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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물산장려회

물산장려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자

1920년 ~ 1940년

1 조선물산장려회의 결성

조선물산장려회는 1923년 1월 20일 창립되었다. 3․1 운동 직후 제창된 민족주의자들의 ‘경제적 실력 양성 운동’이 조선물산장려회라는 단체의 창립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1월 20일 저녁 7시에 서울 낙원동 협성학교(協成學校)에 50여 명이 모여 임시의장 설태희(薛泰熙)의 사회로 조선물산장려회 발기총회를 개최하였다. 발기총회에서는 창립준비위원으로 이종린(李鍾鱗), 정로식(鄭魯湜), 김윤수(金潤秀), 박동완(朴東完), 김철수(金喆壽), 한인봉(韓仁鳳), 고용환(高龍煥), 김동혁(金東赫) 등을 선출하였다. 이어 10시에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조선물산장려회취지서를 채택하였다. ‘우리 조선 사람의 물산을 장려하기 위하여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을 사 쓰고, 조선 사람은 단결하여 그 쓰는 물건을 스스로 제작하여 공급하자’는 내용의 취지서였다. 그리고 23일에 창립총회를 속개하기로 결정하고, 헌칙(憲則)도 이때 제정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헌칙 제정위원 2명을 선출하고 폐회하였다.

1월 23일 저녁 7시에 다시 열린 창립총회에서는 회비를 50전 이상으로 결정하고, 조선물산장려회 헌칙을 제정하였다. 헌칙 제3조는 ‘본 회는 조선 물산을 장려하며 조선인의 산업을 진흥하여 조선인 경제상 자립을 도(圖)함을 목적함’이라고, 조선물산장려회 설립 목적을 밝혔다. 그리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①산업장려는 조선인의 산업적 지능을 계발 단련하여 실업에 입각케 함, ②애용장려는 조선인의 산품을 애용무육(愛用撫育)하여 조선인의 산업을 융성케 함, ③경제적 지도는 조선인의 생활 및 기타에 관하여 경제적으로 건설 또는 개선할 바 일반 사항을 조사 강구하여 그 실현을 지도 관철함 등 3가지를 제시하였다(세칙 제2조). 또한 ①의복은 우선 남자는 주의(周衣)를, 여자는 치마를 본목(本木)으로 염색하여 음력 정월 1일부터 즉시 행할 것, ②음식은 사탕 식염 청량음료 과실을 제한 이외에는 토산을 사용할 것, ③일용품에 대하여는 가급적 토산을 사용하되 부득이한 경우에 한하여 외국품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경제적 실용품으로 가급적 절약할 것 등을 실행조건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방법과 유지방침 등은 20인으로 구성된 신임 이사회에 일임하였다. 이날 선출된 이사는 유성준(兪星濬, 이사장), 김철수, 나경석, 임경호(이상 상무이사) 설태희, 이종린, 백관수, 이득년, 이순탁, 김윤수, 박봉서, 한인봉, 오현주, 이시완, 박동완, 이갑성, 김동혁, 김덕창, 고용환, 정로식 등이다.

하지만 조선물산장려회는 1923년 여름 이후 물산장려운동의 열기가 시들해지면서 설립된 지 불과 반년 남짓 만에 활동이 정체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특히 1924년 4월 30일 개최된 제2회 정기총회를 분기로 조선물산장려회는 유명무실한 조직으로 전락하였다. 실무와 재정을 책임진 이사회가 거의 열리지 못하였으며, 극도의 재정난 속에서 사무실 임대료도 마련하지 못해 이곳저곳 전전하는 상태가 되었다. 다만, 이 시기 조선물산장려회의 가장 큰 성과는 1923년 12월부터 기관지 『산업계(産業界)』를 발간한 것이었다. 1923년 12월 1일 당시 조선물산장려회 이사장 유성준(兪星濬)을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하여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하지만 조선물산장려회의 침체에 따라 『산업계』도 1924년 9월 제5호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2 1920년대 중반 이후 조직 재건과 기관지 발간

조선물산장려회가 조직 재건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은 1925년이다. 그 산파역을 한 사람은 명제세(明濟世)였다. 조선물산장려회 침체기에 유일하게 사무실을 지킨 명제세는 1925년 7월 8일 조선물산장려회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설태희와 조직 재건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들은 조선물산장려회 재건에 동정하는 회원으로 유지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이사장 유성준을 비롯한 회원들을 일일이 방문하여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1925년 9월 30일까지 120명의 유지회원을 모집하고, 10월 3일 부흥총회(제3회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25명의 새로운 이사진을 구성하였다. 이사장 유성준은 그대로 유임되었고, 상무이사는 김광준, 김종협, 명제세, 선우전, 소철수, 안석 등 6명으로 늘렸다. 이사는 고원중, 고유상, 김주병, 김준배, 김태화, 박천병, 서우충, 설태희, 송종우, 안재홍, 이정욱, 이인, 이종린, 조동식, 최원순, 한기악, 한운교, 현희운 등 18명이 선출되었다. 상무이사와 이사 가운데 절반 이상이 새로 선출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 재건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물산장려회의 활동은 여전히 부진하였다. 정기적인 이사회 개최에 급급했으며, 연사가 없어 강연회가 무기 연기되기도 하였다.

이에 조선물산장려회에서는 1927년 2월 15일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공석 중인 이사장에 이규완(李圭完)을 추대하였으며, 상무이사 명제세(경리부), 백홍균(선전부), 김종협(조사부) 외에 영화선전부 주임 현희운(玄僖運)으로 임원진을 보강하는 등 조직 재건을 위한 기틀을 마련해 나갔다. 그리고 『자활(自活)』을 기관지로 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3월 3일에 이규완을 사장으로, 현희운을 주필로 한 자활사를 설립하여, 1927년 7월 타블로이드판 형식의 『자활』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1929년 9월 통권 12호를 끝으로 발행이 중단된 『자활』은 조선 각지는 물론 일본 중국 러시아 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들에게까지 무로로 배포되었다.

1928년 4월 30일에 열린 제6회 정기총회에서 당시 신간회 간부로 활동하고 있던 오화영(吳華英)을 3대 이사장으로 선출하였으며, 각 방면의 인사들을 영입하여 35명으로 이루어진 이사진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재원을 확보하고 대중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회원 확충과 지방지회 조직에 노력하였다. 또한 실질적인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상공인, 기술자 등과의 연계 강화에 노력하였다. 그 결과 이후 조선물산장려회 이사진에는 명망가보다는 실무형 인물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새롭게 조선물산장려회에 참여한 인물이 건축청부회사 건양사 전무 정세권(鄭世權)이다. 정세권은 1929년 4월 26일 제7회 정기대회에서 본부 상무이사로 선출된 이후 약 3년간 조선물산장려회 경상비와 기관지 간행 비용 등 재정의 상당 부분을 전담하였다. 그리고 1930년부터는 전임상무로써 조선물산장려회 사업 전반을 총괄하였다.

1929년 8월 9일에 열린 제38회 상무이사회에서는 기관지 『자활』을 개인에게 양도하고, 대신에 조선물산장려회 직영으로 『회보』를 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회보』에는 조선물산장려회의 과거 역사와 현재 내용, 장래 계획 등을 게재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회보의 편집 겸 발행인은 명제세가 맡기로 하였으며, 경리와 서무는 정세권이 담당하기로 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조선물산장려회의 새로운 기관지가 『회보』라는 명칭으로 1929년 10월 15일 간행되었다. 『회보』는 제2호(1930.1.15)부터 『조선물산장려회보』로 명칭을 변경하여 제12호(1930.12.15.)까지 간행되었다. 그런데 1930년 11월 25일에 열린 제63회 상무이사회에서 다시 한번 기관지의 명칭을 변경하기로 결정하였다. 회원에게 국한하였던 회보를 개혁하여 광범위한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일반 잡지 『장산』을 간행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31년 1월호부터 『회보』 제1권 제12호의 발행호수를 이은 『장산』 제2권 제1호가 간행되었다. 편집 겸 발행인은 정세권, 주필은 유광렬이었다.

3 상공인 층의 참여와 조직의 분열

조선물산장려회는 정세권을 비롯한 상공인, 기술자 등이 참여한 1929년 이래 안정적인 기관지 발간은 물론 애용장려, 생산장려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등 일정한 활기를 띄어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조선물산장려회는 심각한 내부 갈등을 빚었다. 1925년 ‘부흥총회’를 전후한 이래 조직 재건을 주도한 인물들과 새롭게 등장한 정세권 사이에 조선물산장려회 운영방침 등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난 것이다. 특히 이 갈등은 정세권이 장산사를 설립하여 기관지 발간을 비롯한 조선물산장려회 사업 전체를 관장하게 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정세권은 1931년 7월에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 발행권을 명제세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월간잡지 『장산』은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로서 정세권 씨가 그 경리를 독담하여 자기 명의로 발행하던 것인데 지난 7월 9일 물산장려회와 정세권 씨 간에 협의한 결과 『장산』이 폐지되고 정세권 씨는 월간잡지 『실생활(實生活)』을 8월 1일부터 발행하고 물산장려회에서는 월간잡지 『신조선(新朝鮮)』을 기관지로 발행 준비 중인 바 『장산』 독자 제 씨는 『신조선』을 계속한다던지 『실생활』을 계속한다던지 혹은 대금을 반환하라고 하던지 이상 3조건 중 하나를 지정하시기를 바란다.’는 사고(社告)를 장산사 명의로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물산장려회에서는 『장산』의 발행호수를 이어받아 1931년 8월에 명제세를 편집 겸 발행인으로 한 『신조선』 제2권 제7호(장산 개제호)를 발행하였다. 『신조선』은 상공업에 관련된 글이나 실용적인 글이 주로 실린 『장산』과 달리 ‘맑스주의적 견지와 조선물산장려운동’, ‘소비에트 러시아 5개년계획과 제1년의 실적’, ‘필리핀의 독립운동’, ‘덴마크의 물산장려’ 등과 같은 글이 게재되었다.

한편 정세권은 1931년 8월 장산사의 독자적인 기관지로 『실생활』 창간호(제1권 제1호)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실생활』 창간 목적을 ‘조선 중심의 특수한 생활양식과 조선 중심의 특수한 산업기술을 고조하며 공리공론을 배제하고 우리 실생활 향상의 일조가 되려 함’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를 위해 『실생활』에는 주로 ‘농업의 다각화 또는 과학적 경영’, ‘공산품의 이공화’, ‘상공업가와의 연락’, ‘일반적으로 생활의 개선’ 등에 관한 내용을 소개하겠다고 하였다.

조선물산장려회 간부들의 갈등이 결국 두 개의 잡지(『신조선』과 『실생활』) 발행으로 표면화된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 발간비용을 담당하고 있던 정세권이 별도의 잡지를 간행하면서 조선물산장려회는 재정적으로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조선물산장려회는 장산사와 협의하여 『신조선』과 『실생활』을 합쳐서 하나의 잡지를 내기로 결정하였다. 1931년 10월호부터 잡지명은 『실생활』로 하고, 발행호수는 『신조선』을 계승하여 제2권 제9호로 발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기관지를 발행을 담당할 기관으로 실생활사를 별도로 설립하기로 하였다. 사장은 이종린이 맡기로 하였고, 정세권이 『실생활』의 편집 겸 발행인은 물론 경리책임까지 맡기로 하였다.

이 합의가 나온 직후에 발간된 『실생활』 1931년 10월호는 제1권 제3호로 나오게 되었고, 11월호부터 제2권 10호로 발행되었다. 이에 따라 『신조선』이라는 제호로 간행된 잡지는 통권 2호에 그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실생활』은 여전히 장산사 명의로 발행되었다. 실생활사를 설립, 운영할 구체적인 방법과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게 되자 결국 장산사 명의로 1934년 3월호(제5권 제3호)까지 계속 발행되었다.

정세권을 중심으로 한 장산사는 『실생활』 독자를 중심으로 각 지방에 지사를 설립하는 등 독자적인 조직 기반을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조선물산장려회와는 무관하게 별도의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결국 정세권은 1932년 12월 조선물산장려회와 장산사의 관계 단절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한편 장산사 이탈과 함께 일시 ‘붕괴’상태에 직면한 조선물산장려회는 1933년 5월 16일 제11회 정기대회 를 통해 이인(李仁)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이사진을 보강하는 등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 정비를 바탕으로 기관지 복간을 서둘러 1933년 10월 『신흥조선(新興朝鮮)』이라는 제호를 가진 기관지를 다시 간행하였다. 당시 회장을 맡고 있던 이인을 편집 겸 발행인으로 한 『신흥조선』은 1934년 1월 제3호까지 간행되고 이후 발행이 중단되었다. 이후에도 조선물산장려회에서는 기관지를 다시 발행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하였으나 1937년 2월 조직을 해산할 때까지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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