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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

내정 개혁을 주장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다

1896년(고종 33)

독립협회 대표 이미지

독립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백정조차도 자기 뜻을 밝히는 세상

1898년 10월 28일 종로 거리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개최되었다. 백정 박성춘이 연단에 올라 “이 사람은 바로 대한에서 가장 천한 사람이고 매우 무식합니다. 그러나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일장연설을 시작하였다. 백정은 도축을 도맡아 하는 신분으로 조선시대에는 천대받던 사람들이었다. 이제 이런 사람들조차도 당당히 나서서 나라 일에 대해 자기 뜻을 펼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것은 독립협회였다. 독립협회는 애초에는 독립문 건립을 위한 일종의 추진위원회로 출범하였지만 그 후 계몽단체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가 이제 정부의 시책을 비판하는 정치단체가 된 셈이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거듭 개최하여 정부를 공격했으며 결국에는 대한제국 정부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2 서재필이 벌인 ‘독립’ 캠페인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국외로 망명했던 서재필(徐載弼)이 10년 만에 필립 제이슨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시민이 되어서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 후 『독립신문』 창간, 독립문 건립, 독립협회 조직 등 일련의 ‘독립’ 캠페인을 벌였다.

그가 귀국하면서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독립신문』의 창간이었다. 그는 1896년 1월 당시 내부대신이었던 유길준(兪吉濬)과 신문사를 설립한다는 것에 합의하였고 정부의 예산 지원을 약속받았다. 신문사 설립 계획은 아관파천의 영향으로 유길준이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일시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후 들어선 박정양(朴定陽) 내각이 설립자금 3천원을 계속 지원하기로 하여 신문사를 설립할 수 있었다. 창간호는 1896년 4월 7일 발행되었는데 타블로이드크기로 모두 4면이었으며 3면까지는 국문으로 4면은 영문으로 인쇄되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에 이어 독립문 건립도 제의하였다. 그 취지는 과거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의 뜻을 만천하에 떨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안에 따라 독립문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이 시작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호응하였다. 독립문은 이렇게 거두어진 돈으로 세워질 수 있었는데 고종도 내탕금에서 거액을 지원하였다.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이 거행되었으며 이후 약 1년간의 공사 끝에 이듬해 11월 20일 완공되었다. 완공일은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직후로서 대한제국 선포를 축하하는 이벤트의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서재필이 벌인 ‘독립’ 캠페인의 마지막 정점은 독립협회였다.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조직되었는데 이것도 서재필이 제의한 것이었다. 독립협회는 당초에는 독립문 건립을 위한 추진위원회로 결성되었는데 서재필은 당시 미국인 신분이었으므로 전면에 나서지는 못하고 고문의 역할을 하였다.

독립협회는 창립 초기 건양협회와 정동구락부를 중심으로 한 고위관리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집행부는 안경수(安駉壽) 회장, 이완용(李完用) 위원장, 김가진(金嘉鎭), 이상재(李商在) 등 8명의 위원, 송헌빈(宋憲斌), 남궁억(南宮檍), 오세창(吳世昌) 등 10명의 간사원으로 구성되었다.

건양협회는 갑오개혁에 참여했던 관료그룹 가운데 아관파천 이후 살아남은 멤버들이며, 정동구락부는 외교 업무에 종사한 관료그룹으로 구미세력과 왕실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보수적 근왕세력과 권력을 분점하면서 정계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독립협회는 이렇게 고급관료의 사교모임으로 출발하였다. 하지만 독립문 건립자금을 모금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따라 회비를 납부하는 사람에게는 모두 회원 자격을 부여하였다. 이에 따라 향후 회원 구성이나 성격이 변화할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다.

3 계몽단체로 바뀐 독립협회

독립협회는 조직된 지 1년 여가 지난 1897년 여름부터 계몽단체로 성격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방금 유럽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윤치호(尹致昊)였다. 그는 1897년 7월 25일 귀국하여 독립협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독립협회에 강의실, 독서실, 박물관을 갖춘 계몽단체로 발전시킬 것을 제의하였다. 독립협회에서는 이러한 제의를 받아들였으며 협회의 직원 가운데 도서를 관리하는 사적(司籍)이라는 직책을 두기까지 하였다.

독립협회는 같은 해 8월 8일에 열린 통상회에서 앞으로 정기적으로 토론회를 개최할 것을 결정하였다. 당시 독립협회가 토론회를 개최한 목적은 회원들에게 공중연설(public speaking)을 훈련시키고 회의(public meetings) 의사진행 방법을 익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윤치호와 마찬가지로 미국파인 서재필도 이미 이전부터 배재학당에서 학생들로 하여금 협성회란 이름의 토론회(Debating Society)를 조직하여 운영하도록 지도한 경험이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독립협회에 확대 적용한 셈이다.

첫 번째 토론회는 8월 29일 개최되었다. 토론의 주제는 ‘조선의 급선무는 인민의 교육’이었다. 이 토론회에서는 미리 양편을 정해 주어진 주제에 대해 토론을 진행하였다. 이후 정기적으로 토론회가 개최되어 모두 34회의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토론회에서 다루어진 주제는 신교육진흥, 산업진흥, 미신타파, 위생, 치안 등 계몽적인 주제부터 시작되었지만 1897년 연말부터는 점차 외교, 국가재정, 의회설립, 민권 등 정치적인 주제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독립협회의 성격이 변화하면서 조직구성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독립협회의 창간을 주도했던 고급관료층은 점차 이탈하기 시작했으며 대신 신지식층이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협성회, 광무협회 등 학생 단체들의 활동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4 민회를 열어 정부를 비판하다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일 종로 거리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여러 사람이 연단에 올라 정부의 시책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당시 쟁점이 되었던 이슈는 대외정책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한러은행 설립, 재정고문 파견, 절영도 조차 등 대한제국에 대해 적극적인 정책을 펴고 있었다. 독립협회에서는 만민공동회를 열어 당시 정부가 러시아의 공세에 끌려다니고 있다고 공격한 것이다. 이러한 독립협회의 공세가 주효하였던지 러시아가 추진했던 정책은 모두 보류되었다. 이렇게 첫 번째 만민공동회가 성공하자 이후에도 쟁점이 생길 때마다 집회를 개회하여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의미로 만민공동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지만 줄여서 ‘민회’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민회는 그야말로 가두 대중 집회로 진행되었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시전거리에서 처음 열렸으며 나중에는 경운궁의 정문인 대안문 앞으로 옮겨서 열기도 하였다. 민회는 가두 대중 집회인 만큼 독립협회 회원뿐 아니라 일반인도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었다.

민회가 열리면 연단이 마련되어 여러 사람들이 그곳에 올라가 연설을 하였다. 미리 준비된 연사도 있었지만 즉석에서 연단에 올라 자신의 뜻을 펼치는 사람도 있었다. 말로 연설을 하는 만큼 글을 모르는 사람도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었다. 백정 박성춘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연단에 올라갔던 것이다. 당시 백정뿐 아니라 나이 어린 학생들도 연단에 올라갈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교육자인 장응진(張膺震)은 민회가 열릴 당시 자신은 영어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학생을 대표하여 연단에 올라 여러 대신들을 앞에 세워놓고 일장연설을 하자 몇 만 명 군중이 박수갈채를 보냈다고 회고하였다.

독립협회는 민회를 개최하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다. 조직 구성에도 변화가 있었다. 우선 관료층이 대거 물러났다. 정부의 고관들이 정부에 비판적인 단체에 몸담고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임원진도 바뀌었다. 회장 이완용, 부회장 윤치호, 서기 남궁억, 회계 이상재와 윤효정(尹孝定), 제의(提議) 정교(鄭喬), 양홍묵(梁鴻默), 이건호(李建浩), 사법위원에 안영수(安寧洙), 강화석(姜華錫), 홍긍섭(洪肯燮) 등 개혁파 중심체제로 전환하였다.

이 가운데 한 사람인 이완용은 첫 번째 민회가 열린 다음날인 3월 11일 전라북도관찰사에 임명되자 임지로 떠나버렸다. 사실상 독립협회 회장직을 사퇴한 것이다. 독립협회는 할 수 없이 부회장 윤치호를 회장대리로 선출하였다. 5월 4일에는 고문으로 있었던 서재필이 정부의 압력으로 부득이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협회가 개혁적이 되면서 점차 대한제국 정부와 각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5 깨져버린 의회 설립의 꿈

독립협회는 1898년 10월 28일 대규모 민회를 개최하였다. 정부 대신들을 참석시켰기 때문에 이 민회를 다른 여타의 민회와 구별해서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라고 부르기도 한다. 독립협회는 이 자리에서 헌의육조를 제시하였고 참석한 대신들도 이에 동의하였다. 헌의육조의 핵심적 내용은 국정 운영에 백성들의 뜻을 반영하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민회가 개별적인 이슈를 넘어서 국정 운영 방식 자체까지 거론하기 시작한 것이다.

독립협회에서 이렇게 공세적으로 나온 배경으로 9월 11일에 일어난 이른바 김홍륙독다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보수파 내각은 연좌법을 비롯한 악법을 부활시키려고 시도하였다. 독립협회에서 이에 대해 맹렬히 공격하여 보수파 내각은 무너지고 박정양 중심의 개혁파 내각이 수립될 수 있었다. 독립협회에서는 이러한 연장선에서 박정양 내각과 정치체제 개혁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였다. 대신들이 관민공동회에서 헌의육조를 받아들인 것은 이러한 협상의 결과였던 것이다. 이후 박정양 내각은 독립협회의 요구를 받아들여 중추원 관제도 개정하였는데 그 골자는 중추원에 의회와 비슷한 기능을 부여하며 의관의 절반을 독립협회에서 선출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보수파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이들은 이른바 익명서 사건을 날조하면서 고종에게 독립협회가 공화제를 꿈꾸고 있다고 모함하였다. 이에 따라 고종은 헌의육조에 서명한 대신들을 모두 해임하는 한편 독립협회에게 해산을 명하고 간부들을 체포하였다. 독립협회는 이에 맞서 연일 민회를 열면서 항의하였다. 장장 19일간이나 집회와 시위가 이어졌다. 보수파 내각은 보부상을 동원하여 민회를 습격하기도 하였지만 민회 세력은 이마저 물리쳤다. 결국 정부는 이러한 독립협회의 항쟁에 굴복하여 구금되었던 간부들은 석방하고 헌의육조의 이행을 약속하였다. 이렇게 하여 의회를 설립하여 백성들의 뜻이 국정에 반영되도록 하겠다는 독립협회의 꿈은 실현되는 듯하였다.

개정된 관제에 따라 새롭게 구성된 중추원이 1898년 12월 15일 개원하였다. 독립협회에서는 이로부터 보름 전 50명의 의관을 선출한 바 있다. 이들 50명의 의관이 중추원에서 민의를 대변하게 된 것이다. 중추원에서는 12월 16일 대신 후보를 선출하였는데 여기에 당시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朴泳孝)가 포함되어 있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 박영효는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정변을 도모한 혐의로 망명한 인물인데 이러한 인물을 대신후보로 선출한 것이 고종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결국 고종은 무력을 동원하여 민회를 강제 진압하는 한편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한 때 조성되었던 타협적인 분위기가 깨어지고 독립협회와 대한제국이 충돌한 데에는 민회 주도세력 가운데 고종을 축출하고 박영효 등 망명자를 끌어들여 권력을 장악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일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민회의 폭력화를 주도하고 고종과 독립협회의 타협을 방해하였다. 독립협회의 지도부도 이들을 제어하는데 실패하였다. 독립협회 강제해산 직전 회장 윤치호가 덕원감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나버린 것도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다. 이처럼 의회 설립이라고 하는 독립협회의 꿈이 무산되어 버린 데에는 고종의 완강한 거부가 가장 크게 작용하였지만 일부 모험주의적인 세력의 책동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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