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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학당[培材學堂]

인재를 키우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사립학교를 설립하다

1886년(고종 23)

배재학당 대표 이미지

배재학당 동관

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배재학당(培材學堂)은 1886년(고종 23) 미국 북감리회(北監理會) 선교사였던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가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사립학교이다. 인재를 키운다는 학교의 이름에 걸맞게 안창호(安昌浩), 이승만(李承晩), 신흥우(申興雨), 주시경(周時經), 지청천(池靑天) 등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배재학당 출신의 학생들은 한말의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과 식민지 시기의 항일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한국 근대사에 그 족적을 뚜렷이 남겼다.

2 배재학당의 설립과 아펜젤러

1882년 5월 미국과 통상조약(通商條約)을 맺은 조선은 이듬해인 1883년 7월 미국에 민영익(閔泳翊)을 대표로 하는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하였다. 보빙(報聘)이란 답례로 외국을 방문하는 일로, 1883년의 보빙사는 그해 5월 초대 주(駐)조선 미국공사인 푸트(Lucius Harwood Foote)가 방한한 것에 대한 답례의 의미로 보내는 사절단이었다. 1883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사절단은 워싱턴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미국 볼티모어제일감리교회 목사 가우처(John Franklin Goucher)를 만났다. 그는 아시아 지역 선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국과 일본의 선교 개척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민영익에게 조선 왕실이 선교사 활동을 긍정적으로 여긴다는 소식을 들은 가우처는 북감리회 해외선교부에 한국 선교에 대한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표명하였다. 이후 북감리회 해외선교부에서는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1884년 7월 고종으로부터 선교 사업을 허락받았다. 비록 학교와 병원에 국한된 사업이었으나, 조선 최초의 공식적 선교 사업이라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은 것이었다.

미국에서 첫 번째 정착 선교사로 파견된 사람은 미국 북장로회(北長老會) 소속의 선교사 알렌(Horace Newton Allen)으로, 주조선 미국공사관의 의사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알렌은 1884년 12월의 갑신정변(甲申政變) 당시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하여 고종과 왕실의 신임을 얻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설립된 조선 최초의 근대식 의료기관인 광혜원(廣惠院)은 외국인 선교사의 합법적인 활동 공간이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1885년 봄, 미감리회의 아펜젤러와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북장로회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등이 광혜원 의사 혹은 교사 신분을 얻어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배재학당의 시작은 1885년 8월 3일, 아펜젤러가 소규모의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영어 교육을 실시하면서부터였다.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스크랜턴이 알렌의 제중원(濟衆院, 1885년 4월 광혜원에서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음)을 떠나 독자적인 의료 사업을 추진할 무렵, 제중원 직원이었던 이겸나(李謙羅)와 고영필(高永弼)이 스크랜턴을 찾아와 의사가 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스크랜턴은 아펜젤러에게 그들의 영어 교육을 부탁하였다. 이후 동문학(同文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부속기관으로 1883년 외국어 교육을 위해 설립된 정부 기관)에서 영어를 배우던 학생 세 명이 추가되었다. 아펜젤러는 이를 기반으로 정식 학교를 설립하고자 노력하였다. 미국공사로부터 아펜젤러의 교육 사업을 들은 고종은 “아펜젤러가 조선 인민에 관심을 가진 것에 대해 고맙게 여기며 조선 인민을 가르치는 일은 대단히 좋은 일이고 거기 반대할 것은 없다”라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펜젤러의 학교 설립 활동이 간접적으로나마 정부의 인가를 받은 것이었다. 이후 학교 부지와 건물을 선정하는 과정을 거쳐 1886년 6월 8일, 아펜젤러의 학교는 정식으로 교문을 열었다.

아펜젤러의 학교가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1887년 2월 21일이었다. 조선 정부에서 선교사들의 교육과 의료 사업을 인정한다는 의미로 스크랜턴, 아펜젤러 등이 세운 학교에 사액현판(賜額懸板, 임금이 서원의 명칭을 정해 하사한 현판)을 수여했던 것이다. ‘배재(培栽)’는 인재를 기른다는 뜻으로 이는 곧 학교의 사명과 목적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크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欲爲大者 當爲人役)’라는 배재학당의 교훈(校訓)은 이 무렵 정해져서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3 배재학당의 교육과 학제

사액현판을 받은 이후 배재학당에 대한 조선인들의 관심은 높아졌다. 단적인 현상으로는 학생 수가 급격히 증가한 것을 들 수 있다. 1886년 9월 학기가 단 한 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것에 비해, 1887년 1년 동안 등록한 학생 수는 63명에 달했다. 배재학당 출신이 잇달아 정부 부처에 채용되어 관직에 진출한 것 또한 입학생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 사회에서 영어를 배우는 것은 곧 새로운 출세 기회로 인식되었다.

그렇다면 배재학당의 교육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이 무렵 배재학당에서 공부했던 강문흠(姜文欽)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 배재학당의 교실 광경을 엿보자.

교실 의자는 지금 설렁탕집 상 같은 것을 늘어놓고 같이 둘러 앉아 공부를 하였고 의복은 상투에 망건을 썼고 도포나 중수막을 입고 조선신을 신고 다니었는데 제일 곤란한 것은 길에 나가면 천주학쟁이라고 놀리는 것이었지오. 그리고 들어간 지 3년 후에는 학생이 2백 명가량이었는데 그때 학과 중 영어시간에 제일 곤란한 것은 가르치는 선생은 조선말을 모르고 배우는 학생은 사전 하나 없어 별별 손짓과 흉내로 고생을 다하여 어의(語義)를 알게 된 것입니다. 실례를 하나 이야기하면 선생이 Fled의 의미를 가르치는데 당시 김옥균 선생이 일본으로 망명을 해 있는 때임으로 김옥균씨의 그림을 붙이고 그 다음에 바다를 그리고, 그리고 일본 지도를 그린 후에 도망가는 흉내를 하며 김옥균 선생의 사진을 일본지도 위에 옮겨 붙여 Fled가 도망간다는 의미하는 것을 알게 하였소이다.

강문흠, 「그 옛날의 배재학당」, 『배재』18호, 배재중학교, 1949.6, 27쪽(배재학당사 편찬위원회, 『배재학당사(통사)』, 학교법인 배재학당, 2013, 69쪽에서 재인용).

처음부터 조선에 대학(college)을 세울 뜻을 지녔던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의 학제 및 커리큘럼을 그에 맞게 계획하였다. 그는 모교인 프랭클린마샬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의 학제를 참고하여 영어와 인문학을 가르치는 영어부(英語部, English Department), 한자와 중국고전을 가르치는 한문부(漢語部, Chinese Department), 인쇄소와 목공소를 통해 공업교육과 노동교육을 실시하는 실업부(實業部, Industrial Department), 그리고 종교와 신학교육을 위한 신학부(神學部, Theological Department) 등을 설치하고자 했다. 이 중 종교 교육은 조선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한동안 시행하지 못하다가, 1893년 이후 영어 및 한문을 가르치는 교양학부(academic department)와 성경 및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는 신학부(theological department)로 학제를 개편하면서 정규대학 체제를 갖출 수 있었다. 1895년에는 학제가 또다시 개편되어 신학부는 북감리회 한국선교회 산하의 사업으로 넘어가고, 영어부와 한문부, 그리고 실업부의 세 가지 주요 부서를 중심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이 시기 배재학당의 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이 바로 서재필(徐載弼)이었다.

4 독립협회와의 연대와 애국계몽운동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설한 서재필은 1896년 봄부터 배재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배재학당이 한말 애국계몽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서재필은 1896년 11월 7일 배재학당 학생들로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는데 일조하였다. 협성회는 한국 최초의 토론 모임이자 학생 자치단체이기도 했다. 창립 당시의 협성회 임원으로는 회장에 양홍묵(梁弘默), 부회장에 노병선(盧炳善), 서기에 이승만과 김연근(金淵根), 회계에 윤창렬(尹昌烈)과 김혁수(金赫洙), 사찰(査察)에 이익채(李益采)와 임인호(任寅鎬), 사적(司籍)에 주상호(周相鎬, 주시경) 등이 선출되었는데 회장과 사찰은 교사, 나머지 임원들은 학생들로 조직되었다. 회원들은 매주 특정 요일에 모여 다양한 주제를 놓고 토론회를 펼쳤다. 학생들은 이런 토론회를 통해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 및 다수결에 의한 민의 결정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경험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배재학당 협성회의 토론문화는 학교 담장을 넘어 일반 사회에까지 확산되었다. 대표적인 대중 토론문화로는 독립협회의 활동 중 하나인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들 수 있다.

그러나 1897년 이후 독립협회 운동은 고종을 비롯한 집권보수세력의 반감을 얻게 되었다. 독립협회 운동이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대중정치운동으로 발전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보수세력이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조직하여 반(反) 독립협회 운동을 펼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후 고종은 1898년 5월 초 정부의 모든 외국인 관리를 정리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서재필의 중추원(中樞院) 고문직을 박탈하였다. 국내에 머무를 명분이 사라진 서재필은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89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에 이르는 기간에 정부와 배재학당의 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졌다. 1902년 정부는 배재학당과의 계약 종료를 핑계로 자금 지원을 중단하였다. 정부 지원금이 갖고 있는 정치적 의미, 즉 정부의 공식적 지지와 후원이 사라진 것이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듯, 아펜젤러는 이를 학교의 자립성을 높이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학생들에게 약간의 수업료를 받게 되면서 많은 학생이 무료로 교육하는 다른 학교로 옮겨갔다. 학교에 남은 인재는 실력과 뜻이 있는 학생들이었다.

5 일제의 무단통치와 배재고등보통학교

1902년 아펜젤러는 갑작스러운 해상조난사건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펜젤러 사후 그동안 북감리회가 단독으로 운영하던 배재학당은 1902년 남북감리회의 공동 경영, 1905년 북장로회와의 연합 경영을 시도하는 등 운영체계에 다양한 변화를 거쳤다. 그러다 1908년 다시 북감리회의 독자 경영체제로 회귀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의 한일병합으로 배재학당을 비롯한 한국의 여러 사립학교는 일본의 식민지배체제 아래 포섭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일제 식민통치의 기본 원리는 통제와 관리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운영하는 공립학교는 비교적 쉽게 통제할 수 있었기에, 더 독립성을 갖고 활동했던 사립학교를 체제에 순응하는 조직으로 재편하는 과정은 필수적이었다. 1911년 11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부령(府令)으로 ‘사립학교 규칙’을 발표하여 사립학교를 본격적으로 통제하고자 했다. 모든 사립학교는 조선총독부가 제시하는 요건에 맞춰 설립 인가를 받아야 했고, 교장을 변경할 때도 총독의 인가가 필요했다. 총독이 교장 및 교사를 임의로 해고할 수도 있었고, 규정을 어겼을 경우 강제 폐교도 가능했다. 이는 학교 설립과 운영, 교육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관리 감독을 강화하고, 사립학교라도 조선총독부의 정책과 배치되는 활동을 하면 해산시킬 수 있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1915년 3월 조선총독부는 ‘개정 사립학교 규칙’을 발표하여 사립학교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에 따르면, 모든 사립학교는 공립학교에 적용하는 ‘보통학교 규칙’, ‘고등보통학교 규칙’, ‘실업학교 규칙’, ‘전문학교 규칙’에 따라 교과과정을 개편할 것이 강제되었다. 사립학교라도 조선총독부가 지정한 ‘보통학교 규칙’을 준수할 경우에는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로 인가하고, 졸업생들에게는 공립학교 졸업생과 같은 상급학교 진학 자격이 부여되었다. 모든 사립학교가 보통학교 또는 고등보통학교로 인가받기 위해서는 보통학교 규칙에 따라 학제와 교과과정을 개편해야만 했다. 배재학당 역시 조선총독부의 이러한 방침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16년 2월, 배재학당이 기독교계 사립학교로는 최초로 조선총독부 인가를 받고 ‘사립 배재고등보통학교(私立培栽高等普通學校)’로 공식 명칭을 변경하게 되었다. 이는 식민지 시기 동안 배재학당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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