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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도감[訓鍊都監]

조선 후기 최고의 정예부대

1593년(선조 26) ~ 1882년(고종 19)

훈련도감 대표 이미지

훈련도감 교재로 사용된 『무예제보』(武藝諸譜, 1598)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훈련도감(訓鍊都監)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며 만들어진 새로운 중앙 군영이었다. 임진왜란으로 기존의 군제(軍制)가 무너지자, 이를 수습하기 위한 정책으로 새롭게 훈련도감을 창설하였다. 또한 모든 군인에게 급료를 지급하는 상비군으로 조직하여 정예화를 꾀하였다. 오군영 가운데 모든 병력이 급료를 받는 유일한 군영이었는데, 국가 재정의 악화를 초래하여 폐지 논의가 종종 행해지기도 했다. 훈련도감은 국왕 시위와 도성 방어를 수행하며, 금위영·어영청과 함께 삼군문(三軍門)으로 불리는 중앙의 핵심 군영이 되었다. 그러나 1882년(고종 19)에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의 창설과 임오군란(壬午軍亂)의 여파로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2 조선 최고의 상비군이자 정예병으로 거듭나다

본래 조선의 군제는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로, 농민이 곧 병사가 되는 제도였다. 이들은 여름에는 농사를 짓고, 겨울에는 훈련하여 국방에 대비하였다. 조선은 이들 양인을 오위(五衛)로 나누어 배치하여 군인으로 활용하였다. 하지만 16세기를 지나며 양인들은 군사 훈련을 받는 대신 돈을 내고 군역을 기피하였고, 16세기 말에 이르면 실제 병력이 거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맞이하였고, 선조는 의주(義州)까지 피난을 떠나며 명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결국 왜란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군영을 창설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훈련도감이었다. 1593년(선조 26) 7월, 명의 장수인 낙상지(駱尙志)에게 화포의 훈련을 의뢰하며 포군(砲軍)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8월에 훈련도감을 창설하고 모병제(募兵制)를 실시하여 상비군으로 운영하였다. 또한 일본군을 상대하기 위해 명의 명장인 척계광(戚繼光)이 저술한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습득하여 삼수병(三手兵)을 기본 토대로 한 훈련법을 터득하였다. 삼수병은 칼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살수(殺手), 활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사수(射手), 조총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포수(砲手)로 구분하였다. 이 가운데 포수의 수가 가장 많았고 주력으로 활용되었다.

초기에는 1,000명 정도의 병력을 유지하였으나 점차로 증가하였다.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된 병자호란(丙子胡亂) 직전에는 5,000명 정도의 병력이 유지되고 있었다. 훈련도감은 모든 병력이 상비군이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지급하는 매달의 급료가 국가 재정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이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병력을 감축하려는 논의가 있었고 폐지하자는 논의도 있었지만, 조선후기 내내 가장 중요한 군영의 하나로 존속하였다. 그러나 1881년(고종 18) 군제 개혁으로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이 창설되면서 훈련도감의 역할이 축소되고, 결국 1882년(고종 19) 혁파되기에 이르렀다. 훈련도감의 혁파 직전 이들은 신식군대에 반대하고, 대원군을 옹호하며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때의 반란은 금방 진압되고 훈련도감도 완전히 폐지되었다.

3 국왕의 시위, 도성의 방어를 책임지는 조선 최고의 군영

훈련도감은 조선 후기 국가의 중앙 군영을 대표하는 기구였다. 이른바 오군영(五軍營)이라 부르는 조선후기 군제의 첫 번째 군영이 훈련도감이었다. 특히 모든 인원이 월급을 받고 근무하는 직업군인이었기 때문에 정예 병력으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훈련도감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국왕 시위의 업무이다. 조선 전기에는 금군인 내금위(內禁衛)와 겸사복(兼司僕), 우림위(羽林衛)가 국왕 시위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16세기를 지나며 금군의 수효가 감소하는 변화를 맞이하였다. 이런 가운데 임진왜란으로 훈련도감이 창설되었고 이들은 급료를 받는 정예병으로서 국왕 시위의 업무를 도맡게 되었다. 훈련도감을 ‘연하친병(輦下親兵)’이란 별칭으로 부른 것도, 임금의 가마 아래에서 직접 호위하는 부대라는 의미이다. 이들은 설립 직후 선조의 임시 거처였던 정릉동 행궁 주변에서 시위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후기 내내 궁궐에 숙위하여 국왕을 보위하였다.

조선 후기 훈련도감의 주요 업무는 국왕의 전좌(殿坐) 주변을 호위하고, 궁궐 각문을 파수하고 입직하는 것이었다. 또한 국왕의 궁궐 내 거둥에도 호위하는 역할을 하였다. 국왕이 외부로 행행(行幸)할 때에도 그 시위를 훈련도감에서 담당하였다. 국왕이 사신을 영접하거나, 왕릉에 참배하거나, 온천으로 행차할 때 도감군은 행렬의 맨 선두에서 국왕의 행차를 알렸다. 행차가 잠시 멈출 때에는 사방으로 국왕의 가마를 호위하는 역할도 하였다. 이러한 국왕 호위의 역할은 금위영, 어영청 등 삼군문의 체제가 확립된 이후에는 분담해서 담당했지만 삼군문 가운데 훈련도감이 차지하는 위상이 가장 높았다.

둘째, 도성 수비와 방어이다. 훈련도감의 업무 가운데 국왕 호위와 함께 핵심적인 업무가 도성의 수비였다. 한양 도성은 국가의 관료들이 집중하여 거주하는 곳으로 방어에 만전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후기 훈련도감의 창설과 이후 어영청, 금위영이 연달아 설치되면서 이들 삼군문은 도성을 나누어 호위하는 역할을 하였다. 훈련도감 군병은 아침저녁을 막론하고 자신들이 방어할 시설에 입직하여 도적을 방비하고 체포했으며, 화재를 단속하는 역할도 하였다.

숙종대에 이르면 삼군문이 나누어 도성을 지켰다.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地圖)』에는 도성의 방어를 3개 군영이 나누어 지킨 지역을 표시하고 있다. 훈련도감은 도성의 서북변을 지키는 업무를 맡았다. 도성의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의 동쪽부터 북소문인 창의문(彰義門)을 지나 서대문인 돈의문(敦義門)까지가 훈련도감의 담당 구역이었다. 특히 이 지역은 평안도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북방의 침략에 가장 가까운 지역이었다. 또한 북한산성으로 연결되는 지역으로서 도성의 다른 지역보다 실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지라고 할 수 있다. 훈련도감은 여타 군영보다 높은 위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지역의 보호를 맡긴 것이다.

셋째, 기타 업무이다. 훈련도감은 궁성과 도성의 수비와 순찰이 가장 중요한 직무였지만 평상시에는 다양한 잡무가 부과되기도 하였다. 우선 훈련도감은 자신들이 사용할 무기인 조종(鳥銃)과 화약을 제조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자신들이 수비하는 담당 구역, 궁궐과 도성, 북한산성의 유지, 보수를 담당하기도 했다. 담장이 무너지면 책임지고 수축했던 것이다. 또한 특이하게도 훈련도감에서는 동전(銅錢)을 주조하는 역할도 하였는데, 이는 동전의 재원이 되는 금속, 주조에 필요한 기술자인 장인(匠人), 그리고 만들어진 동전을 보호할 수 있는 군사적 역량까지 갖추었기 때문이다.

4 훈련도감의 조직구조와 훈련대장의 위상

훈련도감은 중앙관서이면서 군영이었다. 여기에는 다수의 정부관료들과 지휘관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훈련도감에는 직제상 정1품의 도제조(都提調) 1명, 정2품의 제조(提調) 2인, 종2품의 대장(大將) 1명, 종2품의 중군(中軍) 1명, 정3품의 별장(別將) 2명, 정3품의 천총(千摠) 2명, 정3품의 국별장(局別將) 3명, 종4품의 파총(把摠) 6명, 정9품의 초관(哨官) 34명이 있었다. 또한 종6품의 종사관(從事官) 6명이 별도로 존재하였다.

훈련도감의 명목상 가장 상위의 관직은 도제조였다. 도제조는 삼의정(三議政)이 돌아가면서 맡았다. 제조 2명은 호조판서와 병조판서가 당연직으로 겸직하였다. 이들은 종2품의 훈련대장보다 높은 관직이었지만, 실질적인 장관인 훈련대장은 훈련도감의 모든 사무를 책임졌고 지휘하였다. 따라서 훈련대장은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관직이 되었다. 훈련도감은 유일한 상비군으로 병력도 가장 많았고 항시 군사훈련을 하였으므로 정예병으로 구성되었다.

조선 후기 훈련대장은 대부분 무신 가문에서 차출된 무장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왕실의 외척(外戚)이거나 공신(功臣)이거나, 그도 아니면 종친(宗親)이 선정되었다. 즉, 국왕과 밀접한 혈연관계나 친연관계에 있는 인물이 훈련대장을 맡았다. 한 예로, 인조반정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당시 훈련대장이었던 이흥립(李興立)을 포섭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훈련대장은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권한이 있었다.

훈련대장은 자연히 한번 자리에 오르면 오랫동안 직임을 맡았다. 조선 후기 훈련대장을 맡았던 사람은 전부 80명이었다. 특히 이기하(李基夏), 유혁연(柳赫然), 이완(李浣), 김성응(金聖應)은 10년 넘게 훈련대장을 맡으며 국왕의 신임 아래 훈련도감을 운영했던 사람이었다. 또한 능성구씨와 평산신씨는 대를 이어 가장 많은 인물이 훈련대장에 오른 가문이었다. 구인후(具仁垕)와 구선복(具善復), 신경진(申景禛)과 신헌(申櫶)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5 훈련도감, 천민도 군인으로 흡수하다

훈련도감의 병력은 시기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해갔고, 그 병력 편성도 시기에 따라 잦은 변화를 보였다. 따라서 여기서는 숙종대 편제된 훈련도감의 구조를 소개하겠다. 훈련도감은 마병과 보병, 국출신(局出身)으로 나뉘어 있었다. 마병은 좌우 별장 휘하에 6개의 초관이 있었고, 보군은 좌·우부 천총 아래에 6개의 파총, 그리고 그 예하에 26개 초관이 있었다. 국출신은 별도로 3명의 별장이 있었다. 즉, 초관을 중심으로 보면 34개의 초관이 있었고 각 초마다 113~119명의 병력이 소속되어 있었다. 초관의 예하에는 기(旗), 대(隊), 오(伍)가 있었다. 여기에는 기총(旗摠)과 대장(隊長)이 있어서 이들을 통솔하였다.

훈련도감 군인에게는 급료가 지급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훈련도감에 소속되기를 원했다. 훈련도감에는 매우 다양한 인원들이 군인으로 편성되었다. 이는 훈련도감이 전란 중에 만들어져 흩어진 기민(飢民)과 유민(流民)들을 구휼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모병했던 것도 한 이유이다. 이에 따라 모집된 도감 군병에는 양인과 금군도 있었지만, 유생(儒生)이나 한량(閑良), 심지어 노비나 승려까지도 섞여 있었다. 이들 다수는 서울 근교에 거주했던 유민들이었고, 주로 하층민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훈련도감에서 매달 급료를 지급했기 때문에 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 모여들었던 것이다. 특히 천민들은 훈련도감에 예속되면서 면천(免賤)의 특혜를 얻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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