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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부

북만주에서 활동한 민족 운동 단체이자 한인 자치기관

1925년 ~ 1929년

신민부 대표 이미지

닝안 신민부 결성지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독립기념관)

1 개요

신민부(新民府)는 1925년 3월 북만주 영안성(寧安城)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이다. 일제에 대한 효율적인 투쟁을 수행하기 위해 북만주의 여러 항일단체들이 통합하여 결성된 것으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과 대한독립군정서를 중심으로 성립하였다. 1920년대 중반 만주·연해주 지역에서 조직된 통합 독립운동 단체인 참의부, 정의부와 함께 이른바 '3부'를 형성하였다. 신민부는 공화주의와 민족주의를 기본 사상으로, 무장활동과 자치활동, 교육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2 신민부의 성립배경과 조직 결성

1919년 3·1 운동 이래 만주 지역에 수십 개의 무장 독립운동단체가 생겨나자, 일제는 만주의 항일독립군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점차 활발해지는 독립군의 활동을 봉쇄하기 위해, 대규모의 정규군을 만주로 투입하였다. 그러나 청산리 대첩에서 독립군이 대승하는 등 독립군에 대한 토벌 작전이 오히려 실패하자, 일제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독립군의 근거지를 박멸한다는 미명 하에 마을을 파괴하고 한인들을 학살하는 이른바 경신참변을 자행했다.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의 학살과 토벌 계획에 대응하고자 다른 독립군부대들과 대동단결하여 통합부대를 건설하려 하였다. 북로군정서를 비롯하여 대한 독립군·대한국민회·대한신민회·도독부·의군부·혈성단 등 여러 단체가 통합 조직으로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통합된 독립군 단체는 일본군의 작전을 피해 러시아령으로 이동하였으나, 1921년 6월 항일무장투쟁사의 참극인 흑하사변(黑河事變, 또는 자유시 참변)을 겪게 되었다. 이는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을 벌인 것으로, 독립군의 통수권을 두고 내부의 노선 차이에서 빚어진 분쟁이었다. 이 참극으로 많은 인명이 살상되어 독립군 부대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사건을 배경으로 독립군의 통합 조직은 깨지고 말았으며, 살아남은 독립군 일부는 각기 세력별로 병력을 수습해 만주로 돌아와 재기를 위해 노력하였다. 1922년 중반 이후, 북만주 지역의 독립군들은 다시금 통합운동을 전개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재조직했다. 이때는 남만주에서 여러 독립군단들이 통합하여 통의부를 조직한 시기로, 북만주에서도 통합 단체 결성의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대한독립군단은 중국 지방관헌들의 탄압을 받았으며, 당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사회주의계열의 운동가들과도 갈등을 빚었다. 따라서 대한독립군단의 간부들은 더욱 강한 통합단체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북로군정서 출신들이 조직한 단체였던 대한독립군정서 인사들과 힘을 합쳐 북만주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조직된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시키기 위한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로 1925년 1월 길림성(吉林省) 목릉현(穆陵縣)에서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의 협의를 통해, 1925년 3월 10일 영안현(寧安縣) 영안성(寧安城)에서 북만주 항일무장독립단체를 통합한 조직으로 신민부를 결성하기 위한 창립대회가 열렸다.

신민부 창립대회에는 대한독립군정서의 김혁(金爀), 조성환(曺成煥), 정신(鄭信)과 대한독립군단의 김좌진, 남성극, 최호, 박두희, 유현을 비롯하여, 북만주 한인사회에 설립된 여러 단체들의 인사들이 대표로 참여하였다. 이들 대표들은 5일 간의 회의 끝에 1925년 3월 15일 신민부 성립을 선언하고, 신민부의 창립과 진로를 천명하는 선포문과 기관 명칭·제도·사업 방침·군사·재정·실업·교육·헌장 등 결의안을 발표하였다.

성립 당시 신민부의 체제는 삼권분립을 기초로 하여, 행정기관인 중앙집행위원회(위원장 김혁), 입법기관인 참의원(위원장 이범윤), 사법기관인 검사원(위원장 현천묵)을 갖추었다. 물론 실제 운영상으로는 참의원과 검사원보다 중앙집행위원회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지만, 삼권분립의 체제를 갖춘 사실은 신민부가 무장투쟁만이 아니라 북만주지역의 한인사회를 관할하는 준정부로서의 위상을 지향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신민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연호인 '민국'을 연호로 사용하였다는 데서 공화주의를 추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민부 간부 중에는 대종교를 신앙하는 민족주의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며 공산주의계열의 적기단은 신민부 조직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신민부가 활동한 북만주지역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거주하였기에 당시 좌우 협동전선의 흐름상 연합활동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3 신민부의 활동

신민부는 다른 통합 독립군 단체와 마찬가지로, 만주지역에 이주한 한인들의 경제적 부흥과 실업 장려·교육 등의 민정활동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군정활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민정활동을 살펴보면, 신민부는 중앙조직에 민정활동을 담당할 여러 부서를 두고 관할 지역 내 한인들의 생활을 이끌었다. 한인들의 공동으로 토지를 경작하는 공농제를 실시하였고, 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식산조합과 촌락에서 운영하는 소비조합을 만들었으며 부업을 장려하여 생활의 안정을 꾀하도록 했다. 각 지역에는 군구제(軍區制)와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여 장정들이 평소에는 농업에 종사하면서 군사 훈련을 받도록 하여, 유사시에 독립군으로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신민부는 특히 교육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소학교·중학교·사범학교의 설립에 대해 창립총회의 결의안을 통해 규정하였다. 이를 통해 신민부는 관할지역에 신창학교, 원동학교, 개신학교, 동명학교, 보신학교 등 약 50개의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또 일반 청장년의 교육을 위해 노동강습소와 통속강습소를 설립해 관할 한인들의 문맹 퇴치와 항일의식 고취에 주력하였다. 교육활동 이외에도 신민부는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독립운동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기관지 『신민보(新民報)』를 발행하였다. 1925년 4월 1일 창간호가 발행된 『신민보』는 관할지역뿐만 아니라 동만주 일대에도 배포되었으며, 항일운동에 대한 내용 및 상해의 소식 및 사회주의계열 운동가들의 투고 또한 게재하였다. 또한 신민부에서는 독립운동을 격려하기 위한 선전문을 배포하기도 하였다.

신민부의 군정활동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군사부 위원장 겸 총사령관 김좌진의 통솔 아래 이루어졌다. 무장투쟁을 전개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가 설립되어, 신민부 군정활동의 근간이 되는 총 500여 명의 독립군이 육성되었다. 신민부 소속 독립군은 관할 지역 내 친일세력 및 부역자들을 처단하고, 만주 및 국내에서 일제를 상대로 한 유격활동을 펼쳤다. 당시 만주 지역에는 보민회(保民會), 조선인회 등 일제에 협력하는 친일 조선인 단체가 조직되어 독립군 부대의 활동이나 소재지를 밀고하는 등 독립군 활동에 타격을 주던 상황이었다. 신민부는 해림(海林) 지역의 초대 조선인회장으로 친일행위를 자행하던 배두산(裵斗山)의 처형을 비롯하여, 이들 친일파들을 척결하여 지역 내의 치안을 관리하고 독립군의 활동을 보호하려 하였다.

또한 김좌진의 통솔 하에 국내 진입 작전을 수행했는데,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 대한 처단 계획 등을 수립하여 국내 파견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특히 1927년 8월에는 이중삼(李重三) 등을 국내로 진입시켜 일본군 및 경찰의 주둔지를 파악하고 작전 지도를 작성하여 일제의 무장세력을 파악하는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또한 신민부는 항일운동을 수행하기 위한 광범위한 지역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특히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군자금 모집의 경우, 당시 언론에 크게 보도되어 세간에도 알려졌다.

4 신민부의 분열과 해체

신민부의 활동은 주요 간부들이 일본 경찰에 붙잡히면서 위기를 맞았다. 특히 일본 경찰과 중국군 합동의 습격을 받아 중앙집행위원장 김혁을 비롯하여 유정근(兪正根)·김윤희·박경순 등 여러 간부들이 체포되면서 신민부의 존립이 위태로워졌다. 따라서 남은 신민부 간부들은 1927년 12월 25일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총회를 개최하고 신민부를 어떻게 존속시킬 것인지를 논의하였는데, 여기에서 군정파와 민정파의 의견이 대립하였다. 김좌진을 중심으로 한 군정파는 민정 위주의 활동을 접고 무장투쟁 위주의 독립군단으로 개편하여, 일본군과 중국 측의 탄압에 맞서 적극적인 무장활동을 전개하자고 주장하였다. 한편 민사부 위원장 최호를 중심으로 한 민정파는 계속해서 민정에 주력하여 교육과 산업 진흥을 통해 재만 한인의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자는 노선을 제시했다.

신민부 내 군정파와 민정파는 결국 분열되어 각각의 조직을 구성하였으며, 1928년 11월에는 빈주(賓洲)에서 신민부 군정파가 관할지역 한인들의 회의를 민정파의 비밀 모임으로 오해하고 무력으로 공격해 사상자가 발생한 빈주사건(賓洲事件)이 일어남으로써 서로 적대시하게 되었다.

신민부가 군정파와 민정파로 갈라진 시기는 만주 지역을 분할하여 활동하던 정의부·참의부·신민부의 이른바 3부를 통합하고 좌우익의 민족운동을 합작하여 단일 전선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전개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1928년 9월, 통합운동을 논의하기 위한 3부 통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3부 통일회의에 참가한 신민부의 대표는 민정파에 속했던 김돈(金墩)이었다. 따라서 군정파에서는 김돈의 대표성을 부정하고 통일회의에 찬성하지 않았다. 결국 이 회의는 결렬되었고, 신민부 민정파와 군정파는 완전히 갈라진 채로 각각 조직을 해체하여 서로 다른 통합단체 구성에 참여하게 되었다. 민정파는 정의부 및 참의부의 일부 세력과 함께 1929년 4월 1일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하였으며, 군정파는 1929년 7월 21일 결성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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