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근대
  • 신한민보

신한민보[新韓民報]

미주한인들의 독립운동 기관지

1909년(순종 3)

신한민보 대표 이미지

신한민보(1909년 2월 10일자)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190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어로 창간되었으며, 국민회와 대한인국민회 기관지였다. 신문은 주간(수요일 발행)으로 발행되었다. 국문 활판으로 인쇄되었다. 발행인은 최정익, 인쇄인은 전성덕, 국문 주필은 김현구, 박용만, 정재관, 최정익, 이항우, 강영대, 영문 주필은 김용중, 박상엽, 전앨른 등이었다. 미주한인의 삶과 동향 다룬 기사, 한국독립운동방략과 미주한인 통합의 필요성을 담은 논설 등이 실렸다. 신문은 해방이전에는 한국독립, 해방이후에는 전후재건과 한국 통일을 위한 글들이 실렸다.

2 신한민보의 전신

『신한민보(新韓民報)』는 190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한국어로 창간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기관지였다. 영문 제호는 The New Korea였다. 신한민보는 공립협회(共立協會)가 발행하고 있던 『공립신보』(共立新報, The United Korean)에서 개제(改題)된 것이다.

공립협회는 안창호(安昌浩, 1878~1938)의 주도로 같은 민족을 서로 보호하고자 만든 한인단체였다. 1903년 9월 안창호, 박선겸(朴善謙), 이대위(李大爲), 김성무(金聖武) 등이 상호 친목을 목적으로 상항친목회(桑港親睦會)를 조직하였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재류 한인 20여 명 중에 친목 회원은 9명에 불과하였다.그 뒤 1904년 하와이로 한국인 이주가 이뤄지고, 그 중 일부가 미국 본토로 이주함에 따라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교민의 수가 증가하였다. 그리고 당시 본국에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1905년 4월 조직을 확대, 개편하여 공립협회라 개칭하였다. 기존의 목적을 확대하여 애국 운동의 전개, 동족간의 상부 상조, 환난상구(患難相救) 등으로 정하였다. 초대 회장은 안창호였으며 송석준(宋錫峻), 정재관(鄭在寬)이 각각 제2대·제3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1월 샌프란시스코 퍼시픽가(街)에 회관을 설립하고, 재미 한인수가 증가하면서 1907년까지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새크라멘토(Sacramento), 리버사이드(Riverside), 레드랜드(Redlands), 등 미국 서해 연안지방에 지회가 설치되었다.

공립협회에 몸담고 있던 샌프란스시코 한인들은 1905년 11일 22일자로 『공립신보』를 창간했으며, 1909년 1월 27일까지 총118호가 발행되었다. 사장은 안창호, 주필은 송석준이었다. 창간 초기에는 활자를 갖추지 못하여 필사하여 순국문으로 석판 인쇄했으며, 매월 2회 발행하였다. 1907년 4월 26일자(제2권 제1호)부터 활판으로 인쇄하여 주간신문 형태로 발행하였다. 이때부터 편집 겸 발행에 정재관, 인쇄는 이교담(李交倓)이 맡았다. 신문체제도 새롭게 하여 순한글판으로 4단제 4면으로 발행하였다. 『공립신보』의 의 발간 목적은 미국에 머물고 있는 동포들에게 민족정신 고취와 국권회복운동을 보도하는 데 있었으며, 국내에도 널리 보급하고자 노력하였다. 창간호 논설에서도 밝혔듯이, 매호마다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을 강력하게 내세우며 단순한 보도기관으로서 만족하지 않고, 지식의 계몽기관으로서의 구실을 중시하였다. 또한, 국내의 민족지들의 동태에 대해서도 항상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찬사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1907년 『제국신문』(帝國新聞)이 재정난에 빠졌을 때는 의연금 모금을 하였고,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애국정신에 대해서도 크게 보도하였다. 한편,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 마켓가(街)에서 의사(義士) 장인환(張仁煥)과 전명운(田明雲)에 의하여 피살된 스티븐스(Stevens,D.W.) 사건을 3월 25일자 신문에서 크게 보도함으로써, 미국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알리고,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하게 하였다. 보급망으로는 미국본토 이외 지역의 배포를 위하여 하와이에 4개소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1개소의 보급소를 두었다. 본국에는 서울을 비롯, 전국 32개 보급소를 통하여 국내 독자들에게 배포되어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1908년 4월 일제가 「광무신문지법(光武新聞紙法)」의 단속규정을 강화하여 해외에서 발간되어 국내에 유입되는 동포신문도 통감부에서 통제함에 따라 빈번하게 압수, 또는 발매금지를 당하였다.

3 공립신보에서 신한민보로

『공립신보』는 1909년 2월 10일자로 『신한민보』로 신문명이 바뀌었다. 미주 본토인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 최대의 한인단체였던 공립협회와 합성협회(合成協會)가 국민회(國民會)로 통합되었다. 그 결과 미주 본토에 있던 국민회는 『공립신보』를 『신한민보』, 하와이 국민회는 『한인합성회보』를 『신한국보』(新韓國報)로 바꾼 것이다. 국민회는 1910년 2월 미주 본토에 있던 또 다른 한인단체였던 대동보국회(大同報國會)와 통합했다. 통합 명칭은 대한인국민회라고 했다. 대동보국회는 1907년 3월 2일 장경(張景)이 중심이 되어 김우제(金愚濟), 이병호(李秉浩), 문양목(文讓穆), 장인환, 유홍조, 김밀리사, 윤응오, 최윤백, 변창수, 김춘화, 김홍균, 송사원, 양주은(梁柱殷), 백일규(白一圭), 이면식, 방사겸(方四兼), 조성학(趙聖學) 등의 발기로 조직되었다. 대동보국회가 설립되기 전인 1905년에 캘리포니아주 파사데나(Pasadena)에서 대동교육회가 조직되었다. 회장에 김우제, 총무에 장경이 선출되었다. 이 회는 교육진흥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나 본래의 의도는 안창호의 공립협회에 대항하는 데 있었다. 이 회의 중심 인물이었던 장경은 1903년 9월 안창호의 지도로 조직된 상항친목회(桑港親睦會)의 발기인이었다. 친목회가 1905년 4월 공립협회로 변경된 뒤 안창호와 장경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장경이 중심이 되어 공립협회에서 분리, 대동교육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대동교육회는 교육진흥에만 목적을 둔 까닭에 공립협회의 정치적 운동에 비해 활동이 미약하였다. 이 때문에 1907년 3월, 일제의 국권침탈이 강화되고 있던 시대적 상황에 부응해 정치적 운동을 지향하면서 대동보국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설립 취지는 동지의 단결과 민지(民智)의 계발에 있었다. 조직은 중앙회와 지방회로 나누어 운영하였다. 샌프란시스코 웹스트가에 중앙총회관을 두고 스탁톤(Stockton), 프레스노(Fresno), 덴버(Denver), 솔트 레이크시티(Salt Lake City) 등의 다섯 지역에 지방회를 설치하였다. 초대 중앙회장으로 이병호가, 중앙총무에는 장경이 선임되었으며, 백일규, 문양목 등도 회장을 역임하였다. 1907년 9월 24일 중앙총무인 장경은 지회의 설립을 목적으로 중국 상하이(上海)로 출발, 11월 24일 상하이 애이근로(愛以近路) 균익리(均益里) 5가 114호에 상하이 지회를 설립하였다. 기관지로는 1907년 10월 3일부터 간행된 『대동공보』(大同公報, The New Korean World)가 있었다. 처음에는 석판을 사용해 인쇄해오다가 같은 해 11월 21일부터는 국문활판으로 바꾸었다. 사장에는 문양목, 주필은 최영만(崔永萬)이었다.

대동보국회와 대한인국민회는 이후 미주 최대의 한인단체가 되었으며, 『신한민보』는 기간지로서 역할을 했다. 1909년 2월 10일 제119호 즉 개제된 후 1호 1면은 한국지도 위에 한자로 해서체(楷書體)로 “신한민보”라고 제호를 표시했다. 사설란에는 ‘본보의 명칭’이라는 제하의 개제 이유를 밝혔고 국민회의 설립을 축하하는 글을 실었다. 아래 2단은 기서란(奇書欄)과 광고란이 있다. 사설에서 제호의 글자 뜻을 풀이하여 “신한민보는 글자뜻과 같이 우리 대한을 새롭게 하는 우리 국민의 신보라 어이하여 새롭게 한다 함인가. 더러운 때와 추한 먼지를 목욕하겨 신체를 청결히 함도 새롭게 함이오, 10년 적병을 공격하고 요리하여 기혈의 강건을 회복함도 새롭게 함이오, 천년된 늙은 가옥을 헐어버리고 고대광실을 다시 건축함도 새럽게 함이어,… 엄빙설한에 만물이 폐식하다가 춘풍이 다시 더워 초목이 발영함도 새롭게 함이니…”라고 했다.

4 신한민보의 체제와 독립운동 기여

새롭게 태어난 『신한민보』는 『공립신보』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었다. “공립신보와 신한민보는 그 목적도 하나이오, 그 처소도 하나이오, 그 조직도 하나이오 … 그 같지 아니함은 저는 소소한 자체에 한하였되 이는 커다란 우리 국민 전체에 미침이요, 저는 소년 아동 시기에 있었더니 이는 노성한 대장부의 처지를 취함이오, 저는 부속기관의 사용함을 응하였으되 이는 기관을 사용하는 주인의 자리를 누린다 하노라.”라고 하였다. 즉, 『공립신보』는 일개 단체의 기관지이지만, 국민회로 통합된 『신한민보』는 민족 전체의 진일보한 대변기관이라고 주장했다.

『신한민보』 체제는 종전 4단에서 7단(1단 56행, 1행 15자)으로 하여 기사량을 늘렸다. 특색은 사설과 논설을 구별했다는 것에 있었다. 『신한민보』는 주 3회 발행 증간하였다. 하지만 얼마 뒤 주2회, 1920년부터는 다시 주간으로 발행하였다. 1915년 3월 11일자부터는 이대위가 개발한 인터타입의 국문활자 기계를 사용하여 조판하였으며, 1938년 초에 신문사를 로스앤젤레스로 옮겼다.

『공립신보』가 국내에 유입되자 통감부가 이를 즉각 압수했듯이, 『신한민보』 역시 조선총독부에 압수당했다. 『공립신보』와 『신한민보』가 총35회에 걸쳐 1,217부를 압수당했는데, 그 이유는 한국민의 국권회복, 국권회복, 항일정신을 고취시켰기 때문이었다. 『신한민보』의 지향점은 1925년 4월 2일부터 광고로 게재한 「본보의 10계명」을 통해 알 수 있다.

1. 너는 하느님의 주신 우리 민족의 자유독립주의보다 다른 주의를 선전하지 말라. 너의 맡은 사명은 하늘 아래와 땅 위에서 오직 우리 민족의 대연결을 기성함이다. 너는 민족 대연결주의를 포기하면 하나님의 질시하여 너의 자손만대에 벌을 주시리라.
2. 너는 민족 연결주의를 사랑하는 기천만 동포에게 깊은 동정을 주어라.
3. 너는 하느님의 이름을 빌어서 거짓 민족 연결주의자를 삼리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의 죄를 용서치 않으시리라.
4. 너는 예배 4월을 기념하여 이날을 생명일로 지키라. 예배 4일을 일반 독자가 네 주의를 알려고 기대하는 날인 바 이날을 진실하게 지키면 하나님께서 저에게 복을 주시리라.
5. 너는 네 동족의 경제 발전을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주신 생존권이 여기 있느니라.
6. 너는 공리의 죄인이 되지 말라.
7. 너는 소재국 법률 위반되는 일을 선동하지 말라.
8. 너는 헛된 명예를 도적질하지 말라.
9. 너는 남의 사실없는 말로 무함하지 말라.
10. 너는 남의 재산을 탐하지 말며 남의 헌법적 결사 자유를 침범하지 말며, 남의 헌법적 동등권을 방해치 말라.

『신한민보』는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민족의 단결을 강조했다. 1910년대 중반부터 해방직전까지 미주 교포사회는 박용과 이승만, 동지회와 국민회 간의 갈등과 반목의 연속이었다. 『신한민보』가 민족의 단결을 이렇게 강조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신문의 구성은 논설을 비롯하여 미주, 국내, 원동 소식과 임시정부 활동, 미국유학생, 미주한인들의 동향이 소개되어 있다. 아울러 신문에는 대한인국민회 관련 공지사항, 공지 사항 등도 실렸다. 투고와 번역, 소설, 개인의 주장, 교양, 시사의 번역 등이 신문에 연재되었다. 신한민보는 1990년대까지 실로 미주한인들의 실상과 인식을 파악할 수 있는 다양한 내용들이 실려 있었다. 『신한민보』는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되자 이를 적극 지원했으며, 윤봉길 의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 충칭(重慶)으로 옮겨가자 이를 지속적으로 지지하고 재정지원을 했다. 한편으로 대한인국민회 회원들은 『신한민보』를 통해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중심으로 미주한인의 단결을 지속적으로 외쳤다.

대한인국민회 수뇌들은 『신한민보』 영문란을 만들었다. 1937년 3월 4일자 제4면에는 영문으로 편집하였다. 이날 국문 논설 「영문란에 대하여」라는 글에 따르면, 영문란을 별도로 작성한 목적은 국문 혹은 국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미주한인 2세대들을 대상으로 민족, 독립 그리고 항일의식을 고취하고자 하는 것에 있었다. 영문란을 만든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한국에 관심 있는 미국인 독자들에게 일본에 핍박받은 한국 실정과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한국 독립운동의 실상을 알리고 그들로부터 지원을 받기 위함도 있었다.

『신한민보』 국문 주필로는 정재관, 최정익, 이항우, 강영대(姜永大), 박용만(朴容萬), 이대위, 김현구(金鉉九), 김여식(金麗植), 백일규, 신두식, 홍언(洪焉) 등이었다. 영문 주필로는 훗날 『한국의 소리』를 이끌었던 김용중, 박상엽, 전앨른 등이었다. 식자업무를 맡은 사람은 김형필, 김종림, 정도원, 전성덕 등이었다.

신문 발간 비용은 대한인국민회 지원과 미주한인들의 신문 구독료에 의존했다. 구독료가 제대로 걷히지 않을때도 많았다. 이에 신문을 통해 신문사의 재정 능력의 한계를 소개하는 글들이 많이 소개되었다. 1909년 이후 몇 차례 장기 휴간된 것도 재정부족에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미주 본토에서 적지 않은 신문이 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단기간에 그치고 말았지만, 『신한민보』는 해방을 거쳐 1990년대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재미한인오십년사』의 저자 김원룡은 『신한민보』의 공로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썼다.

이민동포의 문맹퇴치와 성인교육에 진력하였으며, 조국의 국권이 상실되던 때로부터 해외에 고립하여서 기사마다 말 끝마다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독립운동 촉진 강화에 봉사하였으며 조국해방 이후에 끝끝내 남북통일과 민족의 자유 행복을 부르고 있다.

이처럼 『신한민보』는 일본이 한국을 점령한 시기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신문이라는 지면을 통해서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며, 인종차별이 가장 심했던 미주에서 미주한인들의 단결을 외쳤다. 그리고 나이 어린 학생들이 미국 고등교육기관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독려했다. 무엇보다 태평양전쟁 이후 미주한인과 재중 독립운동가들의 역량 결집을 이끌어 냈다. 그리고 해방이 될 때까지 미국을 상대로 한국 독립을 역설했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 재건을 위해 한국인들 구호에 앞장섰으며, 6·25전쟁이 터지자 남한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신한민보』는 반독재를 외치며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한국 독재의 피해상을 미국 정계에 소개하며 민주화 운동에 불을 지폈던 것이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