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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학당[梨花學堂]

근대 여성 교육의 기틀을 세우다

1886년(고종 23)

이화학당 대표 이미지

이화학당

이화역사관

1 개요

이화학당(梨花學堂)은 1886년(고종 23) 미국 북감리교(北監理敎) 선교사였던 메리 스크랜턴(Mary Fletcher Scranton)이 설립한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이다. 여성 교육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던 1880년대부터 꾸준히 교육을 실시하여 식민지 시기의 이화여자전문학교(梨花女子專門學校), 해방 후의 이화여자대학교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 여성 교육의 효시(嚆矢)로서 의의를 지닌 교육 기관이다.

2 ‘배꽃 핀 골에 세운 학당’, 이화학당

1886년 2월, 서울 풍경이 잘 보이는 정동(貞洞) 32번지 언덕에 건물을 짓고 기와를 올리는 부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한국 여성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이 곧 시작될 것임을 알리는 소리였다.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 이화학당의 교사(校舍)가 완공된 것은 그로부터 약 9개월 후인 1886년 11월이었다. 봄이면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언덕에 자리한 이화학당은 약 200평 정도 되는 큰 기와집에 35명가량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교실과 교사 숙소를 갖추고 있었다.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운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의 표현에 따르면 ‘서울에서 가장 좋은 전망을 가진 집’이기도 했다. 이렇듯 조선에 여성 교육을 전담하는 최초의 교육 기관이 세워지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많이 알려져 있듯이,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의 영향으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점차 격하되었다. 자연히 여성 교육의 필요성 또한 경시되었다. 유교 사회에서 여성은 어디까지나 가부장의 권위 아래 종속된 존재로, 그 사회적 역할을 제한받았다. 이러한 분위기가 바뀔 조짐이 나타난 것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였다. 조선에 서학(西學)이 유입되고, 개항 이후 조직된 여러 시찰단(視察團)이 다른 나라의 문물을 소개하면서 기존의 성리학적 질서에 균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1880년대 개화파(開化派)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유길준(俞吉濬) 등은 모두 여성의 지위 향상과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 개화파 인사의 의견은 실제 개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구상에 그쳐 버린 한계가 있었다.

반면, 더 적극적으로 조선에서 ‘여성 교육’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이가 바로 이수정(李樹廷)이다. 이수정은 1882년 수신사(修信使)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가 그곳에서 일본의 기독교인인 농학자 츠다 센(津田仙)의 가르침을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일본 여성을 위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인 미션스쿨(mission school, 선교 학교)을 방문하고는 조선의 여성 또한 교육받을 필요와 권리가 있음을 절감하였다. 이듬해인 1884년, 그는 미국 감리교 해외 여선교회(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 편지를 써 조선에 여성 교육을 담당할 여선교사를 파견해줄 것을 청원하였다.

3 스크랜턴 부인과 조선의 여성 교육

미국 감리교 해외 여선교회에서 조선을 담당할 여선교사로 파견한 사람이 바로 메리 스크랜턴이었다. 그는 미국의 명문 북감리교 목사 집안 출신으로, 아들인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부부와 함께 1885년 조선에 도착하였다. 의사였던 아들 윌리엄은 방한 후 한동안 알렌(Horace Newton Allen)을 도와 제중원(濟衆院)에서 의료 및 선교 사업을 펼치다 이후 독립하여 감리교 병원인 시병원(施病院)을 건립하게 된다. 여성 교육을 담당하고자 했던 메리 스크랜턴은 외국인에 익숙하지 않고, 부녀자의 외부 출입을 꺼리는 조선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초창기 외국인 선교사로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개항 이후 조선에서는 민간과 정부 모두 남성 교육에 있어서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신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대표적으로 1883년 원산에서 민간 주도로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적 교육 기관인 원산학사(元山學舍), 1886년 정부 주도로 미국인 교사를 초청해 양반 자제를 가르쳤던 육영공원(育英公院) 등이 있다.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 역시 남학생을 위한 학교였다. 당시로서는 여성이 과거 급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신교육을 통한 사회 진출 또한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특히 배재학당에는 신학문과 영어를 배워 출세하고자 하는 청년들이 몰려들었던 점을 감안할 때, 이처럼 교육과 관련된 직접적인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점은 여성들의 학구열을 끌어올리기 어려운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더욱이 여자아이들은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되는 일손이었고, 가난한 하층민의 경우 딸을 남의 집 종(婢)으로 보내 가정경제에 보태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부모들은 좀처럼 딸을 선뜻 기숙학교에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메리 스크랜턴은 서울에 도착한 직후부터 가르칠 여학생을 모집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외국인이 규중(閨中)에 사는 상류층 여성과 접촉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모집대상을 가난한 집의 아이나 고아로 바꾸고자 하여도 여의치 않았다. 여자아이들은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되는 일손이었고, 가난한 하층민의 경우 딸을 남의 집 종(婢)이나 첩으로 보내 가정경제에 보태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부모들은 딸을 선뜻 기숙학교에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1886년 5월 말, 오랜 기다림 끝에 학당의 문을 두드린 첫 학생은 김 부인으로, 고관의 첩이었던 그는 영어를 배워 왕비의 통역이 되고자 하는 뜻을 품고 있었다. 배움에 상당한 열성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불행하게도 병이 들어 3개월 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 부인 이후 다른 소녀들의 입학 역시 조금씩 이어졌지만, 학생 모집이 어려운 점은 여전했다. 한 가지 사례를 통해 당시 여학교의 학생 모집이 어려웠던 상황을 짐작해보자. 김 부인이 입학한 지 약 한 달 뒤, 자식을 부양할 수 없던 가난한 어머니가 스크랜턴을 찾아와 딸을 맡기고 갔다. 그러나 이내 곧 그 어머니가 아이를 다시 데려가겠다고 찾아왔다. 사정을 들어보니, 이웃 사람들이 어미를 비정하다고 비난하면서 “서양인들이 처음에는 아이를 잘 대우하겠지만 미국에라도 데리고 가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겁을 주었기 때문이다. 스크랜턴은 어머니의 허락 없이는 한 발자국도 조선 땅에서 데리고 나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써주면서까지 학생을 붙잡고자 했다.

학생 모집난이 완화된 것은 1887년 2월, 배재학당과 마찬가지로 고종이 직접 학교의 이름을 정해 현판(懸板)을 내려준 이후였다. 조선 정부에서 학교의 이름을 정해준다는 것은 곧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가 조선 사회에서 공인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때 정해진 이름이 바로 ‘이화학당’이다. ‘이화(梨花)’라는 명칭의 근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정동 일대에 배밭이 많이 있었고 학당 터에 옛날 이화정(梨花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여기서 유래했다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설명인 듯하다.

현판이 내려진 이후 이화학당의 학생은 점차 증가하여 1900년에 학당 건물을 신축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는 여성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비롯한 언론에서 천부인권(天賦人權, 하늘이 사람에게 동등하게 부여한 권리) 사상에 근거한 만민평등 및 남녀평등의식을 고취하면서 여성의 교육권 또한 남성과 동등해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화학당의 교육은 이전보다 더욱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4 이화학당의 교육과 학제

이화학당이 지향했던 교육은 한 마디로 ‘한국인 자신을 위한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스크랜턴에 따르면 이화학당의 목표는 한국 소녀들을 외국인의 생활, 의복, 환경에 맞게끔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 한국인을 더 나은 한국인으로 만들고 한국적인 것에 긍지를 갖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 목표를 체계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이화학당의 학제가 정비된 것은 학교 설립 이후 약 20년 만인 1904년이었다. 개학 초기 한동안 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전까지 정해진 학제나 학년이 없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는 평균 10세 전후의 학생이 입학하여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결혼할 때까지 10여 년을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학생 수가 늘어나 여성 교육을 활발하게 진행할 수 있었던 1900년대에 들어서야 학제 정비가 시작되었고, 1904년 처음으로 정부 인가를 받아 4년제 중등과(中等科)를 설치할 수 있었다. 이때 이화학당 최초의 학칙 또한 만들어졌다. 이에 따르면 중등과의 수업연한은 4년이며 정원은 80명, 입학연령은 14세부터 22세까지였다.

당시 학생들은 어떤 과목을 공부했을까. 1904년 학칙의 교과 과정은 국어, 한문, 산술, 역사, 지리, 성경, 영어, 이과, 도화(미술), 생리(위생), 음악, 작문습자, 재봉, 체조 등의 14과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업 시수에 따라 중요도를 평가했을 때 국어, 한문, 영어 그리고 수학이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과목이었다. 그 외에 교과 과정에서 엿보이는 흥미로운 점은 학년별 역사 과목의 편제라고 할 수 있다. 1학년 때 조선사를, 2학년 때 고구려와 신라사를, 3학년 때 고려사를, 4학년 때 미국사를 공부하는 것으로 보아 고대부터 당대(當代)까지 시계열적으로 역사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학당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역사 교육을 시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등과가 설치된 지 4년 만인 1908년 6월에는 제1회 중등과 졸업식이 열렸다. 결혼이 곧 졸업이었던 이전과는 달리, 이화학당은 체제 정비와 함께 여성을 위한 중등교육기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해 가을에는 4년제 초등과(初等科)와 4년제 고등과(高等科)도 설치하여 초, 중, 고등과정의 정규 학제를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 이후 통감부(統監府)는 학교 교육을 제한하기 위한 목적 아래 교육 제도를 개편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韓日倂合) 이후에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여 1911년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을 제정, 식민 본국(일본)과 식민지(조선)의 교육 과정에 차별을 두었다. 식민 본국의 학제는 소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 전문학교, 대학교로 이어졌고, 식민지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반면 식민지 조선인에게는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 실업학교, 전문학교의 학제가 적용되어 인정되는 학력을 전반적으로 낮추었다.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이 반포되고 나서야 일본과 조선의 교육제도가 일치되면서 조선의 고등교육(대학)이 허가되었다. 식민지 시기 조선총독부의 관리와 통제 아래 포섭될 수밖에 없었던 사립학교인 이화학당 또한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조선총독부의 정식 인가를 받아 식민지 조선에서의 여성 교육을 계속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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