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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민의회

러시아에 있었던 또 하나의 임시정부

1919년

대한국민의회 대표 이미지

대한국민의회 선언서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독립기념관)

1 대한국민의회의 조직 과정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 전후 세계질서 개편을 위한 파리강화회의의 개최, 그리고 이러한 세계정세의 변화에 고무받은 국내외 각지 독립운동 세력들의 분주한 움직임을 배경으로 노령(露領)의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 2월 25일 니코리스크에서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중심으로 노령, 간도 및 국내의 대표들을 소집하여 전로국내조선인회의(全露國內朝鮮人會議)를 개최하였다.

이미 전로국내조선인회의가 개최되기 이전부터 이들 노령의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외의 각지 독립운동가들과 긴밀한 연락을 하여왔다. 1919년 1월 하순 전로한족회중앙총회는 『한인신보』 기자인 이흥삼(李興三)을 국내에 파견하여, 한일 합병 후 노령과 간도에서 이동휘 등과 맹렬한 독립운동을 전개한 바 있는 경성의 이종호, 김하석 등과 접촉하여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케 하였다. 또한 간도지역으로부터는 간도대표로서 김약연, 정재면, 정기영, 이중집, 학생대표로서 유익현, 그리고 임국정, 혼춘(琿春) 대표로서는 문병호, 윤동철이 니코리스크에서의 회의에 참석키 위하여 노령으로 파견되었다. 서간도에서도 대표 3명이 파견되어 왔는데 이미 이곳에서는 수천 명의 결사대를 모집하여 놓고 있었다.

상해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으로부터는 여운형(呂運亨)이 노령에 파견되어 왔는데 니코리스크에서는 박은식, 문창범, 조완구, 이승복, 이동녕, 원세훈을,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채성하, 강우규 등을 만나 파리 파견 대표문제를 비롯한 동지규합, 자금조달 등의 독립운동 전반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한편 일본 동경의 유학생들과는 1918년 12월 문창범, 윤해가 이춘숙과 동경유학생과의 통신연락이 있었고 동경유학생 대표가 직접 노령에 와서 문창범을 만났다.

전로국내조선인회의는 새로운 국제정세에 대응하여 노‧중령 내 한인의 의사를 집약하기 위한 회합이었다. 중대한 시국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노령의 한인들은 대회합을 개최하여 의견과 행동의 통일을 꾀하여왔다. 러시아 혁명 후인 1917년 6월에 개최된 전로한족대표자회, 볼셰비키 혁명 직후인 1917년 12월에 개최된 전로한족회중앙총회 창립총회, 그리고 체코군의 반란과 적·백군 간의 내란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던 1918년 6월의 전로한족회중앙총회 제2차 총회는 그 전형적인 예였다. 전로국내조선인회의는 러시아 혁명 후의 이러한 전통에 입각하여 개최된 것이었다. 이와 아울러 전로 국내 조선인회의는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발표, 시위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 방략의 수립, 그리고 이를 추진할 주체로서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조직 등의 현안 문제를 협의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회의 첫날인 2월 25일 전로한족회 중앙총회 상설의회장인 원세훈이 일반국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기관으로서의 대한국민의회에 관한 취지를 발표하였고 15명으로 구성된 상설의회가 임시국민의회의 기능을 담당케 하였는데, 임시국민의회는 전체 한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정식의 대한국민의회가 성립할 때까지 과도기적인 준비기구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대한국민의회 조직에 관한 취지에 입각하여 본격적인 대한국민의회 구성에 착수한 것은 2월 28일 이후였다. 대한국민의회의 발기인 중의 한 사람인 김진(金震)이 노‧중령의 주요 인물들에게 보낸 회의 소집통지서에 따르면 소집일이 2월 28일로 되어있고 이흥삼과 접촉한 바 있는 경성의 이종호가 파견한 김하석 등 국내대표들도 3월 초순에야 노령에 도착하였다. 대한국민의회의 조직을 발기한 주요 인물은 전로한족회중앙총회장인 문창범을 비롯하여 김치보, 김진, 장기영 등이었다.

2 대한국민의회의 대표성

대한국민의회는 전로한족회중앙총회의 확대‧개편의 형식으로 조직되었다. 대한국민의회는 전로한족회중앙총회의 상설의회가 임시국민의회로서 국민의회의 모태기능을 담당하였다는 점에서 전로한족회중앙총회의 후신이었다. 그러나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노령내의 각지에 설치되었던 지방한족회들을 기반으로 한 점에서 노령 한인의 중앙기관에 지나지 않지만 대한국민의회는 중국령으로부터는 간도지역에서 김약연, 정재면, 이중집, 유익현, 임국정, 정기영 등 혼춘지역에서 문병호, 윤동철 그리고 서간도지역 대표 3명이 참석하였고, 국내에서도 김하석 등 수명의 대표가 조직 논의과정에 참여한 점에서 그 대표성이 훨씬 강화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대한국민의회는 독립을 선언한 후에는 일반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임시정부로써 대외문제, 내정, 외교문제를 관장할 조직으로 상정되어 있었다.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 명의의 독립선언서를 내외에 발표함으로써 그 성립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국내외를 통하여 임시정부적 성격을 띤 최초의 조직으로서 대한국민의회가 지닌 의의는 매우 큰 것이다.

3 대한국민의회의 의회제

대한국민의회는 소비에트제를 채용하였기 때문에 단순한 의회 기능뿐만이 아니라 행정, 사법의 기능까지도 통일적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1919년 7월 14일 상해임시의정원에서 통과된, 상해임시정부가 제출한 대한국민의회와의 통합안 중에 ‘의회는 단순히 의사기관만 될 일. 이유 : 아령(俄領) 국민의회는 3종 성질을 구지(具持)하다는 이유임’이라 한 것은 대한국민의회의 소비에트체제적인 조직성격을 잘 드러낸 것이다.

전로국내조선인회의는 대한국민의회 의장에 문창범(한족회중앙총회회장), 부의장에 김철훈, 서기에 오창환을 선출하였다. 의장은 대한국민의회의 권위를 대내외적으로 대표하여 대외적인 문제와 내정‧외교를 관장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노령의 한인들이 의장인 문창범을 대통령으로 별칭하였으며 대한국민의회의의 외곽단체인 노인단도 그를 대통령으로 추칭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대한국민의회가 차지하고 있었던 임시정부적인 중앙기관으로서의 위치를 말하여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대한국민의회는 상설의원 30명과 통상의원 4, 50명으로 구성되었다. 의원이 상설의원과 통상의원으로 구분되어 있었던 점으로 보아 상설의원들의 의회기구인 상설의회가 대한국민의회의 조직 구조 내에 설치되었을 것이라 보여진다. 이런 추정은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창립당시 총회 내에 의원회를 두고 있었고 1918년 11월 중앙총회내에 한족상설의회를 두어 총회의 기능을 대행케 한 사실에서 뒷받침된다. 상설의회의 기능도 전로한족회중앙총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총회 휴회 중에 총회의 고유기능인 최고의사결정기관의 기능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말하자면 상설의회는 소비에트제하에서의 중앙집행위원회에 해당하는 위치를 점했을 것이다.

상설의원의 수는 처음에는 한족회중앙총회 상설의원회와 마찬가지로 15명이었으나 김하석의 제안으로 평안도 출신 5명, 기호출신 5명 등으로 더하여 30명으로 증가되었다. 이것은 다분히 함경도 출신 중심의 상설의원회 구성을 완화해 명실상부하게 대한국민의회의 대표성을 강화하려는 의도라 보인다.

4 대한국민의회의 중앙조직과 지부

성립 당시 대한국민의회의 집행부서로는 선전부, 재무부, 외교부의 3개 부서가 있었다. 선전부는 이동휘가 부장으로 독립군 조직을 담당하였다. 선전부는 3월초 전로국내조선인의회에서 결의한 3단계 독립운동 계획 중 제2운동인 무력시위운동을 추진하게 될 담당부서로서 추풍(秋風) 다아재골에 독립군 근거지를 두고 나자구(羅子溝)에 군사교육부를 설치하여 독립군의 군사훈련을 맡게 하였다. 또한 집행위원회를 선정하여 부서를 정하였는데 지휘관에 이용, 접제원에 최병준, 황원오 등, 군자금 모집에 오주혁, 박군천, 재정 출납을 맡아보는 주계(主計)에 김립, 이중집으로 하였다. 선전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군의 구성은 나자구의 사관학교 출신 생도, 홍범도 부대, 홍춘 지역의 황병길, 이명순, 최경천 등이 이끌고 온 군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재무부는 기부금 모집에 의한 독립운동자금의 조달임부를 담당하였고 부원으로 간도에서 온 박경철이 활동하였으며, 외교부는 무기조달을 위하여 볼셰비키와의 교섭임무를 담당하였는데, 역시 간도에서 활동하였던 박동진이 부원으로 활동하였다. 성립 당시 대한국민의회의 재무부장과 외교부장이 누구였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이상과 같은 대한국민의회의 중앙조직은 3월 초순 전로국내조선인회의에서 대체로 정비되었다고 보인다. 한편, 대한국민의회의 각 지부도 조직되었다. 노령 내의 각 지방조직은 전로한족회중앙총회의 지방조직이었던 지방한족회가 그 역할을 계속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간도, 혼춘 및 국내의 지부는 3월 17일 독립을 선언한 이후에야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먼저 4월 23일 이동휘, 이범윤(李範允), 진학신이 참가한 가운데 국내진입전의 전초기지가 될 혼춘의 탑도구(塔道溝)에서 회합하여 대한국민의회 혼춘지부를 결성하였으며, 5월초에는 간도의 명동학교에 간도지부가 조직되었다. 또한 정확한 결성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국내에도 경성 대한국민의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또한 독립선언 이후 대한국민의회와 긴밀한 협력관계에 있었던 주요 외곽단체들이 조직되었는데, 1만 명의 결사대 모집을 위해 김하석이 조직한 한족독립기성총회(韓族獨立期成總會)를 비롯하여 농니단(단장: 김치보, 주요인물: 이발, 홍범도, 박은식, 강재구), 부인독립단(주요인물: 이의순, 채규복, 이혜근), 청년동지회(김진, 김하석) 등이 그것이다. 외곽단체는 아니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 근거를 둔 유력한 조직으로는 한인사회당과 신민단이 있다. 1918년 6월 창당되었으나 백위파 정권의 수립으로 실질적인 해산상태에 빠져있던 이동희, 김립 등의 한인사회당은 역시 같은 사회주의 단체로 3월 독립선언 후 혼춘에서 조직된 무장단체 신민단과 합동하여 4월 25일 한인사회당대표회의를 개최하여 보다 강화된 한인사회당으로 재창당되었다. 신민단은 단장인 김규면이 니코리스크에서 이동휘와 회동한 후 그의 권고에 따라 중국 관헌의 단속이 심해진 혼춘지역을 떠나 5월초 블라디보스토크로 본부를 이전하였다. 한인사회당과 신민단은 이후 대한국민의회에 대한 강력한 견제세력으로서의 위치를 다져나가게 된다.

5 대한국민의회의 조직개편

대한국민의회는 성립 이후 소멸될 때까지 몇 차례의 조직개편을 겪었다. 대한국민의회의 조직개편은 개편 당시 노령지역의 정치적 상황은 물론 당시 국내외 각지 한인독립운동의 전개양상과 밀접한 관련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상의 조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한국민의회는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조직된 귀화인 중심의 전로한족회와 이를 바탕으로 비귀화인까지 망라한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확대‧개편된 조직이었다.

둘째, 대한국민의회는 소비에트제를 채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한 의회기능 뿐만 아니라 사법‧행정의 기능까지도 통일적으로 공유한 조직구조를 가졌다.

셋째, 대한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있었던 중심인물들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전로한족회와 전로한족회중앙총회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온 귀화인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러시아 혁명 후 볼셰비키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1918년 6월의 제2차 전로한족회중앙총회에서 중앙총회의 친볼셰비키적 개편을 시도한바 있는 이동휘 등 비귀화인 중심의 한인사회당 계열이었다.

넷째, 대한국민의회의 구성인물들은 대부분 함경도 출신으로 이것은 노령한인사회의 형성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상해임정과의 통합교섭과정에서 상해임정측은 대한국민의회의 이러한 지역 편중성을 지적하여 대한국민의회가 한민족 전체를 통치함에는 적당하지 못하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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