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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관[弘文館]

국왕의 자문에 응하고 문한을 관리하다

1463년(세조 9) ~ 1907년(순종 융희 1)

홍문관 대표 이미지

등영록(登瀛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홍문관은 국왕의 자문 역할과 문서 작성, 학술 연구 등을 맡은 기구였다.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와 함께 언론 삼사(三司)로 불리며 왕의 잘못을 간쟁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러한 기구는 고대 중국부터 존재했는데, 조선 세종대에 들어와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국왕 자문과 도서 관리 등 학술 기능을 부여하였다. 성현 세조대 폐지된 집현전은 성종대에 홍문관의 이름으로 부활하며 국왕 자문과 학술 연구를 도맡게 되었다. 홍문관 관원은 전원이 문과 급제자이자, 홍문록(弘文錄)에 오른 당대의 뛰어난 인재들만을 선발하였고, 조선시대 내내 핵심 권력층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2 홍문관의 성립 배경과 연혁

홍문관은 학술 연구 기구이자 국왕의 고문 역할을 하는 기구였다. 국왕의 자문 역할을 하는 기구는 신라시대의 통문박사(通文博士)나 고구려와 백제의 박사(博士) 등을 통해, 고대부터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조선의 홍문관과 유사한 기구의 연원은 중국 당으로부터 확인된다. 당에서는 홍문관을 설치하고 학사(學士)와 직학사(直學士) 제도를 두어 고금(古今)의 제도와 의례에 관해 논의하게 하였다. 고려도 당송(唐宋)의 제도를 도입하여, 홍문관을 설치하고 학사와 직학사를 운영하였다.

고려의 홍문관은 치폐를 거듭하여, 조선에 직접 계승되지는 않았다. 조선은 관각(館閣) 제도가 존재하여 수문전(修文殿), 보문각(寶文閣), 집현전(集賢殿) 등의 제도가 있었는데 세종대에 들어와 집현전에서 국왕의 자문에 응하고 궁중 도서를 관리하는 등의 역할을 하였다.

집현전에서는 여러 학사를 양성하고, 고제(古制)를 연구하며 세종대의 학술 수준을 높이 끌어올렸다. 하지만 성현 세조가 집권하고 집현전 학자들이 단종의 복위 운동에 가담하며 1456년(성현 세조 2) 관서가 폐지되기에 이르렀고, 도서 관리 기능만 잔존한 채로 예문관에서 그 기능을 전수받았다. 이때 집현전이 수행하던 경연 운영과 국왕 자문의 역할은 사라졌다.

홍문관은 1463년(성현 세조 9)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는데, 이때는 단지 도서를 보관하는 역할만 수행했다. 성현 세조는 경연을 통한 학술정치보다 측근을 통한 정치를 하였기에 홍문관의 기능은 한정적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현 세조 사후에 홍문관의 역할에 변화가 나타났다. 성종대에 이르러 본래 집현전에서 수행했던 다양한 학술 업무와 국왕 자문의 기능을 맡을 기구의 필요성으로, 1478년(성종 9) 홍문관의 역할이 대폭 증가하게 되었다.

홍문관은 관서의 위상을 높여가기 시작했고, 홍문관 관원들은 관서의 위상에 기대어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수행하였다. 결국 홍문관은 사간원, 사헌부와 함께 언론의 역할까지도 담당하며 언론 삼사(三司)의 한 축으로 성장하였고, 국왕 자문과 문한 기능, 경연, 사관(史官) 등 각종 중요 역할을 부여받으며 국가의 핵심 기구로 변모해 갔다.

연산군대에 잠시 홍문관이 폐지되고 진독청(進讀廳)이 설치되었지만, 중종반정으로 성종의 제도가 부활하며 홍문관은 조선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운영되었다. 1777년(정조 1)에는 규장각(奎章閣)이 건립되며 홍문관의 도서 일부가 규장각으로 이전되었으나, 홍문관의 위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경연청(經筵廳)으로 변질되었다가 이듬해 관서가 복구되었고, 결국 1907년(융희 1)에야 규장각에 병합되며 폐지되는 수순을 밟았다.

3 문한(文翰)을 관장하고 국왕의 자문에 응하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확인되는 홍문관의 기능은 궁중의 경서·서적을 관리하는 것과 문한(文翰)을 다스리는 것, 그리고 왕의 자문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즉, 크게 3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홍문관 고유의 업무인 정부 기록물의 작성과 관리를 맡은 ‘문한’의 기능이다. 문한이라는 것은 문장과 관련된 업무이다. 홍문관의 관원은 국왕의 교서를 작성하는 지제교(知製敎)의 업무를 겸직으로 맡고 있었다. 또한 춘추관과 같은 역사를 편찬하는 기구에 모든 관원이 겸직으로 참여하여 역사의 기록을 맡은 사관(史官)의 업무도 수행하였다.

둘째, 홍문관은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고제(古制)를 연구하여 ‘경연’과 같은 정치 석상에서 국왕의 자문에 응하는 역할을 하였다. 왕의 자문에 대비하고 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관료가 된 이후에도 꾸준히 유교 경전을 연마하였다. 대부분의 국가 정책이 유교 경전의 고제(古制)를 탐구하여 옳고 그름을 따졌기 때문에 항상 유교 경전을 익히고 있어야 했다. 당시 유교 경전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학문으로서, 실질적으로 백성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학문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셋째, 홍문관은 정치 석상에서 국왕에게 간쟁하고 신료들을 탄핵하는 언론으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홍문관은 집현전의 후신으로서 처음에는 도서의 관장과 같은 업무를 위주로 하였다가 성종대부터 정치 일선에서 다양한 언론 활동을 하였다. 주로 사헌부와 사간원인 대간(臺諫)이 언론을 담당하였지만, 홍문관은 이들의 탄핵과 간쟁으로도 의사가 관철되지 않을 때 더 강한 언론 활동을 했던 제3의 언론 기능을 수행하였다. 대간보다 빈번하진 않았지만 홍문관의 언론은 강력한 의지를 담았다.

4 홍문관의 관원, 모든 관직 하나하나가 중요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홍문관의 직제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홍문관의 관리를 책임지는 당상관(堂上官)으로 이루어진 겸직(兼職) 관료들이다. 여기에는 정1품 영사(領事) 1명, 정2품 대제학(大提學) 1명, 종2품 제학(提學)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둘째는 실직 녹관(祿官)이자 참상관(參上官)으로 홍문관의 주요한 업무를 처리하는 핵심 관료들이다. 정3품 당상관의 부제학(副提學) 1명, 정3품 당하관의 직제학(直提學) 1명, 종3품 전한(典翰) 1명, 정4품 응교(應敎) 1명, 종4품 부응교(副應敎) 1명, 정5품 교리(敎理) 2명, 종5품 부교리(副校理) 2명, 정6품 수찬(修撰) 2명, 종6품 부수찬(副修撰) 2명까지가 여기에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홍문관의 참하관이자 청요직 관료들인 정7품 박사(博士) 1명, 정8품 저작(著作) 1명, 정9품 정자(正字) 2명이 있다. 홍문관의 구성은 정1품의 영사부터 제학까지는 겸직(兼職)이었고, 정3품의 부제학이 실질적인 장관이었다. 따라서 홍문관은 정3품아문으로 규정된다.

우선, 당상관이자 겸직 관료인 홍문관의 영사와 대제학, 제학에 대해 알아보자. 홍문관의 최고책임자인 영사는 무조건 삼의정(三議政) 가운데 한명이 으레 겸직하도록 했다. 즉 조정 최고의 관료가 홍문관의 최고책임자가 되어 관서의 위상과 상징성을 높여주었다. 다만 영사는 홍문관에서 실질적 권한이 거의 없었다. 영사보다 대외적으로 홍문관을 대표하는 관직은 대제학이었다. 대제학은 특히 문형(文衡)이라 불린 직임이었다. 문형은 학문의 저울, 즉 학자 가운데 으뜸이 되는 관직이란 뜻이다. 대제학은 학자 관료들을 대표하는 위상도 지니고 있었기에 조선과 같이 학문을 중시한 국가에서 높은 위상을 지닐 수 있었다. 다만 대제학도 겸직이었기에 실무에는 크게 간여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는 산림(山林)이 두각을 나타내며 전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위상이 낮아졌으나, 조선 말기까지 존속되었다.

둘째, 홍문관의 핵심 관료인 부제학 이하 참상관은 홍문관의 주요 역할을 도맡아 했다. 특히 탄핵과 간쟁 등을 많이 하였기에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삼사 언론의 주축을 이룬 관직이었다. 이들은 홍문관 고유의 업무인 고제(古制) 연구와 각종 문서 저술, 경연관, 사관 등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왕의 교서를 작성하는 지제교(知製敎)의 업무를 겸임하기도 하였고, 경연에서의 시강관(侍講官)과 시독관(侍讀官), 검토관(檢討官)으로 참여하여 국왕과 함께 국가 정치를 논의하기도 하였다. 또한 홍문관 관원 전체가 춘추관(春秋館)의 편수관(編修官)과 기주관(記注官),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며 국가의 역사를 편찬하는 역할도 도맡았다. 이른바 ‘청요직’으로 불렸던 홍문관 관료들은 대부분 이들을 가리키며, 이들은 막강한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셋째, 홍문관의 참하관인 박사와 저작, 정자 역시도 청요직으로서 중요한 직무를 담당했다. 이들은 참하관이었지만 경연과 춘추관에 겸임으로 참석하여 기록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홍문관의 참하관은 청요직 가운데 하나여서 매우 신중하게 인원을 선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정7품에서 종9품의 가장 낮은 품계의 관료에게도 청요직이 존재하였는데 이는 승정원의 주서(注書), 예문관의 한림(翰林), 세자시강원의 설서(說書) 등이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홍문관의 참하관도 청요직의 하나로 꼽히며 문과에 급제한 관료들이 선망하는 관직의 하나였다. 이 자리는 임용된 이후 근무 일자를 따지지 않고 참상관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매우 빠른 승진을 보장하는 자리였다.

5 홍문록(弘文錄)을 통해 인재를 가려 뽑다

홍문관에서는 관원을 선발할 때 다른 관서와 달리 미리 후보자의 명단을 만들어두고, 이 가운데에서만 관원을 선발하였다. 이때 만들어둔 명단을 홍문록(弘文錄)이라고 부른다. 홍문관이 핵심 관서가 되면서, 여기에 차출되는 관료를 선발하는 자체가 민감한 정치적인 사안이 되었던 것이다.

홍문록은 몇 단계를 거치면서 신중하게 관원을 선발했다. 우선, 홍문관에서 일종의 비밀투표인 권점(圈點)을 통해 본관록(本館錄)을 만든다. 이어 이조(吏曹)에서 본관록을 토대로, 또 한번 권점을 거쳐서 이조록(吏曹錄)을 만든다. 이조록은 의정부(議政府)에 보내져서 검토를 거친 후에 도당록(都堂錄)이란 이름으로 확정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홍문록이다. 보통 관원의 선발은 이조에서 전담하지만, 홍문관의 관원은 홍문관과 의정부까지 참여하여 깐깐하게 인재를 골랐다. 이에 따라 학문이 뛰어나고 평판이 좋으며, 좋은 가문까지 갖춘 인사들이 참여할 수 있었다. 보통 3년에 한 번씩 홍문록을 작성하며, 이때마다 15인 내외의 인사들이 새롭게 홍문록에 들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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