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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관[春秋館]

시정(時政)을 기록하고 역사를 편찬하다

1401년(태종 1)

춘추관 대표 이미지

성종대왕실록

e뮤지엄(국립고궁박물관)

1 개요

춘추관은 국가의 당대 시정을 기록하고 역사를 편찬하는 역할을 맡은 관서이다. 춘추관에 속한 관원은 모두 겸직(兼職)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국가 사무를 빠짐없이 기록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춘추관 관원은 모두 문과 급제자로 임명하여 유능한 인재가 당대 역사를 정리할 수 있게 하였다. 춘추관 관원 가운데 기사관(記事官)은 예문관(藝文館)의 참하관(參下官)으로 임명하였다. 참하관은 정7품에서 종9품의 하급 관료이지만 예문관 소속 관원은 청요직에 해당하였다. 젊고 유능한 인재가 항상 국왕의 곁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업무를 담당하게 한 것이다. 춘추관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라는 방대한 사료를 남길 수 있는 원천이 되었다.

2 사관(史館)에서 연원한 춘추관, 독립관서로 설립되다

춘추관은 당대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안을 담당했기 때문에, 사관(史館)이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사관은 고려시대부터 존재하였다. 춘추관의 명칭이 등장한 것은 1308년(충렬왕 34)이었다. 당시에 사관을 문한서(文翰署)와 병합하면서 예문춘추관이라 불렀다. 1325년(충숙왕 12)에는 예문관과 춘추관을 분리하여, 춘추관이 처음으로 독립된 관서로 성립되었다. 1356년(공민왕 5)에 춘추관을 개칭해 사관이라 고쳤다가 1362년(공민왕 11) 다시 춘추관으로 복구되는 조치가 이어졌다. 이는 공민왕 초년의 이른바 ‘반원자주개혁(反元自主改革)’의 일환으로 행해진 조치였다. 공민왕은 원의 영향으로 격하되었던 관서의 위상을 도로 올려두면서 자주개혁을 펼쳤다. 1389년(공양왕 1)에는 예문관과 춘추관을 다시 통합하여 예문춘추관이라 하였고 이 제도가 그대로 조선왕조에 이어졌다.

조선 태조대 예문춘추관은 “교명(敎命)의 제작과 국사(國史)의 논의를 담당”하는 기구였다. 예문관과 춘추관의 기능을 모두 지닌 것이다. 국왕의 명령을 글로 쓰는 일은 예문관의 업무였고, 국가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무는 춘추관의 업무였다. 1401년(태종 1)에는 사무가 달랐던 예문관과 춘추관을 분리시키고 춘추관을 독립시켜 “시정(時政)의 기록을 담당”하는 관서로 설립하였다. 이때 분리된 춘추관은 조선시대 내내 독립된 관서로서 시정의 기록을 전담하는 부서로 존재할 수 있었다.

3 춘추관의 업무

『경국대전』에 규정된 춘추관의 법제적인 업무는 시정의 기록이지만 실제 업무를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업무로 “시정을 기록하는 일”이다. 춘추관의 관원은 모두 겸임이었다. 춘추관의 당상관(堂上官)부터 당하관(堂下官)까지 모든 관료가 여러 관서에 근무하면서 당대의 국가 사무를 기록하는 일을 겸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국왕의 바로 옆에서 국가의 사무를 기록하는 업무는 춘추관에 소속된 참하관(參下官)인 예문관의 봉교(奉敎) 2명, 대교(待敎) 2명, 검열(檢閱) 4명을 합친 8명이 담당하였다. 춘추관에서 가장 하급관료인 이들 8명은 전임사관(專任史官)으로서 매일 국정에 나아가 국왕과 신료들의 언행을 기록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예문관의 겸임관원이지만 예문관의 사무를 따로 하지 않고 춘추관의 사무라 할 수 있는 시정의 기록을 전담했기 때문에 다른 겸임사관과 구분해 전임사관이라 했던 것이다.

이들은 매일매일 기록을 남겼는데 이를 ‘사초(史草)’라고 불렀다. 이들이 작성한 사초는 항상 2부를 작성하였다. 사초는 입시사초와 가장사초로 분류하는데 입시사초는 기사관이 정사가 이루어지는 장소에 입시하여 기록한 것으로, 초서로 작성하여 입시 후 춘추관에 납입되어 훗날 시정기 작성에 참고가 된다. 한편, 가장사초는 사관이 입시 후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시정에 관한 일, 인물의 포폄, 사론 등을 기록하여 사적으로 보관하다가 추후 실록 편찬시에 실록청에 제출한다. 국왕이 사망하면 『실록(實錄)』을 편찬하는데, 그 사무를 도맡기도 하였다. 춘추관에서는 국왕 사망 이후 실록청을 세우고, 그간의 ‘시정의 기록’을 모두 모아서 이 자료를 바탕으로 『실록』을 편찬하였다. 실록의 편찬에는 춘추관 관원 모두가 참여하였다.

둘째, 이들은 ‘시정의 기록’을 넘어서 역사를 편찬하는 사무도 담당하였다. 오늘날 ‘역사가’의 역할과 가까운 업무가 이것이다. 춘추관 관원들은 전대 왕조의 역사인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는 데 투입되었다. 태종대에는 영춘추관사인 하륜(河崙)과 지춘추관사인 한상경(韓尙敬), 동지춘추관사 변계량(卞季良)이 각각 3등분하여 『고려사』의 개수를 담당하기도 했다. 이후 문종대 감춘추관사 김종서(金宗瑞)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편수하여 올리기도 했다.

셋째, 춘추관에서는 국가 중요 정책이나 의례의 논의 과정에서 과거의 전거를 찾고자 할 때에도 동원되었다. 춘추관 관원에게 역대의 관제를 상고하게 하거나, 고대의 의례 전거를 찾게 하였다. 특정 관원의 임용 당시에 그의 집안이나 범죄 사실 등을 조회하는 것도 춘추관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각 사고(史庫)에 보관된 사료들을 햇볕에 말리어 관리하는 포쇄(曝曬) 작업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이외에 지방의 풍속과 수령에 대한 평판을 얻기 위해 외사(外史)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외사란 각 지방에 파견하는 사관(史官)을 말한다. 한편 규합(閨閤)에서 이루어지는 여성들의 역사를 살피기 위한 여사(女史)가 운영되기도 하였다. 외사와 여사 제도는 한정적 상황에서 나타난 업무이기 때문에 춘추관의 일반적인 사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를 통해 사관의 업무 범위가 다소 넓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4 춘추관의 관원 구성과 겸직제도

춘추관의 관원은 모두 겸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태종대 춘추관이 예문관과 분리된 직후의 관제를 보면,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1명,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1명,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2명과 편수관(編修官), 기주관(記注官), 기사관(記事官)이 존재하였다. 이 당시 마련된 춘추관의 제도는 성종대 『경국대전』에 수록된 관제와 비교하면 작은 변화만 보인다.

『경국대전』에 기재된 춘추관의 직제는 정1품 영사(領事) 1명(영의정이 예겸), 정1품 감사(監事) 2명(좌의정과 우의정이 예겸), 정2품 지사(知事) 2명, 종2품 동지사(同知事) 2명이 있었고, 그 아래에 정3품 당상관인 수찬관(修撰官), 정3품 당하관에서 종4품까지 편수관, 5품인 기주관, 정6품에서 정9품까지 기사관이 배정되어 있었다. 감사와 수찬관이 추가되는 변화가 생겼고 정원에 약간의 변동이 생겼다. 춘추관 관원은 모두 문과 급제자 출신을 선발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는 당대 국사를 기록하기 위해 문장에 능하고 역량이 풍부한 사람을 임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춘추관은 정3품아문으로, 수찬관이 실무를 관장하는 장관이었다. 수찬관은 모두 7명이 정원이었다. 홍문관의 부제학(副提學)과 6명의 승지(承旨)가 수찬관의 업무를 겸임하였다. 특히 승지는 국왕의 곁에 항상 시종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국가 중대사의 정보를 수집하기 편리했다. 수찬관을 포함하여 편수관과 기주관, 기사관은 정원이 얼마였는지 명확히 규정되지는 않았다. 다만, 수찬관 이하의 관원으로, 승정원 관원(8명)과 홍문관 부제학 이하 관원(17명), 의정부의 사인과 검상(3명), 예문관의 봉교 이하 관원(8명) 및 세자시강원의 당하관(2명), 사헌부 집의 이하 관원(29명), 그리고 사간원, 승문원, 종부시, 육조의 당하관 가운데 각 1명이 겸임하게 하였다. 즉, 법전에 따르면 수찬관부터 기사관까지 모두 76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이와 같은 해석은 학자마다 견해가 달라 정확한 정원을 알기는 어렵다. 예컨대, 사헌부 집의 이하 관원 가운데 정6품의 감찰(監察) 24명을 사관에 포함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따라 정원에 큰 차이가 있다. 최근에는 감찰도 춘추관 사관에 겸임시킨 것으로 이해하지만 아직 논의가 더 필요하다.

춘추관에 이렇게 많은 사관을 포함시킨 이유는 국가의 정책 기록이 다양한 분야에서 광범위한 기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특히 홍문관과 사헌부 관원이 거의 모두 포함된 것은 이들이 언론을 담당한 관원으로서, 누구보다 당대 시정에 대한 이해가 깊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6조의 낭청을 각 부서마다 1명씩 겸임사관으로 포함시킨 이유는 조선의 행정사무가 모두 6조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행정사무 전반에 관한 기록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승정원의 6방 승지 역시 국왕에게 올라오는 문서를 모두 검토했기 때문에 국가 중대사를 이해하기가 용이했다.

춘추관의 사관은 대부분 겸직이기는 했지만 예문관의 봉교 이하 8명의 관원은 전임사관과 같이 시정을 기록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예문관 본연의 업무인 왕명을 작성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예문관의 참하관은 항상 국왕과 신료들의 논의석상에 참여하여 기록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기록은 훗날 사초 가운데 가장 핵심 자료로 활용될 수 있었다. 이들은 문과에 급제한 신진 학자들로서 능력과 열정이 모두 뛰어난 이들이었다. 젊은 패기로 당대의 시정을 가감없이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이들을 별도로 ‘한림(翰林)’이라 부르며 대우하기도 하였다. 한림은 역대 중국에서부터 문학을 담당한 황제 주위의 뛰어난 시종신(侍從臣)을 일컫는 말로, 이들 관직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용어이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직제는 고종 초년에 이르러 조금 변화하는데, 이는 조선후기 춘추관 제도의 변화를 알려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육전조례(六典條例)』에 따르면 춘추관의 관원은 영사부터 수찬관까지는 동일하지만, 편수관부터 기사관은 겸직하는 관직에 변화가 있었다. 우선 편수관은 홍문관의 부제학, 교리, 부교리, 수찬, 부수찬, 승문원의 판교와 종부시의 정, 의정부의 사인이 겸직하게 하였다. 기주관은 규장각(奎章閣)의 교리, 부교리, 직각과 예조, 호조, 병조, 공조의 낭청 1원이 겸직하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기사관은 예문관의 대교, 검열과 승정원의 주서, 홍문관 박사 이하 관원이 예겸하게 하였다.

이로써 규장각의 교리, 부교리, 직각이 새롭게 춘추관 관원으로 추가되었다. 그런데 이외에는 다수의 관원이 사관에서 빠지게 되었다. 우선 이조와 형조의 낭관,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 의정부의 검상, 세자시강원의 당하관 2명이 겸임사관의 지위에서 누락되었다. 특히, 이조 낭관과 사헌부, 사간원 관원은 통청권(通淸權)의 폐지와 관련하여 그 특권이 사라지면서 사관의 역할에서도 사라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사관은 홍문관과 규장각 관원 등 문한관서를 중심으로 차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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