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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

근대 국가 수립을 위해 개화 정책을 추진하다

미상

개화파 대표 이미지

개화당 주요 인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오세창은 19세기 후반 그의 아버지인 오경석이 북촌의 양반 자제 가운데 동지를 얻어 이들을 통해서 혁신의 기운을 일으키고자 하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는 개화파가 형성된 경위와 관련된 증언인데 오경석은 당시 상당한 식견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역관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데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따라서 대신 양반집 자제들 가운데 똑똑한 사람을 육성하여 그들로 하여금 변화를 도모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 사회는 삼정의 문란으로 대표되는 구조적 모순과 서양세력의 도전이라고 하는 내우외환을 안고 있었다. 상류층 출신의 젊은이들 가운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한 세력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개화파이다. 이들 개화파 정치세력은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등 근대 개혁의 주역이 되었다.

2 개화파, 어떻게 형성되었나?

고종은 1873년(고종 10) 흥선대원군을 제치고 친정에 나서면서 대외정책의 기조를 바꾸었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수신사, 영선사, 신사유람단을 연이어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진 정치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고종의 개화정책에는 1880년(고종 17)에 파견된 제2차 수신사가 특히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은 일본주재 청국공사관의 참찬관인 황준헌(黃遵憲)이 작성한 조선책략을 고종에게 보고하였다. 조선책략은 조선이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을 것을 권유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고종은 이러한 청국의 권유를 받아들여 대미수교를 추진하였으며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1882년(고종 19) 4월 6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될 수 있었다.

미국에 대한 문호개방 정책은 많은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 김홍집이 가지고 온 조선책략이 그 과녁이 되었다. 병조정랑 유원식의 상소 를 신호탄으로 전국 각지에서 척사상소가 밀어닥쳤다. 이러한 반발 때문에 개화정책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고종은 개화정책을 꾸준히 밀어붙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종은 자신의 개화 의지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젊은 정치인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신사유람단이다. 1881년(고종 18) 12월 개화정책의 추진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었는데 신사유람단에 파견되었던 인물들이 모두 이 기구에 전진 배치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소장파 관료로서 원로 대신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던 고종에게는 든든한 정치적 지원군이 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정치성향을 띠고 있었다. 이렇게 고종이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신진 정치세력이 바로 개화파였던 것이다.

3 개화파의 사상적 뿌리

고종의 개화정책 추진이 개화파 형성의 정치적 계기가 되었지만 이를 위한 사상적 기반은 이미 오래전부터 마련되고 있었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박규수였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다. 박지원은 대표적인 북학파로서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학풍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전통적인 화이론에서 탈피하여 북경을 통해 발달된 문물을 섭취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박규수도 이러한 조부의 학풍을 계승하였다. 그래서 중국을 통해 입수한 해국도지 등을 활용하여 지구의를 직접 제작하기까지 하였다.

박규수는 1874년(고종 11) 관직에서 물러난 후 자신의 사랑방에 드나드는 젊은 양반 자제들에게 조부의 문집인 연암집을 강의하고 중국을 왕래한 사신이나 역관이 전하는 새로운 사상을 전해주었다. 훗날 박영효는 자신을 비롯하여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 훗날 갑신정변을 일으킬 주역들이 박규수 대감의 사랑방에서 처음 평등사상을 배웠다고 회고한 바 있다.

서유견문으로 유명한 유길준은 후일 ‘어렸을 적에 시를 지어 박규수 대감께 보여드렸더니 재주가 이토록 뛰어난데 왜 시무(時務)의 학문을 하지 않는가’라고 말씀하셨다고 회고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시무의 학문이란 북학파의 사상적 전통을 이어받은 개방적이고 실용적 학문을 뜻하는 것이었다. 또 훗날 영선사로 중국에 건너가는 김윤식은 박규수의 문집을 직접 간행한 점으로 그에게 사상적 영향을 받았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처럼 개화파는 박규수를 통해 북학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북촌의 양반자제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로는 앞서 언급한 오경석과 함께 유홍기도 들 수 있다. 오경석은 역관으로서 당시 국제 정세에 대해 밝은 인물이었고 유홍기는 의원(醫員)으로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 신서를 연구한 인물이었다. 그는 북촌의 양반자제들 사이에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당시 항간에서는 백의정승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오경석은 박규수가 사신으로 중국에 갈 때 역관으로 수행한 바 있다. 사상적으로 기맥이 통하고 있던 사이였던 셈이다. 이렇게 개화파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은 모두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강화도 조약 전후에는 통상개국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4 개화파와 갑신정변

개화파 정치세력 내에도 차이는 있었다. 학자들마다 분류방식에 차이가 있는데 어떤 이는 정치적 성향에 따라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고 나누지만 시무개화파와 변법개화파로 나누는 사람도 있다. 또한 개화라고 하는 개념을 좀더 좁혀서 문명개화론자와 동도서기론자로 나누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당시 개화파 내부에 현격한 사상적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개화파의 분화에는 사상적 계기 못지않게 정치적 계기가 크게 작용하였다. 특히 1884년(고종 21)에 일어난 갑신정변이 개화파 분화의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 당시 개화파는 불가피하게 이 사건에 참여한 사람과 참여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온건개화파이고 참여한 사람을 급진개화파인 셈이다. 그리고 당시 급진개화파들은 자신들을 일컬어 개화당 혹은 독립당이라고 불렀다.

개화당은 사상적으로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배태되었지만 정치적으로는 1880년(고종 17)을 전후한 시기에 태동하였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고종의 개화정책이 이제 막 본격화되려던 무렵이었다. 개화당도 이러한 개화정책을 틈타 정치적으로 결집하기 시작하였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김옥균이 과거에 급제한지 10년 동안 벼슬길이 열리지 않다가 서양학문을 연구하고 부국강병책을 역설하면서 사람들이 그를 영수로 추대하였다고 한다. 김옥균이 과거에 급제한 것이 1872년(고종 9)이니까 이 자료에 따르면 그가 개화당의 영수가 된 것은 1880년대 초엽이었던 셈이다.

개화당에는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이 핵심 인물이었다. 이 무렵 이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미쳤던 박규수와 오경석은 이미 사망하였지만 유홍기는 여전히 생존하여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또한 밀항을 통해 일본에 다녀온 통도사의 승려 이동인도 이들과 협력하고 있었다. 서재필을 비롯한 일군의 젊은 사관생도들이 이들의 일선 행동대원 역할을 하였다.

개화당은 일본에 자주 출입하면서 친밀한 관계를 맺었고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려 하였다. 하지만 임오군란 이후 청국이 조선에 대해 속방화정책을 펴면서 이들의 정치적 미래가 위협받기 시작했다.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민씨 척족들은 사사건건 이들을 견제하고 나섰다.

개화당은 이러한 상황에서 건곤일척의 정치적 도박을 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갑신정변이었다. 이들은 우정국 개국을 축하하는 연회를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일단 정권을 잡는데는 성공하였다. 신정부를 구성하고 갑신혁신정령 14개조를 공포하였지만 청군의 개입으로 정변은 사흘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개화당의 정치적 실험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들은 대부분 일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5 개화파와 갑오개혁

1894년(고종 31)에 시작된 갑오개혁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김홍집을 들 수 있다. 그는 중간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시작되는 순간과 끝나는 순간에 같은 위치에 있었다. 갑오개혁 당시 그와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한 인물로 어윤중을 들 수 있다. 그와 어윤중 그리고 김윤식을 통틀어 온건개화파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갑오개혁이 처음 시작될 무렵 개혁추진기구는 군국기무처였고 그곳의 총재는 김홍집이었다. 당시 김홍집은 고종과 일본 모두가 동의한 인물이었으며 신정부의 또 다른 정치적 실세였던 흥선대원군도 불만이 없었던 인물이었다. 기업으로 치면 주요 대주주들이 모두 동의하여 선임한 CEO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는 확실한 권력기반을 가지지 못한 관리자에 불과하였다.

군국기무처에는 김홍집과 어윤중 등 온건개화파가 수뇌부를 구성하고 있었지만 유길준, 김학우, 권형진, 조희연 등 소장파 관료들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북부 지방의 토반(土班)이거나 무관 출신으로 1880년대 개화 기구에서 실무를 담당하면서 새롭게 성장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정치적 리더는 유길준이었다.

1894년(고종 31) 11월 개화파 정부에 일본으로부터 귀국한 박영효 등이 참여하였다. 이른바 급진개화파가 10년 만에 복귀한 셈이다. 이후 개화파정부의 명목상 수반인 김홍집과 새로운 실세를 자부한 박영효의 관계는 결코 원만하지는 못했다. 이때 소장파 관료들을 이끌던 유길준은 과거 박영효와 정치적 인연이 없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김홍집을 뒷받침하는 참모로 활약하였다.

1895년(고종 32) 삼국간섭 이후 왕실과 조정에 친러세력이 대두하면서 개화파정부는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김홍집과 유길준도 이 과정에서 한때 실각하기도 하였다. 이를 일거에 만회하려한 사건이 을미사변이었다. 이를 통해 개화파정부가 재건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민심을 잃어버렸다. 결국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개화파 정부는 아관파천으로 무너졌으며 이 과정에서 김홍집과 어윤중은 살해당했고 유길준 등은 일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갑오개혁은 온건개화파 급진개화파 할 것 없이 범개화세력이 모두 참여한 사건이었다. 이를 통해 당시 조선 사회가 필요로 했던 개혁과제를 상당한 수준 실현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자주성이라는 측면에서 하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정치적으로는 패배하고 말았다. 아관파천을 통해 개화파는 추방되었지만 그들이 제시한 개혁의 방향과 과제는 이후 대한제국 정부가 상당 부분 승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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