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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위상과 역할을 다시 검토하다

1920년 ~ 1924년

1 개요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란,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이하 임정)가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대표기구로서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자 그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개최된 대회이다. 당시 임정의 외교 중심적 운동노선 및 ‘정부’라는 비효율적 조직 형태에 대한 비판과 이승만(李承晩)에 대한 불신임이 비판의 주를 이루고 있다. 국민대표회의 개최 목적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국내외 각 지역 및 단체의 대표들이 모여 독립운동의 최고기관과 운동노선 및 방침에 관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둘째,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등 다양화된 이념으로 인해 분화하는 민족운동 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민족통일전선체(民族統一戰線體)를 결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대표회는 참가 대표들의 운동 노선 등에 관한 견해 차이로 말미암아 극심한 대립을 보이다 결국 파행으로 치달았다. 국민대표회의 명칭은 자료마다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국민대표자대회(國民代表者大會)’, ‘국민대표대회(國民代表大會)‘, ‘국민대회(國民大會)’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국민대표회의 기간을 크게 국민대표회 준비기간(1921.1~1922.12), 국민대표회의의 기간(1923.1.3.~6.7), 국민위원회 활동기간(1923.6.8.~1924.2)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때, 실제 진행된 회의를 나타낼 때는 ‘국민대표회의’를, 그 이외에는 ‘국민대표회’를 사용하였다.

2 3·1 운동과 서울, 상해, 연해주의 세 단체

1905년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강제 체결 이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한국 보호국화(保護國化, 보호국은 국제법상 반(半)주권국으로, 보호조약에 따라 외교와 군사에 관해 다른 나라의 안전 보장을 받음) 조치에 착수하였다. ‘을사조약’ 체결을 전후로 하여 국내외에서는 다양한 조직이 결성되어 국권수호운동(國權修好運動)을 펼쳤다. 국내의 의병운동(義兵運動), 만주(滿洲)와 연해주(沿海州) 등지에서의 무장독립투쟁(武將獨立鬪爭), 헤이그 밀사 파견을 위시한 외교독립청원(外交獨立請願)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국내외 민족운동 세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0년의 한일병합(韓日倂合)은 끝내 피할 수 없었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는 국가의 이름은 지도상에서 공식적으로 삭제되었다. 이전의 한국은 자신을 표출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빼앗긴 채 다만 식민통치자 일본제국이 명명한 ‘조선’이라는 이름으로만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동안 켜켜이 쌓인 나라 잃은 설움과 울분을 전국적으로 토해낸 1919년의 3·1 운동은 이른바 ‘무단통치’(武斷統治, 헌병경찰을 앞세워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강압적 통치)로 알려진 1910년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방식에 굵직한 균열을 일으켰다. 조선총독부의 통치 방식이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통치’(文化統治, 조선 내부를 분열시키고자 하는 목적 아래 유화(宥和) 정책을 앞세운 기만적 통치)로 변화했던 것이다. 이외에도 3·1 운동은 국내외 민족해방운동의 활동을 촉진하고 그 방법적 통일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내외에 걸쳐 민족해방운동의 최고기관을 자임하는 여러 단체가 조직된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그중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단체는 중국 상해(上海)의 ‘임시정부’(이하 상해임정), 한성(漢城, 서울)의 ‘임시정부’(이하 한성정부)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였다.

3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과 배태된 분열의 씨앗

대한국민의회는 기본적으로 ‘무장투쟁’을 운동노선으로 견지하고 있었다. 상해임정과 한성정부가 ‘정부’를 표방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이 두 단체는 ‘외교독립’을 중심 운동노선으로 삼았다. 본디 정부란 국토·국민·주권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갖추어진 상태에서만 설립할 수 있는 통치·행정조직이다. 한성정부는 국내에서 만들어졌지만 비밀리에 조직 및 선포되었다는 점에서, 상해임정은 국외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정부’가 되기에 결격사유가 있었다. 더욱이 당시 식민지 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본제국의 국토이자, 식민지 조선인은 일본 국민으로 자신의 주권을 잃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한성정부나 상해임정이 ‘정부’의 형태를 표방한 것은 여러 나라를 상대로 한 ‘외교’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상해임정의 국무원 포고(國務院布告)에 따르면 임시정부의 건설 목적 중 하나는 대외적으로 한국이 독립국임을 주장하고 외국에 승인을 요청하기 위해서 한국을 대표하는 정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3·1 운동 독립운동의 통일을 꾀하는 분위기에 힘입어 이들 세 단체의 통합작업이 진행되었다. 상해임정은 한성정부 수립과 함께 선포된 각원(閣員, 내각을 구성하는 인원)을 그대로 상해임정의 각원으로 받아들이고,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를 대통령(大統領)으로 고치는 개조작업을 통해 한성정부와 통합을 이루었다. 한성정부는 비록 실질적인 활동보다는 정부 수립의 선포 자체에 의의를 둔 임시정부였으나, 한반도 내 유일한 정부라는 점에서 명목상의 법통을 지니고 있었다. 상해임정은 한성정부와의 통합을 토대로 그 법통을 계승하였다는 ‘법통론’을 내세울 명분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국민의회는 상해임정과의 통합 조건으로 임시의정원 해체와 신국회 구성을 내걸었다. 대한국민의회가 임시의정원의 해체를 주장했던 이유는 그 구성원이 상해에 거주하는 각 도의 대표로만 꾸려져 있어 기타 지역의 조선인은 발언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국회 구성을 주장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대한국민의회의 입장에서 새로 통합될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외교독립론 혹은 안창호(安昌鎬)의 실력양성론을 위주로 한 운영뿐만 아니라 무장투쟁론 또한 반영될 필요가 있었다.

대한국민의회는 또한 ‘정부’라는 형태가 형식적인 조직과 직책을 운용하면서 불필요한 재정지출이 많아진다는 점에서 비효율적이라는 비판도 제기하였다. 이는 국민대표회의 당시 창조파가 내세운 주요 논점이기도 했다. 즉,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라는 부분적 통일전선체(統一戰線體)가 만들어질 때부터 이미 분열의 씨앗은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상해임정과 대한국민의회의 완전한 통합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만 대한국민의회 관계자 중 이동휘(李東輝)를 비롯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 한국인 최초로 조직한 사회주의 정당으로, 1918년 4월 하바롭스크에서 이동휘와 김알렉산드라(Alexandra Petrovna Kim)가 결성함) 인사들만이 통합 임정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 임정은 대한국민의회의 관할 지역인 북간도(北間島)와 연해주를 포괄하지 못하는 부분적 통일전선체를 구성하게 되었다.

4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의 소집 준비

통합 이후로도 지도기관의 조직형태, 운동노선, 지역 간 파쟁, 이념대립 등으로 인해 임정 내부의 잡음은 계속 발생하였다. 특히 1919년 2월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은 임정 내부의 분열을 일으키고 반임정세력이 대두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20년 12월 이승만이 상해에 도착하자, 그에 대한 반감으로 오히려 임정에 대한 민족운동가들의 불신(不信)이 가중되었다. 임정 내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임정의 군무총장(軍務總長)이었던 노백린(盧伯麟)은 이승만이 위임통치를 청원한 죄를 물으며 그의 축출을 주장했다. 1921년 2월에서 5월 사이 김규식(金奎植), 남형우(南亨祐), 안창호(安昌鎬) 등이 줄지어 임정을 탈퇴했다. 또한 1920년대 초 국내에 유입된 사회주의를 새로운 운동 이념으로 수용하여 조직된 이동휘 계열의 상해파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1921년 중국 상해에서 이동휘를 중심으로 결성된 사회주의 단체)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1919년 9월,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전로고려공산단체 중앙위원회(全露高麗共産團體中央委員會)와 대한국민의회가 결합하여 형성한 사회주의 단체)의 당원 역시 임정에서 탈퇴하거나 반대 입장을 취했다. 통합 임정은 부분적 통일전선체로서의 성격을 잃은 채 ‘정부’라는 명분만 남은 일개 독립운동 단체로 탈바꿈했다.

이렇듯 임정이 독립운동단체의 ‘총본산(總本山)’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상실하자, 1921년 초부터 국외 각지에서 새로운 통일적 최고기관을 구성하기 위한 국민대표회를 개최하자는 요구가 제기되었다. 특히 이 시기는 민족운동 내부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로 양분되기 시작하는 시기였던 만큼 모든 민족운동 세력을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통일전선이 구성될 필요성이 대두하였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국민대표회의 소집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국민대표회는 한인의 독립운동과 관계된 지역과 단체를 총망라하는 만큼 준비 기간만 1921년 1월부터 1922년 12월까지 총 2년에 달했다.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이끌었던 주체는 대한국민의회와 북경의 군사통일회의(軍事統一會議), 한인사회당 계열 등 반(反)임정세력이었다. 각지에서 임정을 비판하는 세력이 대두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는 분위기 속에서 임정에 비판적인 관계자 역시 속속 국민대표회 개최 준비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으로 안창호는 임정을 탈퇴한 뒤 임정의 절대성을 부정하며 국민대표회 소집을 제창하였다. 이후 1921년 5월 상해 국민대표회기성회(國民代表會期成會)를 조직하여 군사통일회의와 협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동 노력 덕분에 1921년 8월 최초의 국민대표회 준비조직인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國民代表會籌備委員會, 이하 주비회)가 출범하였다. 상해, 북경(北京), 천진(天津) 각지의 위원으로 구성된 반임정세력까지 포함하는 최초의 국민대표회 준비조직이었다.

준비 기간 중 거쳐야 하는 난관도 있었다. 첫째, 이승만을 지지하는 임정 내 기호파(畿湖波) 인사들이 조직한 협성회(協成會)에서 주비회 참가자들을 위협하는 등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지속적으로 방해했던 것이다. 둘째, 임정은 주비회에 1921년 11월 12일 개최 예정이었던 워싱턴회의를 공동으로 준비하기 위해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 자칫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칠까 걱정한 주비회 관계자들은 국민대표회 준비를 잠시 유예하고 우선 워싱턴회의 준비에 주력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워싱턴회의는 결과적으로 한국의 독립문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미국과 일본 사이의 타협이었다. 셋째, 주비회의 재정적 어려움이었다. 이는 국민대표회를 지지하는 코민테른의 재정지원으로 해결되었다. 미국 주도의 워싱턴회의에 대응하여 소련이 개최한 극동인민대표대회(極東人民代表大會)에서 코민테른은 현재 단계의 조선 민족해방운동에서는 민족 부르주아지와의 제휴가 필요하다는 반제(反帝)통일전선 방침을 제시하는 한편 이를 위한 임정의 개혁을 지시하였다. 코민테른은 이를 위해 이동휘가 임정의 국무총리(國務總理)로 재직할 당시 밀사(密使)로 파견한 한형권(韓馨權)에게 20만 루블을 지원해주었다. 이를 통해 자금난을 겪던 주비회의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5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의 파행과 결렬

1923년 1월 3일, 드디어 국민대표회의 회의가 상해에서 개최되었다. 국민대표회의는 국내외 독립운동단체 및 지역대표 125명이 참석한 가운데 1923년 1월 3일부터 6월 7일까지 총 74회의 회의가 진행되었다. 그중 대표자격심사를 진행하고 국민대표회의 간부를 선출하는 임시회의가 총 15회, 정식회의가 총 48회, 대다수 개조파(改造波)가 회의에 불참한 가운데 창조파(創造波) 중심으로 진행된 비밀회의가 총 11회였다. 여기서 개조파란 대개 임정 수립에 참여했거나 또는 임정을 독립운동의 총괄기관으로 인정한 세력으로, 조직형태 혹은 운동노선 및 이념 등의 차이는 있지만 임정의 존재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표적으로 구(舊) 임정 관계자였던 안창호, 박은식, 한인사회당 계열의 이동휘를 들 수 있다. 반면 창조파는 임정의 존재를 부인하고 효율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새로운 조직을 건설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이다. 처음부터 통합 임정에 불참한 문창범(文昌範) 계열의 대한국민의회, 북경의 군사통일회가 대표 예시이다.

개조파와 창조파는 군사, 재정, 외교, 교육, 생계, 노동문제 등 6개 분과와 관련된 안건을 상정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23년 5월 3일 임정 존폐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이 발생하면서 개조파는 5월 15일 이후 국민대표회의를 탈퇴하기 시작하였다. 창조파들의 ‘신조직 건설론’은 이미 그들이 통합 임정에 참여하지 않을 때부터 견지하고 있었던 이론이었다. ‘혁명세력의 연합은 조직과 단결의 현실적인 관계에 의해 이루어져야지, 중앙으로부터 만들어지고 승인되는 연합은 반대한다.’ 즉, 중앙 주도적으로 만들어지는 조직형태로는 독립운동을 효율적으로 이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대다수의 개조파들이 탈퇴하거나 회의에 불참하는 가운데 나머지 창조파들은 6월 7일 국호를 한(韓), 연호를 기원(紀元)으로 하는 ‘국민위원회(國民委員會)’라는 새로운 기관을 구성하기로 합의하고 18조로 이루어진 헌법을 새로 제정한 후 국민대표회의의 폐회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후 코민테른은 국민위원회가 개조파를 배제하고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임정과 다르지 않다고 비판하면서 이를 민족단일당(民族單一黨)의 형태로 인정하지 않았다. 소련 및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지 못하자 국민위원회는 조직된 지 약 8개월 만인 1924년 2월 해산되었다. 비록 국민대표회는 창조파와 개조파의 극심한 대립으로 파행적 결과를 맞이했지만, 이를 계기로 임정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이 가해지면서 새로운 최고기관으로서 민족단일당 건설론이 확산된 것은 긍정적인 면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임정은 국민대표회 이후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제를 국무령제(國務領制)로 전환하는 한편, 전 국민을 대표하는 정부가 아니라 ‘광복(光復)운동자’들만의 조직임을 표명함으로써 내용적으로 당(黨) 형태로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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