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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조선통치를 위한 역사편찬기관

1925년

조선사편수회 대표 이미지

조선사편수회 위원장 및 회장

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1938)

1 개요

3·1 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조선반도사’ 편찬이라는 기존의 방침을 바꾸어 『조선사』 편수를 기획했다. 이를 위해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했으며, 1925년 6월에는 위원회를 조선사편수회로 재편하였다. 1938년에 『조선사』(35권)를 완간하였으며, 수집한 사료들을 선별하여 『조선사료총간』과 『조선사료집진』 등의 사료집을 편찬했다. 1944년에는 『근대조선사연구』와 『조선통치사논고』를 간행하였다. 조선사편수회는 학자들의 개인 연구를 관 주도의 연구로 재편하면서 ‘조선사’를 통치기구가 독점하는 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1946년 5월 31일에 공식 해산되었다. 조선사편수회의 소장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전신인 국사관(國史館)이 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조선반도사’ 편찬이 중단되다

일본은 조선통치를 위해 강점을 전후한 시기부터 조선의 제도나 관습을 세밀히 조사하였다. 1910년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취조국과 참사관실이 이러한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다. 이 업무는 1915년 4월 30일 「조선총독부중추원관제」의 개정을 통해 중추원 편찬과로 이관되었다. 총독부는 강점 이후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 어윤적(魚允迪)의 『동사연표(東史年表)』 등에서 나타나는 단군 중심의 역사 인식에 대응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이에 중추원은 1915년 7월부터 ‘조선반도사편찬사업’을 공식적으로 개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 7월에 「조선반도사편찬요항」을 발표하였다. 이 요지에서 ‘조선반도사’의 편찬이 “민의 지능 덕성을 계발하여 이들을 충량한 제국 신민임에 부끄러움 없는 지위로 부도(扶導)함을 기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조선반도사’ 편찬은 이러한 목표를 가지고 일본과 조선이 ‘동족’임을 밝히는 동시에 조선이 흥망기복(興亡起伏)을 거듭하여 인민이 빈약해졌지만 ‘병합’으로 행복해졌다는 내용을 담고자 했다. 총설을 제외하고 모두 6편 체제로 구상되었는데, 이 중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집필한 1~3편과 세노 우마쿠마(瀬野馬熊)와 스기모토 쇼스케(杉本正介)가 담당한 5, 6편의 일부만 원고가 남아 있다. 다만 집필을 위한 세부목차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총설 / 제1편 상고삼한 제1기 原始時代 제2기 漢嶺土時代 / 제2편 三國(고구려, 신라, 백제) 제1기 삼국성립시대 제2기 삼국 및 加羅시대(일본의 保證時代) 제3기 삼국정립시대 / 제3편 통일후의 신라(당의 복속시대) 제1기 신라융성시대 제2기 쇠퇴시대 / 제4편 고려 제1기 흥융시대 제2기 遼藩附시대 제3기 무신전권시대 제4기 원복속시대 / 제5편 조선 제1기 융성시대 제2기 외난시대 제3기 청복속시대 / 제6편 朝鮮最近史 제1기 淸勢力減退時代 제2기 獨立時代 제3기 日本保護政治時代

‘조선반도사’는 조선인의 기원을 삼한으로 잡고, 이들이 주축이 된 백제와 신라를 조선의 역사로 보되 단군과 기자를 조선의 역사에서 제외하였다. 또한 조선과 일본이 하나가 되는 것을 “행복과 영예”로 표현하였다. 이처럼 ‘조선반도사’의 서술 방향은 그때까지 체계화된 조선인들의 역사의식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조선반도사’ 편찬은 3·1 운동 이후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조직되고 중추원 편찬과가 1922년 말에 폐지되면서 실질적으로 중단되었다. ‘조선반도사’ 편찬을 위해 수집한 사료와 그때까지의 결과물은 『조선사』 편찬에 활용되었다.

3 『조선사』 편수를 위한 역사편찬기구가 설립되다

3·1 운동 이후, 문화정치를 표방한 조선총독부는 기존의 역사 편찬 기조를 바꾸었다. 총독부는 ‘조선반도사’가 추구했던 역사서술이 조선인의 반발을 초래하지 않을지 염려했다. 이에 조선의 전통과 문화를 인정하면서도 일본 제국으로 포섭할 수 있는 근거를 역사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1921년부터 위원장에 정무총감, 부위원장에 조선인을 두는 ‘조선사편찬위원회’(이하 편찬위원회)가 계획되었다. 1922년 12월 4일 조선총독부훈령 제64호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이 공포되면서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당초 편찬위원회는 『조선사』 편찬에 5년을 계획하였으나 곧바로 10년으로 계획을 수정하여 사료수집에 3년, 다시 사료수집과 편찬 및 기고에 5년, 초고정리와 인쇄에 2년을 할당하였다. 이후 1923년의 관동대지진에 따른 예산 긴축으로 2개년이 연장되는 등의 변동을 겪었다.

편찬위원회는 중추원 부속기관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역사편찬기구인 사료편찬괘와 유신사료편찬회를 모델로 기구의 위상을 재고하고자 하였다. 1925년 4월 10일 내각총리대신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가 「조선사편찬회관제 제정의 건」을 각의에 상정하였다. 약 한 달 후인 5월 6일에는 「유신사료판찬회관제」를 참고사항으로 첨부한 문서가 법제국장에게 송부되었다. 다시 한 달 뒤인 1925년 6월 6일, 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관제」가 공포되었다. 이로써 조선사편수회(이하 편수회)는 총독 직할의 독립기구로 위상이 결정되었다. 조선사편찬위원회와 조선사편수회에는 다수의 조선인 고문과 위원이 선임되었다. 특히 중추원 관련 인사들이 대거 기용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편수회가 총독 직할 기구가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유지되었다. 조선인 중에는 최남선(崔南善)처럼 3·1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도 있었으나 이전부터 총독부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사람들이 대거 등용되었다. 예를 들어 정만조(鄭萬朝), 어윤적은 강점 직후 참사관실에서 근무했다. 유맹(劉猛), 홍희(洪憙)는 중추원 참의로서 구관제도 조사의 촉탁을 맡았던 인물이다. 이능화(李能和)는 총독부 편수관이었으며, 이병소(李秉韶)는 이왕직과 관련을 맺고 고종실록과 순종실록 편찬에 관계했다. 조선인은 수사관 또는 수사관보로 재직하면서 편수회 업무를 실질적으로 담당하였다. 이를테면 홍희와 신석호(申奭鎬)는 수사관에, 이병도(李丙燾)는 수사관보로 활동했다.

일본인 위원은 크게 관료 출신과 학자 출신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학무국이나 중추원 등의 중앙에서 이력을 쌓았으며, 몇몇은 지방관으로서 이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편수회 활동에 크게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편수회에 참여한 학자로서는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를 필두로 오다 쇼고(小田省吾), 이마니시 류, 마쓰이 히토시(松井等),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 나카무라 히데타카(中村榮孝)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이들은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뒤 도쿄제국대학, 교토제국대학, 경성제국대학 등에 재직하면서 편수회에 참여하였다. 이 중에 구로이타는 편찬위원회와 편수회 사업을 시종일관 진두지휘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4 『조선사』(전35권)가 완간되다

조선총독부는 편찬위원회와 편수회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편찬위원회 초대 위원장 아리요시 주이치(有吉忠一) 정무총감은 1923년 1월 8일에 열린 제1차 회의에서 “조선 전토의 모든 자료를 집대성”할 것을 지시하였다. 아리요시는 조선사 편찬을 위해 지방 관공서와 민간에 산재된 문서 중에 사료가 될 만한 것을 수집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1923년 6월부터는 각 도장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수집대상은 양안(量案), 호적(戶籍), 제결(題決), 입안(立案), 문기(文記), 징세(徵稅), 등록(謄錄), 읍지(邑誌), 예의(禮儀), 기타 모두 10가지 유형으로 정리되었다. 이것을 정리하여 1926년에 『古記錄文書蒐集ニ關スル件』을 편찬하였다. 이후에도 편수회의 사료 조사는 지방관청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진행되었다.

『조선사』 편찬을 위한 편수회의 내부 정비와 업무 분담은 대략 1927년을 전후하여 완성되었다. 편수회는 당초 1933년을 편찬사업의 완료시점으로 잡았으나 1938년에 이르러서야 6편 체제의 『조선사』(총 35권)가 편찬되었다. 1926년 6월에 편당 담당자가 결정되었을 때, 1~3편은 이마니시와 이병도, 4편은 나카무라와 쓰루미 다쓰키치(鶴見立吉), 5편은 이나바와 다카하시 다쿠지(高橋琢二), 6편은 세노가 맡기로 되었지만 사업이 장기화되면서 많은 변동이 있었다. 1938년까지 수집된 자료는 도서 4,950책, 사진 4,510권, 문권(文券)·화상(畫像)·편액(扁額) 등이 453점이다. 수집된 사료와 고문서를 선별하여 『조선사료총간』(20집)과 『朝鮮史料集眞』(3권)을 출간하였는데, 『조선사료총간』에는 임진왜란 관련 사료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특징이다.

편수회 참가자들은 1926년 1월에 조선사학동고회(朝鮮史學同교會)를 결성하고 회지 『조선사학』을 간행하였다. 이들은 『조선사학』의 창간사에서 “조선사를 연구하는 것은 국사를 위한 것이요, 이미 국사의 일부가 된 조선사를 위함이다”라고 하면서 연구 방향을 명확히 하였다. 또한 편수회 소속 학자들은 수시로 사담회(史談會)를 개최하였다. 이처럼 편수회는 準학술단체의 기능도 수행함으로써 일본인들의 한국사연구에서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1930년대에는 편수회 임원들에 의해 청구학회가 조직되기도 한다.

1938년 『조선사』 간행이 마무리되자 편수회는 기구를 축소하여 갑오개혁에서 강점에 이르는 기간의 자료를 수집하는 데 착수하였다. 이와 더불어 『조선사』의 색인과 연표도 만들었다. 1938년 10월에 『조선사권수총목록(朝鮮史卷首總目錄)』, 1940년에 『조선사총색인(朝鮮史總索引)』을 간행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편수회는 ‘연구보국’의 맥락으로 『조선사편수회연구휘찬』의 간행을 계획했다. 그 결과 1944년에 『근대조선사연구』(제1집)와 『조선통치사논고』(제2집)가 간행되었다. 이밖에 다양한 사업을 새롭게 추진하였으나 해방과 함께 중지되었으며, 1946년 5월 31일 해산하였다. 이후 국사편찬위원회의 전신인 국사관(國史館)이 조선사편수회의 소장 자료를 접수하며 활동을 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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