 그들의 영향을 받은 후속 세대였다는 점에서, 집현전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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