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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업회[勸業會]

1910년대 초 러시아에서 한인 자치와 독립운동을 동시에 꾀하다

1911년

1 개요

권업회(勸業會)는 1911년 6월에 설립되어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존속한 러시아 연해주 지역 한인 자치단체다. 기존까지 분열되어 있던 한인 정치 세력을 망라하고 러시아 관료들의 지지를 받으며 러시아지역 한인 대표기관으로 인정받았다. 기관지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교민의 권익향상을 위해 힘썼다. 또한 한인 러시아이주 50주년 행사를 계획하고 대한광복군 정부를 설립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그 활동이 좌절되었다. 권업회를 모체로 한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는 망명정부의 효시가 되었다.

2 권업회의 설립과정과 연해주 한인 정치 세력의 통합

권업회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11년 6월 1일이다. 이때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권업회 발기회가 결성됐다. 이 단체는 표면적으로 연해주 지역에서 한인사회의 농업, 상업, 공업, 학업을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국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정치단체였다. 이렇게 표면적인 목적과 실제 목적이 다른 이유는 1911년 6월 1일에 러일범인인도조약이 체결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공연하게 반일을 목적으로 활동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권업회 발기회의 회장과 부회장은 각각 최재형(崔在亨)과 홍범도(洪範圖)였다. 그 외 임원으로 총무에 김익용(金益庸), 서기에 조창호(趙昌鎬), 재무에 허태화(許太化), 의원으로 김그리고리, 엄인섭(嚴仁燮), 오창환(吳昌煥), 유기찬(柳基燦), 조장원(趙璋元), 김기룡(金起龍), 김태봉(金泰奉)이 취임했다. 권업회 발기회의 주도세력은 이종호(李鍾浩)를 지도자고 하고 엄인섭과 김익용을 중견으로 하는 함경도파, 즉 ‘북파(北派)’였다.

북파의 형성은 신민회(新民會)와 관련이 있었다. 신민회의 이종호, 김익용, 윤해(尹海)는 신민회의 정책과 다른 길을 걷게 되면서 독자적인 정치집단을 만들었다. 이에 더해 1910년 6월 시점에 함북회(咸北會)가 비밀리에 회원을 모집하면서 정치 세력으로서 북파가 형성된 것이다.

한편으로 권업회 발기회를 지지한 세력 중 한 축은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청년층이었다. 이들은 ‘청년근업회’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한글신문인 『대양보(大洋報)』를 발행했다. 1911년 7월 16 권업회 발기회 측은 한인 청년들과 서로 협의해 청년근업회와 권업회를 합치기로 결정했다. 이를 계기로 김와실리, 한형권(韓馨權) 등 한인 청년층이 권업회의 임원으로 합류했다. 한인 청년들이 권업회에 참여한 이유는 이들이 한인사회의 분열에 비판적인 태도를 지녔고, 러시아 한인사회의 근대적 계몽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1911년 9월 권업회에 이상설(李相卨)을 필두로 한 서울파, 즉 ‘경파(京派)’가 합류했다. 경파란 미주 국민회(國民會)에서 러시아에 파견한 요인 가운데 공화주의와 입헌군주제에 관한 견해 차이로 평양파, 즉 서파(西派)’와 분리한 정치 세력이다. 한편 북파와 경파는 일찍이 서로 대립했다. 그러나 러시아 지방정부는 이종호의 북파와 이상설의 경파가 서로 화합하여 한인사회를 대표하길 원하여 두 세력 간의 화해를 주선했다. 단순히 러시아 지방정부의 설득만이 아니라 북파와 경파도 한일병합 이후 연합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북파와 경파가 합동한 권업회가 만들어졌다.

권업회가 러시아 지방정부로부터 정식 설립 인가를 받은 이후에는 다양한 세력이 들어왔다. 특히 연해주 곤닷찌(Nikolay Lvovich Gondatti) 총독과 함께 러시아의 여러 관료를 권업회의 명예회원으로 추대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 연해주의 총독이 직접 한인 단체의 회원이 된다는 것은 단체의 공신력을 확정 짓는 의미였다. 러시아 관료들에게 인정을 받은 권업회의 북파와 경파는 각파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여전히 권업회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던 서파가 권업회 활동에 합류하도록 설득했다. 결국, 1911년 12월에 소집된 총회에는 각파의 정치 세력이 흡수되었고, 특히 1912년 4월 총회 때부터는 부의장에 정재관(鄭在寬)이 선임되는 등, 권업회는 연해주 한인 정치 세력을 망라하는 단체가 되었다. 정재관은 미주 국민회에서 파견된 요인 중 하나로 서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이로써 권업회는 명실상부 연해주 한인 3대 세력을 대표하는 단체가 되었다.

3 권업회의 임원과 조직운영

1911년 결성된 권업회의 임원은 크게 총재단, 각 집행부서 책임자, 의사부로 구성되었다. 총재단에는 유인석(柳麟錫), 김학만(金學萬), 최재형, 이범윤(李範允)이 추대되었는데, 이는 명예직이었다. 실질적으로 권업회의 모든 사항을 결정할 권한은 의사부(議事部)에 있었다. 그런데 1912년 11월부터 권업회의 임원조직에 변화가 생겼다. 의장이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회장이란 명칭이 등장했다. 전체적으로 임원의 변동은 초기에 이상설과 이종호 등 정치망명자에 의해 주도된 경향이 있었지만, 1913년 이후부터는 북파 중에서도 토착세력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권업회는 1914년에는 신한촌거류민회(新韓村居留民會)와 합병하여 위생 사무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신한촌의 고유 자치단체였던 거류민회가 권업회에 흡수된 것은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회에 권업회의 영향력이 더욱 촘촘하게 미치게 된 것을 의미한다.

권업회는 폭넓은 지방조직을 두었다. 니콜라예프스크(Nikolaevsk), 하바로프스크(Habarovsk), 노보키예프스크(Novokievsk), 파르티잔스크(Partizansk), 우스리스크(Ussuriysk) 등, 도시와 농촌에서 권업회의 지회가 조직되었다. 그 결과 1914년 7월경에는 지회가 10개에 이르렀다. 권업회의 회원은 창립 시에 300여 명에 불과했지만, 1914년 7월에는 약 10,000여 명까지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권업회의 재정은 회원의 의무금과 의연금으로 충당하도록 했지만, 권업회의 총회 유지와 신문발간 비용은 대부분 이종호가 지원했다. 권업회의 재정지출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은 권업신문의 간행비용이었다. 그 외에 사무실 유지와 직원 보수 등의 순으로 지출이 컸다.

4 『권업신문』을 통한 재러한인의 권익옹호와 민족의식 고취

『권업신문』은 권업회의 기관지였다. 당대 『신한민보(新韓民報)』, 『신한국보(新韓國報)』와 함께 해외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언론이었다. 『권업신문』은 한글 신문으로 1912년 4월부터 1914년 8월까지 약 2년 반 동안 126호가 간행되었다. 『권업신문』은 논설, 각국 통신, 전보, 본국 통신, 잡보(雜報), 단평, 별보(別報), 광고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가운데 잡보는 재러 한인의 동향과 러시아 극동지역 러시아 관료의 동향을 다루었다. 광고에서는 일반 광고 외에도 권업회의 회보를 비롯하여 권업회의 활동에 관한 내용이 실렸다.

『권업신문』의 주필은 신채호(申采浩), 이상설, 김하구(金河球)가 담당했고, 장도빈(張道斌)도 자주 기고를 하였다. 『권업신문』에서 활동한 인물들은 주로 국내외 언론과 관계가 있던 인물들이었다. 신채호는 국내에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황성신문(皇城新聞)』, 러시아에서는 『대양보』의 주필을 역임한 경력이 있었다. 김하구는 『해조신문(海朝新聞)』의 주필을, 장도빈은 『대한매일신보』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었다.

『권업신문』은 권업회가 러시아에 사는 한인을 위해 어떤 활동을 하는지 상세히 알렸다. 예를 들어 『권업신문』은 권업회가 이만(Iman) 지역 일부로 귀화 한인을 이주시켜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한 활동을 게재했다. 『권업신문』은 러시아 국적 취득에 관한 제반 사항을 러시아 한인사회에 알리기도 했다. 권업회는 연해주 지방정부로부터 국적 취득에 관한 사무조사를 위탁받았다. 또한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자를 신문지면 상에 게재했다. 그 외에도 대중도서관 설치 요청, 경제력 향상 강조, 민족의 발전을 위한 자치를 강조하는 글을 실어 권업회가 러시아에서 한인의 권리를 위한 활동을 전개할 때 한인사회에 그 소식을 널리 알렸다.

한편 『권업신문』은 재러 한인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특히 8월 29일 국치일(國恥日, 한일병합)마다 특별호를 간행하여 민족정신을 강조하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그 외에도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활동사진을 상영 홍보, 단군성탄일 경축회, 추석맞이 기사, 한국어 교육 강조 등 러시아지역에서 한인으로서의 정치, 문화, 언어적인 측면에서 민족문제를 꾸준히 다루었다.

5 러시아 이주 50주년 행사계획과 대한광복군정부

권업회는 1914년에 한인의 러시아 이주 50주년을 맞이해 기념대회를 개최하고자 했다. 권업회는 1913년 6월에 기념식을 위해 연해주 총독의 승인을 얻고, 대대적인 준비에 착수하였다. 권업회는 우수리스크에 지방대표위원회를 파견하여 기념식을 1914년 9월에 열 계획이었다. 기념식을 위해 계획한 것이 많았다. 권업회는 포시에트(Posyet)에 알렉산드르 2세, 알렉산드르 3세, 니콜라이 2세의 기념비를 세우고 입비식(立碑式)을 거행하기로 계획했다.

한인 러시아이주 50주년의 역사를 한문과 러시아어로 편찬하기 위해 1913년 12월 동방대학의 포드스타빈(Grigorii Vladimirovich Podstavin) 교수의 집에서 논집을 위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행사계획은 러시아 황제에 대한 충성의 표현, 역사논집 낭독, 역사논집 견본 증정, 러시아국가 제창, 피로연 개최 등으로 이루어졌다. 러시아 황제에 대한 충성 표현과 러시아 국가를 제창하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권업회가 러시아 관료들의 지지를 받았고 러시아지역에서 합법성을 띤 조직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권업회는 50주년 기념회의 명예회장에 포드스타빈 교수, 기념회의 회장에 최재형이 선임되었다.

사실 이 행사는 대한광복군정부의 군자금 확보를 위한 목적도 있었다.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계봉우(桂奉瑀)는 『독립신문』에서 대한광복군정부의 존재를 증언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권업회를 모체로 하여 비밀리에 무장투쟁을 위해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조직의 주도자는 이상설, 이동휘(李東輝), 이동녕(李東寧), 이종호, 정재관이었다. 이들은 중국령과 러시아령에서 대표자 모임을 열었다. 최고 책임자로 초대 정도령(正都領)에 이상설, 제2대 정도령에 이동휘가 선임되었다. 이들은 군대를 비밀리에 편성하였고, 왕칭현(汪淸縣) 뤄쯔거우(羅子溝)에 사관학교까지 설립했다.

이처럼 순조롭게 진행되던 행사는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개최되지 못했다. 행사만이 아니었다. 권업회와 비밀결사인 대한광복군정부는 그 끝을 맞이하게 되었다. 러시아와 일본은 동맹을 맺었고 권업회에서 반일활동을 전개하던 한인들은 일본의 요청으로 러시아에 의해 다른 지역으로 추방당했다.

권업회의 역사적 의미는 러시아에 이주한 한인들을 위해 자치활동만 전개한 것이 아니라 망명자들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기반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표면단체로서 권업회는 직접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없었지만, 권업회를 배경으로 하여 만들어진 대한광복군정부는 일제시기 여러 지역에서 설립된 망명정부의 효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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