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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전서숙[瑞甸書塾]

최초의 해외 민족학교를 북간도에 세우다

1906년(고종 43)

서전서숙 대표 이미지

중국 길림성 서전서숙

『간도사진첩』(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1 개요

서전서숙(瑞甸書塾)은 1906년에 북간도(北間島) 용정촌(龍井村)에서 이상설(李相卨)과 이동녕(李東寧) 등의 주도로 세워져 약 2년 동안 운영된 민족교육기관이다. 1905년 외교권을 상실한 ‘을사조약’ 강제 체결 이후 민족운동가들은 국권 회복을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서 서전서숙을 설립했다. 서전서숙은 신식교육을 통해 독립운동을 이루고자 한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다. 재정난과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하였으나 교육이념은 국외 여러 지역의 민족학교에 영향을 주었다.

2 국권 회복을 위한 교육 운동의 필요성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과 일본의 승리, 1905년에는 ‘을사조약’을 통한 통감부(統監府) 설치 등으로 국내 상황이 불안정해졌다. 이상설을 비롯한 이동녕 등 민족운동가들은 국권 회복을 위한 방향으로서 교육에 집중했다. 당시 민족운동가들은 국내에서 대규모의 운동을 전개하기가 어렵게 되자 해외에서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구상했다.

당시 전국에는 여러 의병과 무장단체들이 활동했으나 산발적이었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훈련과 교육이 요청되었다. 해외에 민족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국권을 회복하는 길로 여겨졌다. 이것은 이른바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의 맥락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교육구국운동이란 1905년에서 1910년 사이에 국내의 개화자강파(改化自强派) 민족지도자들이 신교육을 통하여 일제로부터 국권 회복 및 수호를 목적으로 전개한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의 일환이었다. 그러한 시기에 해외에서 최초로 세워진 민족학교가 바로 서전서숙이었다.

서전서숙의 명칭은 북간도 용정 일대의 넓은 평야를 의미하는 ‘서전대야(瑞甸大野)’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1906년에 만주 북간도 용정을 배경으로 서전서숙이 설립됐다. 서전서숙의 정확한 설립 시기는 여러 설이 분분하지만, 1906년 9월 무렵에 설립되어 10월경에 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전서숙이 설립된 위치로 용정촌이 선택된 이유는 이곳이 한인 집거지(集居地)를 형성하였으므로 교육하기가 가장 적당하였다. 또한 조선과도 거리가 가까워 북간도, 남북만주, 시베리아 지방의 이주 한인들에게 교육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용정촌은 또한 일본이나 중국 관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용정촌에 있던 천주교회에 영국 선교사들이 있어 일본과 중국 관헌들이 갈등을 피하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운동가들이 모이기가 쉬웠다.

3 무상교육과 신식교육의 산실

용정촌에 온 민족운동가들은 중국식 이름을 사용했다. 이상설은 이당(李堂)으로, 이동녕은 이량(李亮) 등으로 불렸다. 이들은 처음 용정의 천주교 회장 최병익(崔秉翼)과 상의하여 70여 평의 신축가옥을 구입하여 학교 건물로 개조한 뒤 서전서숙이라 명명했다. 그 뒤 간판을 달아 학생을 모집하며 학교운영을 시작했다.

서전서숙의 학생교육은 기본적으로 무상교육이었다. 학교 운영자금에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면, 서전서숙의 운영자금은 참여한 인물들이 스스로 조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전서숙은 교재와 학생의 필수품, 수업료 등 모든 것이 무상이었지만, 북간도 용정에 거주하던 교민들은 자녀를 서전서숙에 적극적으로 보내지는 않았다. 이동녕을 비롯한 서전서숙 인사들은 서전서숙에 자녀를 취학시킬 것을 권유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 간도 지역의 민족운동가 김약연(金躍淵)은 장래 신학문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그의 제자 2명을 서전서숙에 보내기도 하였다.

서전서숙의 초대교장은 이상설이 맡았다. 학교운영은 이동녕과 정순만(鄭淳萬)이 맡았고 교원은 이상설, 여조현(呂祖鉉), 김우용(金禹鏞), 황달영(黃達永) 등이 맡았다. 서전서숙은 갑(甲)과 을(乙)의 2개 반으로 나누어 교육을 실시했다. 갑반은 고등반으로 20세 전후의 청년학생들이 수학했다. 을반은 초등반에 해당했다. 학생 수는 초기 20여 명 정도에서 점차 증가해 100여 명에 이르렀다. 학생이 증가하자 병(丙)반까지 확대하여 운영했다.

교육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서전서숙에서는 역사(歷史), 지리(地理), 산술(算術) 등을 가르쳤다. 이상설은 『산술신서(算術新書)』를 직접 저술하여 산술을 가르쳤다. 그 밖에 황달영은 정치와 지리 등을 가르쳤고, 김우용은 산술, 여조현은 법률과 경제 등을 맡아 교육했다. 이처럼 교과 내용으로 보았을 때 서·북간도에서 서전서숙은 신교육의 요람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서전서숙은 반일민족교육에도 역점을 두었다.

당시 서전서숙의 교가를 보면 설립취지와 성격이 더 잘 드러난다. 교가의 내용은 백두산과 두만강이 보이는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설립하니 젊은 청년들이 공부하여 나라를 구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에 의해 강제적 식민지화가 눈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국권 회복을 위한 인재양성이 서전서숙을 창립한 근본 목적이었다.

서전서숙에서 배출한 인재는 갑반 20명, 을반 20명, 병반 34명으로 총 74명이었다. 이 가운데 남세극(南世極)은 간도 민족교육단체 중 하나인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에서 활약했다. 간민교육회는 그 전신이 간민자치회(墾民自治會)로 이주 한인들의 단결 및 복리증진을 위한 단체였다. 동시에 반일활동을 전개한 단체였지만, 일본 관헌의 간섭으로 명칭을 간민교육회로 개칭하고 교육 사업에만 치중하게 되었다. 김학연(金學淵)은 서전서숙의 폐교 후에 그의 종형(從兄)인 김약연이 세운 명동서숙(明東書塾)에서 교원으로 재직했다. 명동서숙은 후에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의 기반이 된 명동중학(明東中校)의 시초였다.

4 서전서숙의 폐교 원인

서전서숙의 운영상 큰 애로사항은 자금문제였다. 서전서숙의 창립자인 이상설은 1907년 봄 고종의 명을 받아 비밀리에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 자격으로 참석해야 했다. 이때 이상설은 이동녕, 정순만과 함께 용정을 떠났다. 그러나 서전서숙이 폐교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일제의 탄압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행된 『해조신문(海潮新聞)』은 서전서숙의 폐교 원인으로 일제의 탄압을 꼽았다. 이는 서전서숙 출신인 윤정희는(尹政熙)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서전서숙은 자금난과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1907년 9월 말에 폐교하게 되었다.

서전서숙의 설립 이후 일제는 만주침략의 전초기지를 세우고자 북간도의 한인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1907년 8월 용정촌에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했다. 이때 일본육군중좌 사이토 스에지로(斎藤季次郎)는 일본의 기병대를 이끌고 용정에 와서 간도파출소장의 임무를 맡았다. 일제는 서전서숙에 관련한 민족운동가를 미행하고 감시했다. 또한 서전서숙의 교직원과 운영자에게 매월 20원의 보조금을 주겠다는 뜻을 밝히며, 서전서숙을 매수하고 친일적 교육방향으로 돌리려 하였다. 그러나 서전서숙 관계자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서전서숙은 명동촌에서 폐교하였으나, 훈춘현(琿春縣) 탑자구(塔子溝)에서 1년을 더 지속하였다. 그곳에서 일부 교원을 중심으로 서전서숙을 재건립하고 74명의 학생을 모두 졸업시켰지만, 그 후에 결국은 완전히 폐교할 수밖에 없었다.

5 서전서숙의 유산, 국외 민족교육의 시작

서전서숙의 교육이념은 폐교 후에도 이어졌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명동서숙이다. 명동서숙은 1908년 4월 화룡현(和龍縣) 대랍자(大拉子) 명동촌에 세워졌다. 명동촌에 터전을 개척한 김약연에게 그의 종제이자 서전서숙에서 수학한 김학연이 간청하여 명동서숙이 세워지게 되었다. 명동서숙의 교장은 박무림(朴茂林)이고 학감(學監)은 김약연, 문치정(文治政), 교원에 김학연, 남위언(南葦彦) 등이었다. 이때 박무림은 서전서숙의 참여자였고, 김학연, 남위언(南葦彦) 역시 서전서숙에서 수학한 인물이었다. 이윽고 명동서숙은 1909년 명동학교(明洞學校)로 발전했다. 그리고 1910년 3월에는 중학교를 증설하였고, 만주와 시베리아에서까지 학생들이 찾아오면서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서간도 지역에서는 1911년에 이동녕을 주축으로 하여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였다. 이는 신흥학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발전했다. 서전서숙의 설립자 중 하나인 이동녕을 비롯하여, 이상설과 밀접한 관계였던 이시영(李始榮), 이회영(李會榮)이 참여했다. 신흥중학교에서는 여조현이 교사로 활약하며 서전서숙의 맥이 이어졌다.

한편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이승희(李承熙)가 밀산부(密山府) 봉밀산(蜂蜜山)에 황무지를 개척하고 세운 한민학교(韓民學校)도 서전서숙과 같이 민족교육을 목표로 한 학교였다. 이승희는 한민학교를 설립하기 이전부터 이상설과 뜻을 같이하였다. 그는 이상설과 상의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후보지로 중국과 러시아 접경지역에 주목했다. 그는 이상설과 함께 100여 가구의 한인들을 그곳에 이주시켜 한흥동(韓興洞)이라 명명하고 한민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이처럼 서전서숙은 해외 한인사회에 세워진 최초의 민족교육기관이라는 데 커다란 의미가 있다. 그리고 단순히 교육기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했다는 점도 중요할 것이다. 북간도와 상해, 시베리아 등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계봉우(桂奉瑀) 가 1920년 1월 당시 『독립신문(獨立新聞)』에 기고한 글에서 서전서숙이 국외 독립운동의 시작이었으며, ‘간북교육(墾北敎育)의 기원’이었다고 평가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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