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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

이승만을 중심으로 미주지역에서 한인의 목소리를 내다

1921년

대한인동지회 대표 이미지

대한인 동지회 북미 총회 회관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는 1921년 7월 미국 하와이(Hawaii) 호놀룰루시(Honolulu)에서 이승만(李承晩)이 주도하여 만든 단체다. 1920년대 초 이승만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조직된 이승만의 강력한 사조직이었다. 총재인 이승만이 강력한 권한을 지녔으며 동지식산회사(同志殖産會社)를 설립하여 경제적 활동을 꾀하였으나 재정난으로 실패하였다. 그 후에 미주지역 한인의 연합운동에 참여하였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북미지역에서도 외세를 확장하였다.

2 이승만의 정치적 위기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둘러싼 제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독립운동 세력 내에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과 이를 둘러싼 서북·기호 지방의 지방열(地方熱), 그리고 국무원들 간의 불신과 갈등이 빚어지고 있었다. 그 외에도 조직정비와 재정확보가 문제가 되었고, 향후 독립운동의 방략을 둘러 임시정부 요인들 간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퇴진에 앞장선 이동휘(李東輝)를 중심으로 한 한인공산주의 세력이 이승만의 적대세력으로 부상했다. 볼셰비키 정부로부터 200만 루블의 자금지원을 약속받고 그 중에 40만 루블의 자금을 받아와 임시정부 내에서 이동휘 중심의 한인공산주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또한 박용만(朴容萬)이 베이징(北京)을 중심으로 반(反)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세력을 조직하여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더욱 수세에 몰렸다. 박용만은 1920년 9월 베이징(北京)에서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발족하고, 1921년 4월 19일 군사통일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연해주와 북만주에 흩어져 있는 무장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개혁과 이승만의 타도에 주력했다.

한편 미국에서 이승만의 협력관계이자 경쟁상대였던 안창호(安昌浩)가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부와 상하이 정계에서 강한 힘을 발휘했다. 안창호는 흥사단(興士團)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를 확장했으며 『독립신문』의 임원을 자신의 측근으로 구성할 정도였다.

그 외에도 1921년 2월 초에 상하이에 있던 박은식(朴殷植)·김창숙(金昌淑)·원세훈(元世勳) 등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개혁을 위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소집을 공개적으로 요구하여, 상황은 점점 이승만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기본적으로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개혁하기보다는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는 쪽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러한 현상유지 방안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을 지지해줄 강력한 친위단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21년 6월 29일 이승만은 하와이로 돌아오자마자 동지회에 설립에 착수했다. 한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하와이지방총회는 1921년 2월 9일 대한인하와이교민단(大韓人하와이僑民團)으로 명칭을 바꾸고 이승만이 확고한 지지세력이 되어갔다. 이때 하와이 교민단의 회장으로 민찬호(閔贊鎬)가 선임되었다. 이승만이 대한인동지회를 설립한 이유는 대한인하와이교민단은 적극적인 정치 활동에 적합하지 않았으며 형식상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시를 받기 때문이었다. 또한 다양한 정치적 견해와 혁명 방략이 분출하고 있던 상하이 시절의 경험에 따라 강력한 조직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3 대한인동지회의 설립목적과 조직구성

『대한인동지회의 규정에 따르면 대한인동지회의 설립목적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옹호하여 대동단결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결속하기 위한 대외명분용 성격이 강했다. 대한인동지회의 조직 구성원을 주무원·서기·재무 등 3인의 직원으로 둔 것은 운영의 주체를 이승만으로 하며 그를 위한 지원용 체제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설립 초기 대한인동지회에서 활동한 인물로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장을 역임한 이종관(李鍾寬)이 주무원으로 활동했으며 그 밖에 안현경(安顯京), 최살로매 등이 참가했다. 또한 하와이 초대 교민단장인 민찬호는 1922년 2월까지 대한인동지회 재무를 맡았다.

1913년부터 이승만에 의해 발간되었던 『태평양잡지(太平洋雜誌)』는 월간잡지로서 발간되었으며 1921년부터는 대한인동지회의 기관지 역할을 하였다. 1930년 12월부는 『태평양주보(太平洋週報)』로 제호를 바꾸고 주간지로 발간되었다.

한편 대한인동지회는 1924년 11월 17일부터 20일까지 호놀룰루에서 하와이 한인 대표회를 개최하면서 조직과 운영을 크게 강화했다. 이때 대한인동지회 3대 「정강」이 제정되었다. 이것에 드러난 대한인동지회의 성격은 세 가지다. 첫 번째, 대한인동지회의 정신적 뿌리가 3·1 운동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두 번째, 단체 행동과 상명하복 시스템을 강조하여 일사불란한 체제를 만들고자 했다. 세 번째, 대한인동지회의 활동을 통해 정치 활동만이 아니라 경제적 능력을 배양하려고 했다. 즉 대한인동지회는 총재인 이승만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달성하기 위한 정치단체의 속성과, 회원들의 경제생활을 배양하기 위한 자치단체의 성격을 동시에 지녔다.

한편 대한인동지회는 지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하와이를 중심으로 각 지회가 설립되었고 상하이와 북미까지 그 조직을 확대했다. 대한인동지회 상하이 지회는 1925년 초에 설립되었다. 상하이 지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직에서 면직된 이승만에게 정치적 후원세력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미지역에 설립된 최초의 지회는 뉴욕(New York)이었다. 뉴욕지회는 1928년 1월 2일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초대 회장은 이봉수(李鳳秀)가 맡았다.

4 경제활동의 좌절 후 연합운동 참여

이승만은 대한인동지회의 경제활동으로서 동지식산회사를 설립하고 운영했다. 1925년 12월 13일 동지합자회사(同志合資會社)를 동지식산회사로 바꾸고 부동산 매매와 도로건설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 이를 위해 동지촌(同志村)을 건립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동지식산회사의 운영은 순탄하지 않았다. 자본과 경영능력이 부족했다. 이승만은 동지식산회사의 재정난을 극복하고자 1929년 말부터 북미지역을 순방하며 자금 확보를 시도했으나 경제 대공황의 영향으로 실패했다. 결국 1931년 4월 동지식산회사는 문을 닫고 말았다. 동지식산회사의 파산으로 경제적 자립과 동지촌 건설이 패하여 결국 대한인동지회의 한 축인 자족자급을 통한 경제운동이 꺾이고 말았다.

1930년 7월 15일부터 21일까지 호놀룰루에서 동지미포대표회(同志美布代表會)가 개최되었다. 이승만은 대한인동지회의 부흥과 역량집중을 위해 동지미포대표회의를 개최했다. 그러나 하와이 교민단은 대한인동지회의 세력확대와 교민단 역할 축소에 반발하여 이승만과 충돌했다. 또한 교민단은 이승만이 동지식산회사의 실패를 만회하려고 교민단을 대한인동지회에 합쳐 교민단의 재산을 처분하려 한다고 의심하여 양측의 법정소송으로 비화되었다. 두 단체의 대립은 인신공격, 폭력 행사, 재판으로 이어졌다.그 결과 ‘재미 한인의 치명적 상처와 민족적 치욕’이라고 할 정도로 이미지가 실추되었다. 양측이 분쟁으로 소모한 재정만 2만 달러에 달했다.

하와이 한인사회의 분란이 가속화되자 이승만은 일본의 만주침략을 계기로 1931년 11월부터 1935년 1월까지 미국 본토와 유럽 등지에서 외교활동을 전개하고자 하와이를 떠났다. 이처럼 동지미포대표회의 이후 대한인동지회는 외형적으로는 조직을 확대했지만 실제로는 하와이 교민단과의 갈등과 분열로 위축되었다.

대한인동지회는 이 위기를 타개하고자 1931년 12월 14일 중앙부 이사회의를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옹호하는 쪽으로 위치를 굳혔다. 또한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에 집중하여 이승만만의 외교적 후원을 강화하기로 했다. 이어서 대한인동지회는 해외 한인의 정치적 대단결을 촉구하고 대외활동을 강화하며 점차 세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한편 대한인동지회는 1933년 제단체 연합운동을 추진하여 1933년 4월 9일 하와이 한인연합협의위원회(韓人聯合協議委員會) 설립했다. 대한인동지회는 이 조직을 통해 1930년대 중반 이후 하와이 한인사회의 중심적인 단체로 성장했다. 1944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의사부에서 조사한 회원수를 보면 대한인국민회가 650여 명, 대한인동지회가 650여 명으로 대한인동지회의 회세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대등한 수준이었다.

1935년부터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대한인동지회와 대한인국민회 사이에 합동운동이 일어났다. 1937년 8월 중일전쟁 발발 후 합동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양자가 함께 행보를 같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38년 9월에는 “동지, 국민 양회의 합동을 위하여”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결국 총회장 투표방식을 둔 의견 차이로 합동운동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경험으로 대한인동지회는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지지 여론을 확보하였고 안정된 조직을 구축하게 되었다.

1940년 11월 5일 대한인국민회와 대한인동지회의 대표가 하와이에 모여 합동준비위원회를 열고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사실상 미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세 단체, 즉 북미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대한인동지회 등 세 단체가 이 대회를 주도했다. 결국 1941년 4월 20일부터 29일까지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가 개최됐다. 이 때 공동 의제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힘을 결집하여 광복사업을 촉성하고, 정치·군사·외교 운동과 경제적 후원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대한인동지회가 집중한 것은 외교사업이었다. 이때 외교사업을 두고 중한민중동맹단(中韓民衆同盟團)의 한길수(韓吉洙)도 이미 1938년부터 미국 정부와 국회를 대상으로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반면 동지회의 이승만은 1939년부터 구미위원부를 통해 외교활동을 추진했다. 동지회는 해외한족대회에서 이승만 1인으로 한정하여 외교사업을 독점하려고 했다. 이때 중한민중동맹단과 견해 차이가 발생했지만, 북미 대한인국민회의 조정으로 이승만 1인의 외교업무가 결정됐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결성된 후 동지회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후 이승만은 재미한족연합회와 주미외교위원부 문제를 두고 갈등을 겪었다. 이에 재미한족연합회는 이승만에 대한 재정지원을 중단했다. 결국 이승만은 대한인동지회를 재미한족연합회에서 완전히 분리시키기로 했다. 비록 하와이 대한인동지회 내부에서 재미한족연합회 탈퇴반대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결국 1943년 12월 5일 탈퇴가 결정됐다. 그 여파는 컸다. 대한인동지회 중앙부에서 이승만 지지파와 대한인국민회 지지파로 분열됐다. 이승만은 종신 총재로 추대되었고, 중요사안의 결정권과 인사권은 총재에게 귀속되었다. 회원의 의무는 이승만의 지도를 준행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대한인동지회의 중심에는 늘 이승만이 있었다. 대한인동지회는 해방 이후에도 조직을 그대로 유지하며 이승만의 국내 정치활동을 지원하였다.

5 2차 세계대전 이후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의 역할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로 미주한인의 활동 근거지는 하와이가 아니라 미국 본토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하와이에 중심을 둔 대한인동지회 중앙부만으로는 대한인동지회의 활발한 활동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런 정세 속에서 미국 본토의 대한인동지회 지부들은 새로운 방안을 모색했다. 1942년 6월 18부터 20일까지 북미 대한인동지회 지부들은 시카고(Chicago) 지부의 주최로 북미동지대표회를 개최했다. 그 결과 북미동지회 총지부라는 통합체를 결성했다. 다만 분열이나 대항의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최고의 권위와 지령은 하와이 대한인동지회 총회에서 통제할 것이라 밝혔다.

대한인동지회는 북미동지회 총지부의 결성을 계기로 하와이를 넘어 북미지역까지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위상이 제고된 북미지역 대한인동지회는 대한인국민회와 반목과 협조를 거듭하며 이승만의 강력한 후원세력이 되었다.

1943년 동지회는 기존의 북미동지회 총지부를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로 개명했다. 그리고 기관지 『북미시보(北美時報)』를 발행했다.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는 대한인동지회 중앙부와 달랐다. 우선 유기명의 민주적인 방식으로 선출하는 총회장 체제를 만들었다.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의 결성 결과, 북미지역 동지회는 크게 회세가 확장되었다. 그리고 1945년 5월 26일 제1회 동지회 미포대표회(米布代表會)를 개최하여 대한인동지회 명칭을 대한민주당(大韓民主黨)으로 개정하기로 했다. 해방 이후 독립국가 건설을 담당할 체제를 위해 정당체제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비록 하와이 대한인동지회 중앙부의 다른 회원들의 동의를 얻지 못해 대한민주당으로의 명칭 개정은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움직임 자체는 기존에 하와이의 중앙부 중심으로 운영되던 대한인동지회가 북미총회 중심으로 힘이 이동해 갔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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