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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일제 강점 하 최대 민족운동 단체

1927년 ~ 1931년

신간회 대표 이미지

신간회 강령과 규약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독립기념관)

1 개요

1927년 2월 결성된 신간회는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이 연합하여 결성한 일제하 최대의 민족운동 단체이다.

2 신간회 결성 배경

1920년대 문화통치기에는 일간지인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잡지인『개벽』 등 민족의 언론기관이 생겼고 사회주의가 유입되어 유력한 운동세력을 이루었다. 또한 농민, 청년, 여성, 노동자 단체 등 대중운동조직이 결성 되어 민족운동이 활성화 되었다. 하지만 일체의 독립운동을 허하지 않는 조선총독부의 탄압과 정세변동으로 국내외 운동세력은 곧 곤란에 빠졌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친 민주주의와 민족자결이 빛을 바래면서 변혁적 국면도 퇴조하였다. 3‧1 운동의 성과로 만들어진 대한민국임시정부도 내분과 대중 기반 상실로 민족운동을 지도하지 못하였다. 일제의 강력한 탄압 때문에 독립을 표방한 대중조직을 만들거나 3‧1 운동처럼 직접적 정치투쟁을 하거나 비합법적 정치조직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1925년에 결성된 〈조선공산당〉은 결성과 동시에 와해되다시피 했고 1926년 6·10만세운동 후 대대적인 검속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하여 민족운동세력은 새로운 방법론과 운동조직 결성을 모색하였다. 한편 새롭게 전개되고 있던 중국과 일본의 정세 변화는 민족운동 세력의 대응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26년 2월부터 국민당 정부에 의해 단행된 북벌(北伐)은 조선 정세에 하나의 변수로 작용하였다. 신간회가 결성될 즈음에 북벌이 완성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북벌은 만주와 몽고 지역에 대한 ‘일본의 특수이익’에 변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요소였다. 즉 만주의 정세변화는 조선의 운동세력에게 곧바로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정세변화는 조선 정세변화에 보다 직접적이었다. 일본은 이때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대를 경유하고 있었다. 불완전하게나마 정당정치가 확립되었고 1925년 3월에는 보통선거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에 따라 유권자 수가 300만 명에서 1,200만 명으로 일거에 늘어났다. 보통선거 실시를 앞두고 일본사회주의 세력과 노동자 농민 단체들은 의회 진출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의회 진출로 운동 방향을 전환하고 ‘무산(無産)정당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운동세력은 일본과 중국의 정세변화를 예의주시하였다. 민족운동 세력은 국제정세 변동에 의해 일제의 조선정책이 이완된다면 생길지도 모를 정치적 공간에 대한 대응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3‧1 운동에 대한 비판적 평가도 신간회 결성에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3‧1 운동은 문화통치로 지배정책의 변화를 이끌어냈고 독립국가의 국가 형태를 군주제가 아닌 공화제로의 이끈 정치적 진전과 반일민족주의의 힘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3‧1 운동으로 독립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으며 3‧1 운동은 자연발생성과 민족운동을 지도할 기관이 없었다는 한계를 드러냈다. 3‧1 운동의 성과와 한계 속에서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은 전 민족적이고 합법적인 정치운동 단체를 만들 것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신간회로 결실을 맺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신간회 결성의 직접적 계기는 1926년 최린(崔麟)과 천도교 신파로 대변되는 자치운동세력의 대두와 그들의 활동에 있다. 천도교 신파의 최린과 『동아일보』의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 등은 1925년 이래 수차례 회합하여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자치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1926년 후반 극비리에 자치운동단체 조직에 착수하였고 사회주의세력과 민족주의세력은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신간회 결성을 자치운동에 대한 대응이라는 수동적인 차원의 움직임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간회는 1920년대 초반 이래 민족운동세력이 모색해온 민족운동 노선과 활동이 중국혁명의 진전, 일본 국내 정세의 변화와 맞물려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3 신간회 창립과 신간회 참여 민족운동세력

1925년 경 일제의 민족분열 공작과 천도교 신파와『동아일보』계열의 자치운동 조짐이 나타나자 민족운동세력은 그에 맞선 대응이 필요하였다. 1920년대 중반에 민족주의계열의 주요 정치세력에는 기독교계, 천도교계, 언론세력이 있었다. 기독교계에는 안창호(安昌浩)가 이끄는 국외의 흥사단과 그 국내 기반인 수양동우회가 서북지역을 지역기반으로 하고 있었고, 이승만(李承晩)이 이끄는 국외 동지회와 그 국내 기반인 흥업구락부는 기호지역을 지역기반으로 하였다. 천도교계는 천도교세력의 80%를 점하고 서북지역을 지역기반으로 한 신파와 과거로부터 천도교의 지역기반인 경상·충청·전라도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던 구파로 구성되었다. 신파는 1920년대 민족주의 운동의 최대 세력이었다. 한편 언론계에는 『조선일보』계와『동아일보』계열이 세력을 양분하고 있었다.『동아일보』계열이 송진우를 중심으로 비교적 단일한 세력을 이루고 있던 반면 『조선일보』계열은 안재홍(安在鴻)계, 홍명희(洪命熹)계, 신석우(申錫雨)계 등 다양한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회주의계열은 1923년 이래 ‘민족협동전선론’을 논의해왔다. 사회주의 계열의 단체들은 1925년 경 전진회(前進會)와 정우회(正友會)로 크게 양분되었다. 전진회는 1925년 결성된 사회주의운동 단체이고, 정우회는 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회가 모여 구성한 〈4단체합동위원회〉가 모체가 되어 결성한 단체이다. 1926년 11월에는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정우회’가 ‘정우회선언’을 발표하면서 민족주의 세력과의 적극적 제휴를 선언하였다. 정우회의 ‘방향전환론’은 사회주의 진영의 운동노선화 되어 신간회 탄생에 기폭제가 되었다.

신간회 결성은 1926년 12월 홍명희와 안재홍과 신석우(조선일보사 간부)의 회합이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들은 1927년 1월 19일 신석우, 안재홍, 이승복 등 『조선일보』계열, 이상재, 유억겸, 김활란 등 흥업구락부 계열, 조병옥, 조만식 등 서북지역 기독교 세력, 권동진, 이종린 등 천도교 구파, 한용운 등 불교계, 김준연, 한위건 등 조선공산당계 인사들이 모여 발기인을 구성하였다. 여기서 ‘정치경제적 각성, 공고한 단결, 기회주의의 일체 부인’ 등 3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정우회는 1927년 2월 1일 통일된 정치전선을 조직할 것을 주장하면서 해체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사회주의 계열인 서울청년회 신파와 조선물산장려회 계열의 합작으로 발족한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도 1927년 2월 11일 신간회와의 합동을 결의하면서 조선민흥회 회원 전원이 신간회에 가입하였다

창립대회는 1927년 2월 15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회원 200명과 방청객 1,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신간회의 애초 명칭은 신한회(新韓會)였으나 총독부로부터 ‘한(韓)’자를 뺄 것을 요구받고 신간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한(韓)’자가 ‘간(幹)’자와 같은 뜻으로 쓰였고 또 ‘고목신간(古木新幹)’이라는 말이 있다고 하는 홍명희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이상재(李商在)를 회장으로 홍명희를 부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신간회는 회장 밑에 35명의 간사를 두었다. 강령으로 “1.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1.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1.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를 채택하였다. 창립 1개월 후 회장 이상재가 사망함에 따라 후임회장으로 천도교 구파의 권동진(權東鎭)을 선출하였다.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한 일제하 최대의 민족운동 단체이자 민족협동전선체가 결성되었다. 신간회는 출범 1년 만인 1928년 12월에 지회 수 143개 회원 2만 명에 달하는 성과를 이룩하였다. 1927년 5월에는 여성운동계의 좌우합작 조직인 근우회가 신간회의 자매조직으로 출범하였다.

1927년 4월에서 1931년 5월까지 4년간 신간회 주도세력과 참여세력은 정세 변동에 따라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민족운동을 둘러싼 정치 지형의 변동을 반영한 것이었다. 또한 자치운동으로 노선전환을 계획했던 세력도 주도적이지는 않았지만 시기에 따라 부침을 보이며 참여하였다. 신간회 출범 초에는 『조선일보』계열, 『시대일보』계열과 흥업구락부 계열이 중앙 간부를 맡으며 신간회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1927년 말부터는 『동아일보』계열과 수양동우회도 합류하였다. 조선공산당 계열을 비롯한 사회주의 세력은 지회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1927년 지회를 기반으로 세력을 점차 확장하였다.

4 복대표대회와 민중대회사건

일제는 1928년, 1929년 연달아 신간회의 정기대회를 금지시켰다. 1928년 제1회 정기대회가 금지된데 대하여 대부분의 지회는 일제에 대한 비타협적이고 전투적 노선을 견지할 것을 주장하면서 본부와 갈등 하였다. 1928년에는 『조선일보』계열이 신간회 중앙에서 퇴거하였다. 이것은 133일간 계속된 『조선일보』의 정간해제와 관련이 있었다. 일제는 『조선일보』사원이 신간회에서 물러날 것을 정간해제의 조건으로 하였고 『조선일보』가 이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일제의 방해로 정기대회를 열 수 없게 되자 신간회는 몇 개의 지방지회끼리 대표를 뽑아 정기대회를 대신하는 이른바 복대표대회를 1929년 6월 28일 개최하였다. 복대표대회로 허헌(許憲) 집행위원장 체제가 출범하였고 간부진이 바뀌었는데, 간부 78명 중 창립 시 간부는 5명에 불과하였고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진출하였다. 복대표대회에서는 신간회의 조직 성장에 따라 규약을 개정하였다. 대체로 지회가 지속적으로 요구해 오던 것을 수용하여 ‘아래로부터의 조직’을 보장하였다. 1928년 이래 침체되어 왔던 신간회는 복대표대회로 활기를 되찾는 듯하였다. 그러나 성장에 비례하여 일제의 탄압도 강화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민중대회사건’이었다. 신간회 본부와 경성지회 간부들은 1929년 11월 3일 광주(光州)학생운동이 발발하자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고 광주학생운동을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사건으로 만들기 위하여 1929년 12월 13일 민중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2월 11일에 이를 탐지한 일제는 13일 오전 6시에 신간회 회원 44명을 검거하였다. 민중대회사건으로 신간회 중앙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중앙조직은 허헌 집행위원장 체제에서 김병로(金炳魯) 집행위원장 체제로 변화하였다. 비록 미수에 그쳤으나 이 시도는 1930년대에 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5 지회설립과 활동

지회 설립은 그 지역에서 노동, 농민, 청년 사상운동을 하던 활동가들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기존에 그 지역에 있던 운동단체를 조직적 기반으로 하여 설립하였다. 신간회가 창립된 후 전국 청년, 여성, 노동, 농민단체 등으로부터 신간회를 지지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열기에 힘입어 창립 10개월 후인 1927년 12월 27일 ‘지회 100개 돌파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지회 설립에는 주로 청년단체들과 지방신문 기자들이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지국이 사무실로 쓰이는 경우가 흔했다. 그리하여 신간회 최전성기에는 141개 지회, 회원 수 4만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지회 설립이 확산되었음에도 창립 1주년이 되도록 신간회 본부는 구체적인 활동지침을 내놓지 못하였다. 신간회 각 지회는 주로 계몽운동을 하였다. 주로 웅변대회, 연설회가 행해졌다. 주제로 신간회의 필요성, 미신타파, 검은(색복) 옷 착용, 조혼금지, 금연과 아편 흡연 추방, 매춘과 풍기문제 등이 다루어졌다. 지회의 일반적인 사업으로는 야학 경영과 문명퇴치운동이 있었다. 계몽운동 외에 생존권수호운동으로 소비조합 설치, 협동조합운동, 노동자 농민 본위의 금융기관 설치 등이 주장되었다. 이외에 농민의 소작권 보호, 일본인 대지주 농장의 이민 반대, 수리조합 설치 반대, 노동 조건과 노임에 대한 민족적 차별 반대 등 반제적인 요구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신간회 창립 이전부터 각 운동단체들이 해 왔던 것들이었고 신간회 지회가 본부의 활동 지침을 가지고 전개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한계는 신간회 내부로부터 문제제기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6 신간회 해체와 신간회의 역사적 의의

1929년 12월 민중대회사건으로 신간회는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신간회에 대한 민중의 기대는 상승하여 1929년 말 3만 7천명이었던 회원이 1930년 11월에는 3만 9천명으로 증가하였다. 민중대회 사건 이후 김병로 중심의 중앙집행부가 성립되면서 신간회 노선이 눈에 띄게 ‘온건화’, ‘개량화’되었다. 김병로 집행부의 의도는 현실적으로 민중대회사건 후 가해질 일제의 탄압에 대비하자는 것이었다. 그 방법으로 종래의 개인가입제를 단체가입제로 바꾸어 자치론을 주장하는 단체까지 신간회에 포괄하고, 한층 합법적인 영역 내로 신간회의 활동을 제한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온건화’ 노선은 신간회 해소론 등장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이 노선은 신간회 활동 방향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한층 깊게 하였고 나아가 신간회의 존립자체를 부정하게끔 하였다. 사회주의 계열은 12월 테제에 기반하여 1929년부터 민족주의자들과의 협동전선을 폐기하면서 다른 협동전선 방침을 구상하였다. 그들은 노동자 농민 대중이 신간회에 가입하는 것을 저지하고 대중을 계급별로 재편성하는 방침을 세웠다. 1930년에 들어 사회주의 진영은 그 시기를 혁명적 대중운동 고양기로 규정하였다. 이는 1929년 1월 원산총파업,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과 같은 대중운동의 고양과 연이은 학생들의 동맹휴업, 농민의 소작쟁의와 노동자 파업이 일어난 것에 대한 판단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 농민의 혁명성을 과대평가하였고 노동자 농민을 혁명적 대중으로 조직화 시켜내는 것에 몰두하였다. 이들은 신간회에 참가하고 있는 ‘민족주의 좌파’를 경쟁자로 인식하였고 이들을 고립시키는 전술을 택하였다. 그리고 이는 신간회 해소로 구체화 되었다. 지역 차원에서 선도적으로 해소 과정을 밟아나갔고, 1931년 5월 16일 전국대회에서 신간회 ‘해소안’이 통과되어 신간회는 결국 해체되었다.

신간회는 합법적 영역에서 비타협적인 정치투쟁을 하고자 한 정치운동단체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대한 정치투쟁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실상 신간회는 정치투쟁을 하는 단체로 조선을 정치적으로 지도하는 기관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신간회는 합법적인 활동 영역을 확보하여 최대한 많은 민중을 조직할 수 있었다. 또한 일제에 대한 압력 수단이 되었고 조선인들의 정치적 훈련의 장이 되었다. 신간회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발전적인 방향은 신간회를 민족운동의 지도세력으로 성장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진전되지 못하였으며 신간회는 결국 해체되었다. 이것은 민족운동에 커다란 손실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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