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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신흥 강습소]

한국 독립군 양성의 산실

1919년 ~ 1920년

신흥무관학교 대표 이미지

신흥학교 학생들이 농사짓는 모습

독립기념관

1 압록강을 건넌 명문가의 후손들

1910년 3월 신민회(新民會) 총감독 양기탁(梁起鐸)은 자신의 집에서 신민회 간부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국외에 독립군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립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독립군기지를 개척하기 위해 각 지역의 담당자를 선임하였는데, 이회영(李會榮)은 서간도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이회영은 즉시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경비 마련에 착수하였다.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나라가 망하자, 9월 이회영은 독립군기지를 물색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이동녕(李東寧)·장유순(張裕淳) 등과 함께 상인으로 변장한 이회영 일행은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일대를 시찰한 뒤 11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이회영은 형제들을 모아 중국 망명을 제의하였고, 형제들은 선뜻 동의하였다. 이회영 일가는 당시 이른바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불리던 명문거족이었음에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망명길에 모두 동참하였다. 이들 6형제는 망명 자금 마련을 위해 모든 재산을 헐값으로 팔아 약 40만 냥, 오늘날 금액으로 약 600억 원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당시 백미 1석이 3원 남짓하던 시절이었다. 이 재산의 대부분은 고종(高宗)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의 양자로 들어간 이석영(李石榮)이 물려받은 재산이었다. 이 자금은 초기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의 초석을 닦는 토대가 되었다.

1910년 12월 30일, 이회영을 포함한 6형제 일가 50~60여 명은 예닐곱 대의 마차로 압록강을 건넜다. 그리고 2월 초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 추가가(鄒家街)에 도착하였다. 이회영 일가의 망명길을 전후하여 서울을 중심으로 이동녕과 사촌 이장녕(李章寧) 일가, 장유순·장도순(張道淳)·장한순(張澣淳) 형제 일가, 김창환(金昌煥)·이관직(李觀稙)·윤기섭(尹琦燮)·여준(呂準)·주진수(朱鎭洙) 등이 망명하였고, 안동 일대에서는 이상룡(李相龍)·이준형(李濬衡) 부자와 이상룡의 동생 이봉희(李鳳羲)·이문형(李文衡) 부자 등 일가, 김대락(金大洛)·김형식(金衡植) 부자 일가, 김동삼(金東三) 일가와 문중 청년들, 유인식(柳寅植) 일가, 황호(黃濩)·황만영(黃萬英)·황도영(黃道英) 일가, 이원일(李源一) 일가, 이희영(李羲榮) 형제 일가가 동참하였다. 경북 선산에서는 허위(許蔿)의 처와 가족, 그리고 형 허혁(許赫) 일가, 허형(許衡)·허발(許坺) 부자 일가, 권팔도(權八道) 일가 등 전통 명문가 출신의 100여 가구가 가족들을 이끌고 망명 대열에 합류하였다. 안동 혁신유림들의 망명은 신민회원인 주진수·황만영을 통해 신민회의 독립군기지 개척 소식을 전해 듣자, 이상룡·김대락·황호 등 세 문중의 원로가 나서며 추진된 것이었다.

2 경학사-부민단-한족회로 이어지는 민단자치기관

1911년 2월부터 유하현 추가가에 정착한 이들은 4~5월경 추가가 마을 뒤편 대고산(大孤山)에 모여 노천대회(또는 군중대회)를 열었다. 300여 명이 모인 이 대회에서 결정한 사항은 ‘민단적 자치기관의 성격을 띤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한다.’는 것과 ‘기성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하여 기간장교로 삼고 애국청년을 수용하여 국가의 동량인재를 육성한다.’는 것이었다. 이 결정에 따라 이회영 등 6형제와 서울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발기하고 「경학사 취지서」를 작성·발표하여 경학사를 설립되었다. 경학사 사장은 이상룡, 내무부장 이회영, 농무부장 장유순, 재무부장 이동녕, 교무부장 유인식이었다. 이 진용은 1912년 전반기로 추정된다.

그러나 1911~12년 계속된 대흉년으로 재정 조달이 힘들게 되자, 경학사는 1912년 가을부터 사실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회영·이동녕·이관직·장도순 등은 경학사 운영에 필요한 자금 모집을 논의한 결과, 국내에서 자금을 모집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이관직·장도순이 국내로 파견되었다. 이런 와중에 1913년 3월 수원에 사는 동지 맹보순(孟普淳)으로부터 일제가 이회영·이동녕·이시영·장도순 등을 체포·암살하기 위해 형사대를 파견하였으니 피신하라는 연락이 왔다. 이 소식을 접하고 이동녕 등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그리고 이시영은 봉천(奉天)으로 갔다. 다만, 이회영은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하여 국내에서 자금을 모집하겠다며 국내로 입국하였다. 이로 인해 경학사 활동은 사실상 중지되었다.

경학사 활동이 흐지부지되자, 김대락 등은 1913년 음력 6월 공리회(公理會)를 조직하여 공백을 메우고자 하였다. 그러다가 1915년 겨울(또는 1916년 초) 경학사의 뒤를 이어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였다. ‘부민’이란 만주 땅 부여(扶餘) 유민이 부흥결사를 세운다는 의미와 함께 이주민들을 부양한다는 의미에서 부쳐진 것이다. 부민단 중앙기관은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 두었고, 초대 단장은 허혁이 맡았다. 부민단은 6천 명 이상 되는 한인마을을 관장하면서 한인 보호와 행정사무, 중국과의 교섭과 분쟁 해결 등 자치기관으로 역할을 하였다. 이후 부민단은 3·1 운동 이후 한족회로 개편되었다.

3 무관 학교 설립과 운영

경학사 조직 후 이회영·이동녕·이관직·이상룡·윤기섭 등은 1911년 6월 10일(음력 5월 14일)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신흥’이라 이름한 것은 신민회의 ‘신(新)’자와 다시 일어나는 구국투쟁이란 의미의 ‘흥(興)’자를 합친 것이다. 그리고 학교보다 등급이 낮은 강습소라고 한 것은 중국 당국과 일제 관헌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추가가 마을의 중국인들이 이들을 일본인의 앞잡이로 의심하며 제대로 협조해주지 않는 바람에 허름한 빈 집 옥수수 창고를 빌려 개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열악한 시설로는 제대로 된 군사훈련과 교육을 시킬 수가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회영은 동삼성(東三省) 총독과 원세개(袁世凱)에게 청원을 한 끝에 토지매입에 대한 승낙을 얻어냈다.

그리하여 1912년 4월 합니하에 새로운 부지를 마련하여 공사한 끝에 7월 하순 낙성식을 가졌다. 새 교사는 학년별로 널찍한 강당과 교무실이 마련되었고, 내무반을 비롯한 사무실·숙직실·편집실·나팔반·식당·취사장·비품실 등이 갖추어지는 등 규모를 갖추었다. 합니하로 이전한 후 앞선 추가가 학교는 소학교 교육과정을 가르쳤고, 합니하 학교는 중학교 과정과 따로 군사과를 두어 무관을 양성하였다. 때문에 학생들은 합니하 학교를 ‘신흥 중학교’ 또는 ‘신흥무관학교’라고 부르거나 인식하였다. 그러나 공식명칭은 여전히 신흥 강습소였다. 여하튼 합니하 학교 건립은 중국과의 타협을 마무리한 이회영과 자신의 재산을 몽땅 쏟아 부은 이석영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초기 추가가 학교 시절 교직원은 교장 이동녕, 교감 김달(金達), 학감 윤기섭(尹琦燮), 교사 이갑수(李甲秀)·이규룡(李圭龍)·김순칠(金舜七)·장도순(張道淳)이었고, 교관은 김창환(金昌煥)·이세영(李世永)·이장녕(李章寧)·양성환(梁聖煥)·이관직(李觀稙) 등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이었다. 이들 교관은 이회영이 망명 전부터 무관학교 출신들을 섭외하여 초빙한 인사들이었다. 때문에 군사훈련은 사실상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와 다를 바 없었다. 교과목은 보병·기병·포병·공병 등으로 나뉘어 육군형법·편제학·훈련교범·측량학·위수복무·전략·전술 등이었다. 창립 당시 본과와 군사과(속성과)로 나뉜 편제는 합니하로 이전한 후 4년제 본과와 6개월 혹은 3개월 과정의 속성과를 두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훈련받고 졸업한 학생은 1911년 12월 제1회 졸업생 40여 명을 배출한 후 1918년까지 약 800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4 졸업생들이 만든 신흥 학우단과 백서농장

신흥 학교 졸업생들은 졸업 후 독립군이 되거나 아니면 2년 동안 의무적으로 동포들을 상대로 교육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독립군 부대가 없던 현실 속에서 졸업생들은 대안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1913년 5월 교장 여준(呂準)과 1회 졸업생 김석(金石)·강일수(姜一秀)·이근호(李根澔) 등이 신흥 교우단(1915년 4월 신흥 학우단으로 개칭)을 조직하였다. 이는 졸업생들이 조국광복을 위한 혁명대열에 투쟁한다는 의지로 조직한 것이었다. 학우단 구성은 졸업생뿐 아니라 교직원과 재학생들도 포함되었다. 교직원과 졸업생은 정단원, 재학생은 준단원이었고, 단장을 중심으로 총무부·편집부·운동부·토론부·조사부·재정부 등의 부서를 두었다. 1회 졸업생 김석이 초대 단장, 이근호가 총무부장, 강일수가 편집부장을 맡았다. 신흥 학우단은 『신흥 교우보(후에 신흥학우보로 개칭)』를 발행하여 신흥 학교의 활동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만으로 독립을 위해 즉각 싸우고자 했던 신흥 학교 졸업생들의 열기를 달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신흥 학우단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장차 독립전쟁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독립군영(獨立軍營)을 마련하였다. 그것이 1914년 말 통화현 팔리초(八里哨) 소백차(小白岔)에 마련된 백서농장(白西農莊)이었다. ‘백서’란 백두산 서쪽이라는 의미였고, ‘농장’은 학교와 마찬가지로 중국당국과 일제 관헌의 눈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백서농장은 1914년 가을부터 학우단 단원들이 직접 벌목하여 병사(兵舍)를 마련하였다. 병사는 장주실(莊主室)·훈독실(訓督室)·총무실·의무실·경리실·수품실(需品室)·농감실·교도실·교관실·강당·중대장실·소대장실·치료실·식당·취사실·창고, 그리고 각 부대의 병사실과 동서남북에 호를 파고 건물을 지어 전초(前哨) 막사로 사용하는 등 대단한 규모였다. 백서농장 장주는 ‘만주의 호랑이’로 불렸던 김동삼이었다. 1915년 봄 처음 입영한 사람은 385명에 달하였고, 신흥학교 1회부터 4회 졸업생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은 둔전병제로 농사를 지으면서 군사훈련을 받으며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또한 신흥학교 규정에 의해 각 지역에 소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신흥학교가 독립사관 양성소라면, 백서농장은 졸업생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독립군 부대로 정예훈련을 받기 위한 조직이었다. 그러나 4년 간 먹을 것이 없어 영양실조에 걸리면서까지 정예군대를 만들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견뎌냈던 이 군영은 3·1 운동 직후 해체되었다. 부민단의 뒤를 이어 조직된 한족회(韓族會) 총회에서 백서농장이 교통이 불편하여 운수(運輸)·왕래가 어렵고 수토(水土)가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해체를 결정한 것이었다. 백서농장 병사들은 고별식을 갖고 유하현 삼원포로 떠났다.

5 한족회 창립과 세 번째 무관 학교

1919년 3·1 운동 소식을 전해들은 유하현 삼원포에서는 200여 명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만세시위 이튿날인 3월 13일, 부민단은 자신계(自新契)·교육회 등을 통합하여 한족회(韓族會)로 확대·개편되었다. 한족회는 유화현·통화현뿐 아니라 해룡·임강·집안·환인·흥경현 등 한인 주민 1만여 호 약 6만여 명을 관장하였다. 한족회는 일종의 임시정부로 군정부(軍政府)를 설치하였다. 그후 1919년 9월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통합되자, 임시정부와 한족회는 타협을 한 끝에 11월 한족회의 군정부를 임시정부 산하로 편입시키고 명칭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하였다.

한편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 열기가 고조되면서 신흥무관학교를 찾는 한인들이 급증하였다. 이들을 다 수용하기 어렵게 되자, 1919년 5월 3일 유하현 고산자(孤山子)의 하동(河東) 대두자(大肚子)로 학교를 이전 및 개교하였다. 고산자의 무관학교가 본교가 되자, 합니하의 학교는 분교로 두고 김창환을 교장에 임명하여 운영하게 하였다. 얼마 후에는 통화현 7도구 쾌대무자(快大茂子)에도 분교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고산자 무관학교로 이전하면서 교육과정도 달라졌다. 장교반(6개월)·하사관반(3개월)·특별훈련반(1개월) 과정으로 나누어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단기 속성과정의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밖의 지방에서도 결사대 조직 등의 목적으로 17~30세 남자들을 모집하여 3개월간의 속성 군사훈련을 시키는 교육장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고산자 무관 학교 설립을 전후하여 일본군과 중국군에서 활동하던 한인 장교들이 합류하였다.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는 현역 일본군 보병 장교였던 지청천(池靑天, 일명 이청천李靑天), 일본군 기병 중위 김광서(金光瑞, 일명 김경천金擎天), 일본 육사 출신의 신팔균(申八均) 등이 합류하였고, 중국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 중국육군강무학교)을 졸업한 이범석(李範奭) 등도 합류하였다. 이들의 합류 소식 이후 무관학교를 찾아오는 청년들은 더욱 급증하였다. 대한청년단연합회 안병찬(安秉瓚)을 비롯하여 서간도 일대 독립운동단체에서도 신흥무관학교에 군사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내 각지에서는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기 위하여 ‘무관 학교생도 모집사건’이 발생할 정도였다.

신흥무관학교가 번창하자, 1919년부터 중국 당국의 탄압이 노골화되었다. 1920년 1월 일본의 사주를 받은 중국 관헌은 한족회와 독립단의 해산을 명령하는 한편, 본부를 습격하여 신문사와 학교 등을 폐쇄하고 서류와 기타 자료 등을 몰수하였다. 그리고 1920년 5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중일 합동수색대를 편성하여 서간도 일대 독립운동세력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중국 동삼성(東三省) 순열사 장작림(張作霖)과 결탁한 일제의 합동수색대는 8월까지 유하현을 비롯한 인근 독립운동 근거지를 습격하여 독립운동가들을 체포·살해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피해 신흥무관학교 생도와 졸업 군인들이 1920년 7월경 안도현(安圖縣)으로 이동하게 되자,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8월경 자연스레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6 신흥을 거쳐 간 사람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12월부터 1920년 8월까지 10여 년간 독립군을 양성하며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한다. 이들은 각 지역에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과 독립운동에서 지도자로서 역할을 하였다.

서간도 망명과 신흥 학교를 창립했던 1세대 그룹의 활동은 항일무장투쟁을 지도하였다. 1919년 2월 만주 길림에서 39명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할 때, 김동삼·여준·이동녕·이상룡·이세영·이시영·이탁(李沰)·허혁 등 8명이 신흥 관계자이다. 신흥학교 설립 주체였던 이회영은 신채호(申采浩)와 더불어 북경을 중심으로 전개된 아나키즘운동의 원로였고, 이시영(李始榮)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시 법무총장으로 선임된 이래 줄곧 국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회영 일가와 초기 정착한 이상룡은 1925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國務領)에 선임되었고, 이동녕은 1919년 4월 상해에서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이 조직될 당시 의장직을 수행한 뒤 임시정부 국무령과 주석을 역임하였다. 김동삼은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의장을 거쳐 통의부(統義府) 중앙집행위원장, 정의부(正義府) 참모장, 민족유일촉진회 위원장을 지냈다. 신흥 학교를 줄곧 지켰던 윤기섭은 1920년 임시정부에서 군무부장 등을 거쳐 민족 혁명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고, 김형식은 정의부 중앙행정위원, 이세영(李世永, 일명 이천민李天民)은 통군부(統軍府) 군사부장, 통의부 참모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서로군정서는 신흥 학교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였다. 서로군정서 독판 이상룡, 부독판 여준을 비롯한 주요 간부가 신흥 학교 운영 인사들이었고, 사령관 이청천은 교관 출신이었다. 또한 사령부의 군사 대부분도 신흥 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되었다. 또한 김좌진이 이끌었던 대한 군정서(大韓軍政署, 일명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도 신흥 학교 출신자들이 주요 간부로 참여하였다. 북로군정서 조직 시 무관 학교 교관 이장녕·이범석을 비롯하여 졸업생 김훈·김춘식·오상세·박영희·백종렬·강화린·최해·이운강 등이 교관으로 초빙되었다. 이장녕은 참모장, 박영희는 사령부 부관 및 연성소 학도단장, 김훈·오상세·백종렬·강화린·이운강은 종군장교와 소대장으로 활약하였다. 특히 이들은 1920년 10월 일본군을 대파하였던 청산리 대첩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11월 길림에서 결성된 의열단(義烈團) 역시 신흥 학교 출신들이 주도·결성한 단체였다. 김원봉(金元鳳)·강세우(姜世宇)·권준(權晙)·서상락(徐相洛)·신철휴(申喆休)·이성우(李成宇)·이종암(李鍾岩)·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 등 창립멤버 13명 중 8명이 그들이다.

1930년대에는 북만주와 동만주 일대에서 활동한 한국 독립군 총사령을 이청천이 맡았고, 남만주 일대의 조선혁명군 참모장 김학규(金學奎)도 신흥 출신이었다. 1940년대 한국 광복군 창설의 주역도 신흥 출신인 이청천·이범석·김학규였다. 이청천은 광복군 총사령부 총사령, 김원봉은 제1지대장, 이범석은 제2지대장, 김학규는 제3지대장을 맡는 등 신흥 출신들이 핵심 간부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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