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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한중연합을 통해 중국 대륙을 누비며 일본에 저항하다

1938년

조선의용대 대표 이미지

조선의용대 성립기념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는 1938년 10월 10일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서 창설된 한중연합 군대이다. 기관지 『조선의용대통신(朝鮮義勇隊通訊)』을 발간하였고, 구이린(桂林)에서 활동하다 1941년 7월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별도로 창설되었다. 주로 무장선전, 간부양성, 후방활동을 맡았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초기의 조선의용대와 달리 점차 중국공산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며 1942년 7월부터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화북지대로 개칭하였다. 1942년 봄 일부 대원이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흡수된 뒤였다. 조선의용대는 한중연합을 통해 항일운동을 펼쳤으며, 특히 화북지역에서의 활동은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민첩하게 대응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2 한중연합의 필요성과 조선의용대의 창설

1937년 7월 7일 발생한 노구교(蘆溝橋) 사건을 계기로 중일 간의 전면전이 발발했다. 중국에서는 항일을 위한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달성되었다. 이때 조선인 민족운동가들은 전쟁이 민족해방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라 여겼다.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의 김원봉(金元鳳)은 조선 국내 혁명동지들에게 중국의 항일전쟁은 중국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것만이 아니라 조선의 독을 보장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인들에게 한중 민족 간의 전면적 합작을 주장했다. 이는 조선의용대가 선전공작을 진행한 뒤 중국 동포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출현한 주장이었다.

1938년 10월 초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 지도위원회에는 조선인 대표들이 거의 절반을 차지하여 어느 정도 자주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조선의용대의 창설은 국제적인 반(反) 파시스트 세력을 이용한 우회 전략이 거둔 결실이었다. 조선인들은 중국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조선인에 우호적인 중국인은 물론 일본 공산주의자의 힘도 동원했다. 또한 중일전쟁 초기에 조선인 군대 창설안을 중국 최고 군사 당국자에게 올려 조선의용대 결성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다만 조선의용대는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 장제스(蔣介石)의 직계 영향력이 강력하게 미쳤다. 조선의용대는 지휘계통상 장제스가 위원장인 중국군사위원회(中國軍事委員會)의 산하에 있었으며, 실권자인 김원봉이 남의사(藍衣社) 계열과 협조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의사란 중국국민당의 비밀 정보기관으로서, 1931년 황푸군관학교(黄埔軍官學校) 출신의 중국국민당 우파가 모여 결성한 조직이었다.

조선의용대는 전투부대가 아니라 무장 정치선전대로 출범했다. 중국에게 항일전쟁은 군사투쟁이자 침략자에 대한 저항이라는 ‘정의의 전쟁’이었다. 중국은 군비의 열세를 도덕적 우위성을 통해 보충하려 하였고, 조선의용대는 대(對) 일본군과 대(對) 중국인 선전 임무를 부여받고 창설되었다.

창립 당시 조선의용대는 대본부와 제1구대·제2구대로 조직되었다. 대장은 김원봉이 맡았다. 이후 대본부와 제1구대가 절반씩 나뉘어 결합하여 각각 제1지대와 3지대로 확대 발전하였으며, 제2구대는 제2지대로 개편되었다. 조선의용대는 비록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정신적으로는 한인이 주축이 된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지도를 받는 항일부대였다.

3 조선의용대 대본부, 구이린(桂林)에 안착하다

조선의용대 대본부(大本部)는 구이린에서 1938년 11월부터 1940년 3월까지 약 1년 3개월 동안 주둔했다. 초기에 조선의용대 대본부는 구이린에서 통신처를 공산당 계열의 서점에 두었을 정도로 독자적 공간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점차 일본의 공습을 쉽게 피할 수 있는 장소로 옮기면서 조선의용대 대본부는 광서(廣西) 당국과 긴밀히 연대했다. 대본부의 인원은 초기에 십수 명에 불과했으며 후방이나 최전방으로 파견되었다.

구이린은 광서계(廣西系) 군벌이 반(半)독립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던 곳이다. 중국군사위원회(中國軍事委員會) 서남행영(西南行營) 주임을 맡았던 보충시(白崇禧)는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조선인과 베트남의 민족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처럼 조선의용대 대본부는 광서계와 장제스 직계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이들의 지원과 지도를 받으며 활동했다. 또한 조선의용대는 중국공산당과도 관계를 맺었는데, 중국공산당은 자신의 영향력에 있던 서점, 신문, 개별 인사를 통해 조선의용대를 지원했다.

구이린에서 조선의용대는 국제연대를 모범적으로 실천했다. 조선의용대 대본부는 스스로 집회를 개최해 조선인의 처지나 항일의지를 선전하였고, 반대로 중국인들의 집회에 참여해 재난 중에 있던 중국인들을 위로하고 고무했다. 구이린에서 조선의용대는 일본의 반전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한편 구이린에서 조선인의용대는 조선인 민간인들을 훈련시켜 대오(隊伍)를 확대했다. 100여 명으로 출발했던 조선의용대는 구이린 시기 31명의 민간인 출신 조선인 ‘포로’를 의용대원으로 받아들였다. 이들을 흡수한 조선의용대는 직접 적 후방으로 들어가고자 1939년 10월 화북으로 북상을 시작했다.

4 기관지 『조선의용대통신』 발간

조선의용대 대본부의 뚜렷한 활동 중 하나는 기관지 『조선의용대통신』의 발간이었다. 『조선의용대통신』은 1939년 1월 15일에 처음 발간되었다. 처음에는 정치조(政治組)가 발간을 책임졌고 1939년 10월 이후에는 증설된 편집위원회가 책임진 것으로 추정된다. 발간에는 중국인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역할도 컸다. 그들은 조선인들이 쓴 각종 보고문과 연설문 등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조선의용대통신』의 발간 목적은 한중연합을 통해 항일활동을 전개하기 위한 토론의 장, 경험 교류의 장, 상호 비평의 장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조선의용대통신』의 배포지역은 매우 광범위했다. 각종 전구(戰區)와 도시에 모두 배포되었으며, 해외에서도 구독이 가능했다.

『조선의용대통신』 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조선의용대의 활동 내용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제1구대의 최전방 활동 소식이 많았다. 둘째, 조선의용대의 활동을 격려하고 조언하는 중국인들의 글이 많이 실렸다. 기념 집회에서 연설한 내용을 옮긴 것도 있고 새로이 기명으로 투고한 것도 있었다. 조선인들의 처지를 동정하는 글, 조선인들의 저항운동을 찬양하는 글, 중국의 항전을 지원하는 조선인과 조선의용대의 활동에 감사를 표하는 글들이 담겨있었다. 또한 대적(對敵) 선전의 방법 등 실무적인 내용도 실렸다. 한편 조선의용대의 노선에 관련한 글도 실렸다. 노선 설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필자는 대장 김원봉, 정치조장 김성숙(金星淑)과 김학무(金學武) 등이었다.

『조선의용대통신』에 드러난 투쟁방법은 구이린 시기에 초기와 후기에 노선상의 차이가 있었다. 초기는 국내 침투 및 반일 폭동 조직에 무게를 두었다. 이는 초기 의열단 이래의 중국 관내지방 조선인 좌파들의 오랜 노선이었다. 반면 후반에는 화북·동북의 조선 민중을 쟁취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전략으로 제시했다. 이런 노선의 변화는 조선인 ‘포로’ 공작의 성과를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의용대통신』의 주목할 점 중 하나는 목각(木刻) 판화(版畵)가 꾸준히 게재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의용대통신』에는 유명한 중국인 화가들의 목판화가 많이 실렸다. 목판화는 시각적 효과가 뛰어났기 때문에 항일운동의 주요한 도구가 되었다.

5 화북(華北)지대에서 활동한 조선의용대

조선의용대는 1941년 여름 화북(華北)지역의 팔로군(八路軍) 근거지로 이동했다. 이곳에는 이미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조선인들이 있었다. 이들과 함께 1941년 7월 7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1941년 7월부터 1942년 7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칭하기 전까지 약 1년간 활동했다.

조선의용대가 화북 팔로군 지구로 향한 것은 두 집단을 통해서였다. 조선인이 많은 동북지방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동북노선’이 있었다. 이는 최창익(崔昌益)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주장했다. 이들은 일찍이 중국공산당 지구로 이동하여 동북 진출을 모색했다. 두 번째 세력은 김원봉과 김학무가 지도한 조선의용대 주력이었다. 이들은 2년 이상 중국국민당 지구에서 활동한 후 1941년 여름에 화북지역의 팔로군 지구로 이동했다.

조선의용대 주력이 화북지역 팔로군 지구로 이동한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조선 민중들 속에서 민족운동을 추진하고 대오를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 간의 갈등만이 아니라 조선의용대 측과 중국국민당의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며, 중국국민당 지구와 중국공산당 지구에 흩어져 있던 조선인 청년들의 통일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주요활동은 무장선전, 간부양성 등이었다. 팔로군 지구에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간부훈련을 개설하고 신입 대원을 교육했다. 이때 군사와 정치가 주된 내용이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팔로군과 함께 강력한 항일무장을 위한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그 외에도 소련 침략반대, 반(反)파쇼동맹 지지 등 공작 활동을 펼쳤다. 한편 조선의용대는 원래 중국국민당의 군사 대오를 띤 형태였으나, 화북지역에서 1년 동안 위와 같은 활동을 거치며 김원봉 등 중국국민당 지구에 남아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된 일부를 제외하고는 점차 중국공산당 팔로군 형태의 부대로 변화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활동의 의의는 무엇일까? 먼저 이 시기는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 7년의 항일활동 가운데 가장 치열하게 수행한 시기라 할 수 있다. 1941년 12월의 호가장 전투(胡家庄戰鬪), 1942년 5월의 반소탕전(反掃蕩戰)이 그 사례라 할 수 있으며, 특히 호가장 전투의 경우는 중국국민당과 공산당 양측에서 대대적으로 추도식을 치렀을 정도로 인정받았던 전투다. 두 번째는 국제정세에 민첩하게 대응하였다는 점이다. 1941년 6월 독소전쟁(獨蘇戰爭)의 개시,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 등 동아시아 정세는 빠르게 변했다. 이때 조선인 민족운동 단체 중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매우 발 빠르게 대응하여 항일운동을 펼친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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