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근대
  • 대한천일은행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

대한제국의 금융근대화를 담당하다

1899년(고종 36)

대한천일은행 대표 이미지

대한천일은행 설립인가서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광무정권(光武政權)은 일본 화폐의 도입을 저지하고 국가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백동화(白銅貨, 액면가 2전 5푼의 동전)의 발행고를 늘렸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광무정권이 추구하던 금융근대화의 장애가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백동화의 유통을 보장할 수 있는 은행과 이를 효과적으로 운영할 실무자가 있어야 했다. 한편 마차(馬車)주식회사를 중심으로 성장하던 서울 상인들은 자신들의 후원자였던 독립협회 정동파(貞洞派, 미국, 러시아, 영국 등과 가까웠던 정부 관료들의 무리)의 실권(失權)을 실감하면서 새로운 정치적 후원자가 필요했다. 황실과 상인의 이해관계는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로써 상인은 은행을 통해 자본의 안정적인 융통을 도모할 수 있었고, 황실은 백동화의 유통 지역을 자연스럽게 확대할 수 있었다. 대한천일은행은 지속적으로 성장세를 보였지만, 통감부의 화폐 정리사업으로 백동화가 퇴출되면서 존립 위기를 겪었다. 이후 일제는 대한천일은행을 식민지금융기관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1909년에 최대 주주가 황실에서 탁지부로 바뀌었으며, 1912년에는 조선상업은행(朝鮮商業銀行)으로 개칭하면서 식민지금융기관으로 완전히 탈바꿈되었다.

2 광무정권의 금융근대화가 시작되다

근대적 금융기관으로서 은행의 필요성은 한말부터 대두되었다. 갑오정권은 완전한 화폐경제로의 전환을 위해 조세금납화(租稅金納化)를 실시하였지만, 은행의 설립을 보지 못하고 물러났다. 1896년에 조선은행(朝鮮銀行), 1897년에 한성은행(漢城銀行)이 설립되지만, 이는 정부의 금융정책으로 파생된 결과물은 아니었다. 1899년 설립된 대한천일은행은 광무정권의 금융정책과 금융기관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한말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대한천일은행의 설립을 둘러싼 정치적·사회적 조건은 1898년부터 만들어지고 있었다. 광무정권은 일본 화폐의 진출을 저지하는 동시에 국가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1898년부터 백동화 발행고를 급격하게 증가시켰다. 이로 인해 발생한 인플레이션은 백동화의 유통 지역을 확대하고 중앙은행을 설립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한편 마차주식회사를 중심으로 하는 김두승(金斗昇)·김기영(金基永) 등의 서울 지역 상인들은 자신들의 후원자였던 독립협회 정동파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해 가는 상황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광무정권은 금융근대화를 담당할 실무자가 필요했고, 상인들은 새로운 정치적 후원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광무정권으로서는 상인들의 신뢰도를 확인하기 위해 정동파에 해당하는 안경수(安駉壽)·이완용(李完用)·이채연(李采淵)·이용익(李容翊) 등과 접촉할 필요성도 있었다.

상인과 황실은 상호 간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확인한 상태에서 은행 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1899년 1월 22일, 상인들은 ‘화폐유통은 상무흥왕(商務興旺)의 본’이라는 취지의 청원서를 탁지부 대신에게 제출하였다. 이어 1899년 1월 29일에 34명의 발기인 총회가 개최되면서 대한천일은행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발기인은 황실 측근과 관료, 상인으로 이루어졌다.

심상훈(沈相薰), 민병석(閔丙奭), 민영기(閔泳綺), 유기환(兪箕煥), 최문식(崔文植), 이근호(李根澔), 이인우(李寅祐), 이한영(李漢英), 민병한(閔丙漢), 조동윤(趙東潤), 이기동(李基東), 김용호(金龍浩), 이근용(李根鎔), 송문섭(宋文燮), 최영하(崔榮夏), 최석조(崔錫肇), 장봉환(張鳳換), 최문식(崔文植), 박경환(朴敬煥), 정영두(鄭永斗), 김두승(金斗昇), 김기영(金基永), 김영호(金榮浩), 길영수(吉永洙), 강상원(姜相騵), 장운택(張雲澤), 김동숙(金東肅), 장석운(張錫運), 김용호(金龍浩), 김교홍(金敎鴻), 고규진(高圭晋)

3 광무정권의 금융정책을 뒷받침하다

대한천일은행의 성립 과정은 향후 운영이 광무정권과 밀착되어 진행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미 「정관」 자체가 정권과 매우 친화적이었다. 예를 들어 제5조는 은행의 자본금을 5만 6천 원으로 하고, 이를 112금(衿)으로 나누어 1금에 500원임을 명시하고 있다. 조선은행과 한성은행에 비해 10배나 비싼 1금의 금액은 주주의 자격을 제한하는 조건으로 작동했다. 실제로 대한천일은행의 주주는 대부분 황실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자들이었다. 또한 제6조에는 궁내부와 정부의 금주(衿主) 자격을 명시하면서 “본 은행을 보호하기 위해 약간의 금액을 대여”할 것을 정하고 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조항으로 대한천일은행과 다른 은행 간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천일은행은 설립되자마자 한성은행으로부터 조세 운송 특권을 넘겨받았다. 「정관」 제18조는 대한천일은행이 “정부의 사정에 따라 각 항구 및 각 부군에 있는 공전(公錢)의 운송을 담임”할 것을 명시했다. 대한천일은행은 전국 329개의 군 중에 205개 군에서 조세를 운송하였으며, 각 도마다 차이는 있지만 충남과 전남에 속한 군들이 가장 많이 이 은행에 조세를 납부하였다. 이는 ‘공전’의 취급 주체가 상인에서 은행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인데, 여기에는 일정한 과도기적 성격도 있었다. 예를 들어 1899년 대한천일은행에 조세를 납부한 100여 명의 ‘세납차인(稅納差人)’ 중에는 육의전이나 종로, 마포 등지에서 활동하던 상인이 많이 있었다. 이는 상인들이 조직적으로 은행의 조세 운수에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행원이 전담하기 이전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4 광무정권의 통화정책을 뒷받침하다

대한천일은행의 경영진은 황실부터 상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본점의 임원을 예로 들면, ①영친왕·이용익·민병석 등, 왕실과 그 측근 관료, ②김기영·홍정섭(洪正燮) 등의 개성상인, ③조진태(趙鎭泰)로 대표되는 시전상인과 김두승 등의 경성상인, ④김종례(金宗禮)로 대표되는 인천 객주로 구분할 수 있다. 다만 은행을 실질적으로 운영한 이는 탁지부 재무관 및 전환국 관료 출신이자 이용익의 측근이기도 했던 최석조였다. 한편 대한천일은행의 하부 조직인 차원(差員), 서기, 사동(使僮)은 개성상인의 사용인체계를 본 뜬 것이다. 각종 문서의 양식도 개성상인의 것을 준용하였는데, 이는 근대 이전의 상업조직이 은행의 회계에 적용된 사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광무정권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대한천일은행에 자본과 운영자금을 제공하였다. 첫째, 정부 부서의 국고나 황실 재정 등이 대한천일은행 예금고의 주를 이루었다. 둘째, 전환국이 자금을 직접 지원하였다. 특히 은행 경영에 깊숙이 관여한 최석조가 전환국을 관장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대한천일은행의 환전영업에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은행이 매입한 지전(紙錢)을 매번 재매입함으로써 환전 손실의 가능성을 최소화하였다. 이는 대한천일은행의 지전 매매가 지니는 성격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은행은 시중의 지전을 구입할 때, 그에 걸맞은 백동화나 백동화로만 결제되는 은행수표를 지출하였다. 이는 대한천일은행이 백동화의 유통을 확대하려는 광무정권의 정책을 뒷받침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대한천일은행은 조선 상인들에게 다액의 상업자금을 지원하였다. 이는 조선 상인들이 청과 일본의 상인들과 대항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자금을 지원받는 상인들은 대상(大商)이나 신용이 높은 도고상인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조선 상인을 향한 자금 융통은 계속 증가하였으며, 이로 인해 은행의 수익금도 크게 늘어났다.

5 식민지금융기관으로 바뀌다

대한천일은행의 성장세는 1904년 러일전쟁 이후 급격히 쇠퇴하였다. 게다가 1905년부터 통감부가 실시한 ‘화폐정리사업’의 목적이 백동화를 시장에서 퇴출하는 것이었으므로 은행의 존립 이유가 매우 흔들렸다. 1905년 6월, 대한천일은행의 휴업은 통감부의 압력으로 광무정권의 금융근대화가 실패한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이후 대한천일은행은 ‘화폐정리사업’에 따른 화폐·금융공황을 타개한다는 명목으로 1906년 7월부터 영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

통감부는 주주 구성에 관여하여 일본인의 비중을 높이는 등, 대한천일은행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갔다. 1909년에는 은행이 자본금을 15만원에서 50만원으로 증자하는 과정에서 신주(新株) 2,385주를 탁지부 대신이 인수하였고, 이로써 황실이 아닌 탁지부가 은행의 최대주주가 되었다. 1912년 2월 11일, 명칭을 조선상업은행으로 변경하면서 식민지금융기관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1924년에는 조선실업은행과 합병하였으며, 1950년에 한국상업은행이 되었다. 1999년 한일은행과 합병하여 한빛은행이 되었으며, 2002년 5월부터는 우리은행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