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근대
  • 육영공원

육영공원[育英公院]

신지식으로 무장한 관리를 양성하다

1886년(고종 23)

1 개요

육영공원(育英公院)은 1886년(고종 3) 9월 조선 정부가 최초로 미국인 교사를 고용하여 세운 영어학교이다. 서양의 언어와 지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대내외 정치 외교에 활용하고자 했던 조선 정부의 의지가 담긴 교육 기관이기도 하다. 신지식에 능통한 관리를 양성하고자 했으나 파행적인 운영 탓에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고 1894년 폐원되었다. 이후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와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로 그 맥이 이어졌다.

2 미국식 교육제도의 도입

육영공원의 설립은 조선 정부가 1882년 5월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이후 정부(官)의 주도 아래 서양식 교육 제도를 받아들이는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83년 조선에 초대 주(駐)조선 미국공사로 부임한 푸트(Lucius Harwood Foote)는 고종에게 고위 관료의 자제들이 영어, 지리과학 및 다른 서양 문화의 기본적인 요소를 배울 수 있는 학교를 설립할 것을 권유하였다. 더불어 1883년 보빙사(報聘使)로 미국에 다녀온 홍영식(洪英植) 또한 귀국 후 고종에게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미국의 교육 제도를 본받아 인재를 양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여러 의견을 종합한 결과 1884년 6월 고종은 미국공사 푸트에게 서양식 교육을 실행할 학교를 설립할 뜻을 밝히고, 미국인 교사 3명을 추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다만 1884년 12월에 갑신정변(甲申政變)이 발생하면서 개화 정책의 추진은 잠시 주춤하였으나, 1886년 1월 양국 사이에 교사 고용에 관한 계약이 체결되면서 그해 7월 4일 미국인 교사 3명이 조선 땅을 밟게 되었다.

육영공원의 교사로 파견된 미국인은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길모어(George William Gilmore), 벙커(Dalzell Adelbert Bunker)로, 모두 대학을 졸업한 2~30대의 젊은 선교사였다. 이들은 비록 교육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조선에 미국의 교육 시스템을 적용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헐버트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행이 결정된 1885년 4월부터 조선에 도착하기까지의 1년 3개월 동안 그는 미국 국무부 교육국장 이튼(John Jr. Eaton)을 만나서 조언을 구하고 미국의 공립학교 체계를 연구하는 등 조선에서의 학교 운영에 적잖은 대비를 하였다.

3 육영공원과 동문학

교육을 담당할 미국인 교사가 내한하자, 조선 정부는 육영공원을 내무부(內務府) 관할 아래 두고 미국인 교사들과 함께 학교 운영에 관한 규칙을 설정하는 등 육영공원의 개원(開院)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당시 조선에는 이미 동문학(同文學)이라는 외국어 교육 기관이 있었다. 동문학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소속으로, 외교 업무를 담당할 통역관이나 실무관리를 양성할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외무부서에 소속된 동문학과 달리 외국어 교육 기관을 내무부 산하에 두었다는 것은 청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개화 정책을 추진하고자 하는 고종의 의지가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미 외국어 교육 기관인 동문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정부가 육영공원을 설치하려는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육영공원의 기본적인 교육 목적은 외국과의 교제에 필요한 어학능력을 갖춘 관리를 양성하고, 더 나아가 농업, 상업, 공학, 의학 등에 관한 서양의 지식과 기술을 도입하는 것에 있었다. 육영공원 운영을 담당하는 관리로 선발된 민종묵(閔種默)은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육영공원은 서양어뿐만 아니라 서양학 또한 가르치는 기관이었다. 여기서 서양학이란 군사, 산업 기술에서부터 정치, 법률 제도에 관한 것까지 광범위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실제 정치와 외교에서 활용하기 위한 목적의 서양학은 더 높은 지위의 관리가 습득해야 하는 지식이었다. 따라서 육영공원의 설립 목적은 이전의 문신(文臣)들이 한문을 익혀 중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선진 문물을 도입했던 것처럼, 영어를 비롯한 서양의 지식을 습득하여 외교와 내치(內治)에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중견 관리를 양성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육영공원의 학생 선발 기준 역시 동문학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동문학이 만 15세 이상의 청년을 대상으로 학생을 모집했다면, 육영공원은 우선 좌원(左院)과 우원(右院)으로 대상을 양분하였다. 좌원에는 과거에 급제한 참하관(參下官) 중 젊고 재주가 있는 자를 대상으로 10명을 선발하였고, 우원에는 재주가 있고 총명한 자들 중 15세에서 20여 세인 자를 대상으로 20명을 선발하였다. 좌우원을 통틀어 모든 학생은 정부 관리(堂郞)의 자제 혹은 친척 중에서 추천을 받은 자여야 했다. 따라서 학생의 대부분은 양반 고관의 자제였으나 일부는 중인 출신인 것으로 확인된다.

4 육영공원의 교육과 운영

육영공원은 미국공사관이 위치해 있고 선교사들이 모여 살던 정동(貞洞)에 교사(校舍)를 마련하고 1886년 9월에 개원하였다. 헐버트의 기록에 따르면, 교실에는 참나무 책상과 등받이 없는 의자가 놓여 있었고, 강단과 대충 만든 칠판도 놓여 있었다.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것이라고는 종이와 연필이 전부였다. 교과서마저 없었다. 그럼에도 미국인 교사들은 수업 시수를 체계적으로 계획하여 학생을 지도하였다. 좌원은 매일 오전 7시에 등원하여 오후 5시에 하원하였고, 기숙사 생활을 했던 우원은 오전 6시 기상, 오후 10시에 취침하였다. 수업은 좌우원 구분 없이 하루에 6시간으로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한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였다.

학교 운영에 관한 규칙인 「육영공원절목(育英公院節目)」에 따르면 교과목은 대산법(大算法, 수학), 각국 언어, 지리학, 천문학, 기술학, 생리학, 식물학, 동물학 등을 포함한 만물학(萬物學), 각국 역사, 정치(각국 조약법 및 부국용병의 기술) 등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실제로 가르쳤던 것은 어학 외에 초등 보통학(普通學), 약간의 국제법과 정치경제학 정도였다고 한다. 학생의 학습 정도를 평가하기 위한 시험은 월별, 연도별로 시행되었고 3년마다 시행하는 시험에서는 우수한 성적으로 뽑힌 자에게 관직을 수여하는 규정 또한 마련되어 있었다.

헐버트를 비롯한 미국인 교사들은 조선 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조선어를 빨리 익히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밖에도 헐버트는 서양의 지리학, 역사, 수학, 정치경제학, 국제법 등의 기본서들을 학생이 배우기 쉬운 한국어로 번역하고자 하였다. 그중에서도 그는 조선인에게 가장 필요한 과목이 세계지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거기에는 일반 지리학에서는 배울 수 없는 정부, 세금, 산업, 교육, 종교, 군사, 식민지 등의 중요한 문제들이 포함되어야 했다. 학생들이 이를 통해 세계지도를 살피면서 각국이 이룬 부(富), 문화, 국력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헐버트는 자신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의 도움을 받아서 영문판 세계지리서를 축약하는 방식으로 교과서 집필에 착수하였다. 그 산물이 바로 1890년 12월에 출판된 한국 최초의 순한글 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士民必知)』였다.육영공원의 초기 교육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좌우원 모두 열성을 갖고 학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매월 시행했던 월례시험의 성적 또한 학생들이 새로운 교육 내용을 잘 습득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만한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들의 학습은 부진해졌다. 그러한 현상은 특히 젊은 현직 관리였던 좌원에게서 많이 나타났다. 좌원의 경우,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매일 6시간씩 학원에 나가 수업을 듣는 일은 과중한 부담이 되었다. 고종은 좌원의 학업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3일에 한 번씩 출석할 수 있도록 조치해주었으나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은 육영공원의 학생 선발 숫자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1886년 개원 당시 선발된 학생 35명 중 좌원이 14명, 우원이 21명이었던 반면, 이듬해의 선발 인원 20명 중 좌원은 6명에 불과했다. 1889년에 마지막으로 신입생 57명을 모집했을 때는 좌원은 한 명도 없이 모두 우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좌우원으로 구별하여 학생을 선발하였던 초기 목적이 무색해졌던 것이다.

또한 아직 등과(登科, 과거에 합격한다는 의미)하지 못한 우원의 경우 1886년에 입학한 21명 중 12명이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1887년 이후로는 단 한 명만이 급제하였다. 이는 우원들 사이에 육영학원에서의 학습이 관직 진출에 유리한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인식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 준비를 계속해야 했던 우원의 학생들은 자연히 육영공원의 학업에 충실할 수 없었다. 정부는 육영학원 학생들의 학업을 장려하기 위해서 1889년 ‘육영학원응제(育英學員應製)’라는 별도 시험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육영학원응제시(育英學員應製試)에서는 점수에 따라 문과 전시(殿試, 초시, 복시, 전시로 구성된 문과 시험 중 최종 단계로 합격자 33명의 순위를 정하는 시험)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거나, 하급 관리직인 주사(主事)에 임명하거나, 혹은 진사시에 합격한 것과 동일한 자격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응제시의 내용은 육영공원의 교육 내용인 영어나 서양학이 아닌 유학(儒學)이었으므로 우원의 학생은 신지식 학습과 함께 다른 유생들과 마찬가지로 유학을 공부해야만 하는 이중의 학업 부담에 놓여 있었다.

5 육영공원의 폐원과 그 의의

육영공원의 파행적 운영은 학생들의 학업 부진뿐만 아니라 미국인 교사의 임금 체불이 지속되었던 것에서도 기인했다. 당시 미국인 교사의 임금은 해관(海關) 수입에서 지급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해관 수입은 정부 대외차관의 원리금을 상환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상황에서 해관 수입을 기반으로 한 임금 지불은 자꾸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주조선 미국공사의 주된 업무가 이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라고 조선 정부에 독촉하는 것일 정도로 정부의 재정 상태는 좋지 않았다.

재정 문제는 육영공원의 운영이 파행적으로 진행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세 명의 미국인 교사는 1888년, 1891년, 1894년에 길모어, 헐버트, 벙커 순으로 사임함으로써 육영공원의 폐원은 기정 사실화되었다. 마지막 교사였던 벙커가 사임 의사를 내비쳤을 때, 고종은 뒤늦게나마 새로운 교사를 구하고자 진력하여 일본 고베의 미국영사관에 근무하던 닌스테드(Ferdinand Nienstead)와 강화도의 해군무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영국인 허치슨(W. F. Hutchison)을 초빙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고용된 기간에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청일전쟁 이후인 1895년 5월 닌스테드는 해고되고, 「외국어학교관제(外國語學校官制)」가 공포된 뒤 허치슨과 남은 학생들은 관립영어학교로 전적하여 영어 교육을 이어나갔다.

앞서 언급했듯, 육영공원의 본래 취지는 외국어와 신지식에 능통한 관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존의 관료 시스템은 여전히 전통 유학의 영향 아래 있었으므로 학생들의 신지식 학습에 동기를 부여하기가 어려운 근본적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10년간 이어진 육영공원의 교육은 이후 관립영어학교와 한성외국어학교가 설립되어 영어 교육을 지속할 수 있는 인적·물적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