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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미주 외교 담당 기관

1919년

구미위원부 대표 이미지

구미위원부 직원 일동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1919년 8월 25일,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Korean Commission)’가 설치되었다. 워싱턴사무소가 본부 역할을 하였으며, 지방위원부가 설치되어 북미, 하와이, 멕시코, 쿠바 지역의 한인들에게 공채금(公債金), 인구세(人口稅) 등을 거두었다. 미주에서 담당업무 및 존재 형태를 둘러싸고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간의 이견이 있었으며, 이것이 원인이 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1925년 ‘폐지령’이 발표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폐지령’ 이후에도 이승만 지지 세력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1948년,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 영사관, 대사관이 설립되면서 외교활동이 중단되었다.

2 구미위원부의 설립과 활동

1919년 5월, 이승만(李承晩)은 한성정부(漢城政府)의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 자격으로 워싱턴에 대미 외교 업무를 위한 사무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3개월 뒤인 8월 25일, 「집정관총재 공포문」 제2호를 공포했다. 이에 근거하여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가 설치되었다. 구미위원부의 정식명칭은 ‘대한민국특파 구미주찰위원부(The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 for the Republic of Korea)’이다. 구미위원부는 1919년 설립 이후 해방 이후 미국과 국교가 맺어지기 전까지 이승만의 활동 기반이 되었다.

구미위원부 사무소는 워싱턴, 필라델피아, 시카고, 파리, 런던에 설립되었다. 이 중 시카고에 있는 사무소는 설치 계획만 있고 실행은 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워싱턴사무소는 구미위원부의 본부 역할을 했다. 이승만은 한성정부 집정관총재 자격으로 각 통신부와 사무소를 총괄하며 외교 및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미국, 하와이, 멕시코, 쿠바에 거주하는 교민들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거두었다. 워싱턴사무소에는 위원장 1인, 위원 3인, 법률고문 1인, 사무원 2인, 타이피스트 1인이 배치되었다.

필라델피아통신부는 1919년 4월 중순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 회의’(혹은 ‘대한인 총 대표회’)가 개최되었을 때 만들어졌다. 미국 내에서 일본의 선전에 대응하고 한국 문제에 대한 공정한 여론을 형성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필라델피아통신부에서는 『한국평론(Korea Review)』을 발간했으며, ‘한국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고 이를 확산시켰다.

파리사무소는 1919년 4월, 김규식(金奎植)에 의해 만들어졌다. 당시 명칭은 ‘한국공보국’이었으며 간단한 통신문과 선전 책자들을 배포했다. 1919년 8월, 김규식이 구미위원부 위원장이 되어 미국에 머무르게 되자, 황기환(黃玘煥)이 서기장이 되어 파리사무소 일을 관장했다. 런던사무소는 영국 내 선전 활동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120년 6월경 설치되었다. 상설기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이 있을 때 파리사무소를 관장했던 황기환이 파견되었다. 영국 현지에서는 맥켄지(Frederick A. McKenzie)가 주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통신부와 사무소 이외에 북미, 하와이, 멕시코, 쿠바에는 지방위원부가 설치되었다. 지방위원부의 주된 업무는 공채금, 인구세 등 다양한 명목의 자금을 걷는 것이었다.

구미위원부가 진행한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활동이었다. 대중집회와 강연 활동, 각종 홍보물의 배포, 한국친우회의 확대가 이에 해당한다. 이승만, 정한경(鄭翰景), 서재필(徐載弼) 등은 강연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국 사정을 잘 아는 헐버트(Homer B. Hulbert)와 벡(S. A. Beck)도 이에 동참했다. 「한국적요(Brief for Korea)」를 비롯한 총 30~40여 종의 홍보물도 제작했다. 한국친우회는 미국 내 21개 도시, 런던, 파리로 확대되었다. 다음으로 한국 문제를 미 의회에 홍보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미국 의회에서 한국 문제와 관계되는 의안이 상원에 2번, 하원에 1번 제출되었다. 해당 의안들은 상하 양원의 외교위원회로 회부 되었다. 이와 함께 상원의원, 하원의원 일부는 한국 문제에 대해 연설하였고, 일본의 압박, 폭행에 관한 내용 등이 국회 의사록에 수록되었다. 상원의원 34명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국제연맹에 가입시키자는 의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구미위원부의 이러한 활동을 기반으로 미주에서 영향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3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갈등과 구미위원부 ‘폐지령’ 발표

1919년 8월 25일에 발표한 「집정관총재 공포문」 제2호에 따르면, 구미위원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표’하여 미주와 유럽에서 사실상 정부의 업무를 대행하는 것으로 명시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사들은 이승만이 미국에 체류하면서 집정관총재 및 대통령을 혼용하면서, 독자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이 대통령 명의만을 사용하고, 상해에 부임할 때까지 대통령의 권한 행사를 유보한다고 결정했다. 이와 함께 구미위원부는 대통령의 ‘보좌’기구이며, 재정업무에는 관여할 수 없고 외교 업무만을 수행한다고 발표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재정을 ‘독립공채권’ 발행으로 일원화 시키려고 했다. 따라서 구미위원부 주도로 공채를 발행하는 것을 정지하고, 추후 임명되는 ‘주미 재무관’이 ‘독립공채권’ 발행을 관장한다고 결정했다.

구미위원부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사들의 인식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1922년 워싱턴회의가 종결된 이후 더욱 좋지 않아졌다. 워싱턴회의에 한국 문제를 상정하는 것을 실패했고, 1920년대 경기 침체로 인해 구미위원부의 근간이었던 미주 한인사회의 경제 상황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1925년 3월 13일, 곽헌(郭憲), 최석순(崔錫淳) 등 10명은 임시의정원에 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제출하였다. 이 안은 임시의정원을 통과하였고, ‘심판위원회’에서는 이승만을 면직시킨다는 내용이 결의되었다.

한편, 대통령 이승만 탄핵이 발표되기 3일 전, 대통령 직무대리 역할을 하고 있던 박은식(朴殷植) 내각은 ‘임시대통령령’ 제1호를 발표하여 구미위원부의 폐지하기로 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구미위원부는 국무회의의 결의나 임시의정원의 동의를 거쳐 적법하게 설립된 기구가 아니다.
② 구미위원부는 실제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정부의 업무수행만 방해했다.
③ 구미위원부는 ‘연방정부’와 같은 행세를 하면서 독립운동의 통일을 파괴하고 인심을 분열시켰다. 국무회의에서는 내정통일과 외교 쇄신을 기하기 위하여 구미위원부의 폐지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

이승만은 1925년 4월 29, 「대통령 선포문」을 발표했다. 핵심 내용은 국민 대단결을 도모하고, 한성정부의 계통을 이은 구미위원부를 계속 유지시키자는 것이었다.

4 구미위원부 ‘폐지령’ 발표, 그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구미위원부 폐지를 결정하면서, 구미위원부는 미주 및 유럽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표기구임을 주장할 수 없었다. 구미위원부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하와이 대한인교민단, 동지회의 지원으로 유지되었다.

구미위원부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중심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인국민회와 거리를 둔 유학생들이었다. 남궁염(南宮炎), 신형호(申衡浩), 이용직(李容稷), 주영한(朱榮翰), 허정(許政), 윤치영(尹致暎), 장기영(張基永) 등이 구미위원부 운영의 주축 인물이었다.

뉴욕 한인 유학생들은 구미위원부가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1928년 1월, 윤치영은 뉴욕에 있는 한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동지회 뉴욕지부가 설립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허정은 『3·1 신보』 창간에 앞장섰다. 허정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3·1 신보』를 중심으로 기존 구미위원부 인원뿐만 아니라 중립적 태도를 가진 인사, 흥사단의 신흥세력이 될 만한 사람까지도 포용할 수 있었다고 했다. 또한 재정적으로도 좋은 성과를 얻었다고 적었다.

한편, 1927년 6월, 뉴욕에서 열린 유학생총회 동부대회에서는 시국 문제를 논의한 후, ① 구미위원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이며, ② 구미에 대한 실지 외교를 담당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③ 일반 애국 동포는 구미위원부의 유지발전에 대하여 성심을 기울이고, 의무를 다하는 것을 희망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1930년 6월에 열린 유학생총회 동부대회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구미위원부의 법통 관계를 빠르게 회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이 제시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구미위원부를 폐지한다고 결정한 이후에도,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구미위원부는 이승만의 대미활동에 중요한 지지 세력이 되었다.

구미위원부는 1934년 이승만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위원으로 선출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된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후 1948년 9월,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 대사관과 영사관이 설립되고, 대사, 영사가 파견되면서 구미위원부의 외교활동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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