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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형평사

백정의 신분을 해방하라

1923년

조선 형평사 대표 이미지

형평 운동 포스터

국립진주박물관

1 개요

조선 형평사는 백정의 신분해방을 목적으로 1923년 4월 24일에서 1935년 4월 24일까지 13년간 활동한 단체이다.

2 설립 배경

백정은 신분상 양인이었지만 군역의 의무를 지지 않았다. 이들은 거주가 제한되었고 별도로 관리되었으며 이에 따라 다른 사회구성원과 다르다는 차별적 인식이 강화되었다. 이와 같은 통제와 차별이 지속되면서 백정은 신분제상 최하층의 집단으로 취급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는 해체되기 시작하였으나 수백 년간 사회 운영 원리였던 신분제도가 하루아침에 유명무실해질 리는 없었다. 조선시대에 무적자였던 백정은 1896년 「호구조사규칙」이 반포되면서 일반인과 같이 호족이 등제되었다. 하지만 작업 란에 ‘도한(屠漢: 백정)’이라 기입되어 차별 당하였다. 하지만 제도의 변화는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지냈던 백정들에게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차별에 대한 갈등이 표출되었고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백정들의 활동도 일어났다. 1900년 2월 경상남도 진주에서는 백정들이 신분을 나타내는 머리 관을 쓰는 것에 항의하여 관청으로부터 자유롭게 관을 쓸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경북 예천, 황해도 해주에서도 차별철폐를 위한 활동이 일어났다. 또 1896년 관민 공동회에서 백정 박성춘이 백정이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합니다. 그러나 충군애국의 뜻은 알고 있습니다.” 라는 연설을 하였다. 백정은 근대 교육을 받아 의사 등 근대적 직업에 종사하거나 학교설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이처럼 차별철폐를 위한 백정들의 요구가 확대되었으며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백정들도 늘어났다.

조선 형평사가 결성된 진주에서는 백정들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모임을 가졌다. 1910년대에는 장지필(張志弼)이 도수영업 운동을 목적으로 도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기도 하였고 진주의 도살자들이 중심이 되어 경남 각 군의 도살자들에 통지하여 회합을 하였다. 1910년대에 백정들의 이러한 활동은 1923년 조선 형평사 출범의 기반이 되었다. 조선 형평사 설립의 직접적인 계기는 이학찬(李學贊) 자제의 입학 거부 사건이었다. 공사립학교에서 백정 자제인 이학찬 아이의 입학을 거부하였고 이 사건을 접한 신현수(申鉉壽)와 강상호(姜相鎬)가 형평 운동에 적극 동참하여 백정들의 형평 운동이 시작되었다. 또한 형평사보다 1년 먼저 일어난 일본 부락민의 차별철폐 운동인 수평 운동의 영향도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형평사 결성에 주도적 인물은 진주지역의 지식인들과 경제력을 갖춘 백정들이었다. 백정들은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았지만 경제적으로는 일반민에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주도적 인물 증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정희찬 등은 진주지역 사회운동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사회운동가였으며 장지필은 백정 출신의 지식인이었고 이희찬은 진주 상설시장에서 식육업을 하여 경제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3 창립과 조직 확대

조선 형평사는 경상남도 진주에 백정 출신이면서 자산가로 성공한 이학찬, 장지필과 백정 출신이 아닌 당시 조선일보 진주 지사장으로 있던 신현수, 강상호 등이 결성하였다. 창립대회는 1923년 4월 24일 진주의 대안동에서 회원 8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根本)이요 애정의 인류의 양본(良本)이라 그럼으로 아등은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야 우리도 참 사람이 되기를 기(期)함이 본사의 주지니라. 우리도 조선민족 이천만의 분자이며 갑오년 6월부터 칙령으로 백정의 칭호를 없이하고 평민 된 우리나라 애정으로 상부상조하야 생활의 안정을 도(圖)하며 공동의 존영을 기하고자 자(玆)에 40여 만이 단결하야 본사의 목적된 바 그 주지를 선명히 표방코자 하노라’라 밝힌 창립취지문을 보면 형평사가 차별을 철폐하여 모두가 평등하게 대우받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5월 13일에는 창립축하식을 거행하였다. 각 지역에 지도급 백정 100여명과 내빈 500명이 참석한 속에서 치러진 축하식은 형평사의 창립을 내외적으로 선전하는 장이었다. 형평사는 백정들에게 형평 운동을 이해시켜 가입을 유도하기 위하여 선전대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진주에서 시작된 형평사 운동은 창립 두어 달 만에 경상도를 넘어서 전라도, 충청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형평사가 창립되자 재일사회단체, 진주노동공제회 등 각 지방의 사회운동 단체들이 형평 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동아일보』는 초기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이내 지지를 표명하였다. 각 지역에 형평사 지사·분사는 지역의 노동공제회, 청년단체의 후원 하에 결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창립 1년 후에는 전국에 본사 1개 지사 12개 분사 67개 등 80개의 조직체가 설립되어 순식간에 전국적인 운동단체로 발전하였다.

형평사 지회 분회가 전국적으로 건설되고 형평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운동 노선을 두고 대립이 발생하였다. 1924년 2월 부산에서 열린 임시 전국대회에서 본사의 위치를 놓고 갈등하였다. 표면적으로는 본사를 경성으로 이전하는 문제를 놓고 양 세력으로 분열한 듯 보이지만 대립은 지역적, 신분적 기반을 달리하는 두 세력의 활동 노선투쟁에 의해 발생하였다. 주로 백정 출신을 중심으로 한 ‘경성형평사총동맹본부’(‘형평사혁신동맹’-‘서울파’)는 경기, 강원, 전라도를 지역 기반으로 하였고 비(非)백정이 중심이 된 ‘진주형평사연맹총본부’(‘진주파’)는 경상도를 지역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진주파’는 온건한 직업적 사회운동가들과 부유한 백정 출신의 지도자들이 이끌었다 또한 양파의 분열에는 사회주의의 유입과 운동 노선, 사회운동에의 합류라는 문제가 있었다. ‘서울파’는 형평 운동이 계급운동과 제휴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진주파’는 총단결하여 해방운동에 힘을 기울일 것을 주장하였다. 본사를 경성으로 이전할 것을 주장하는 ‘서울파’ 형평사원들은 대전에서 모임을 갖고 별도의 조직을 만들기로 하여 1924년 3월 천안에서 회합을 갖고 ‘형평사혁신동맹’을 결성하였다. 결국 이 두 세력, ‘진주파’(보수파)와 ‘서울파’(혁신파) 간의 갈등으로 결성 1년 기념식은 진주와 경성에서 별도로 치러졌다.

하지만 두 세력은 곧 대립을 극복하고 통합을 실현하였다. 분열상태 속에서 백정들에 대한 차별과 반(反)형평시위가 일어났으며 이는 분열된 형평 운동을 단결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다. 형평사는 본부를 서울로 옮기고 중앙집행위원회를 개편하여 전국적인 백정 지도자들 참여시켰다. 이 과정에서 창립 초기에 지도세력이었던 온건한 입장을 지닌 진주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감소하였다. 지도세력의 교체는 형평 운동의 방향성에 영향을 주었다. 한편 실무를 진행하는 상무위원으로는 직업적 활동가들을 배치하였다. 이들은 교육 받은 백정들로서 형평사 외부의 지식인들과 협력하여 사회운동과 긴밀한 협조를 하는데 기여하였다. 또한 비백정 사회운동가도 상무위원으로 활약하게 하였다.

4 반(反)형평 운동과 형평사의 활동

형평사가 창립되고 형평 운동이 일어나면서 형평 운동에 반대하는 시위도 발생하였다. 1923년 5월 13일 형평사 창립축하식 다음날에 진주 지방의 농민 2,500명이 형평사 본부를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형평사에 관계가 있는 자에 대하여 백정과 동일하게 대우할 일, 우육은 절대로 비매(非買)동맹할 것. 진주청년회에 대하여 형평사와 절대로 관계가 없도록 할 것’ 등을 내걸며 반형평을 주장하였다. 이런 시위는 진주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백정에게 신분을 나타내는 모자인 ‘평량립’을 쓸 것을 강요하였고 전국적으로 백정 자제에 대한 교육거부 사례가 나타났다. 제천에서는 노동자가 백정을 집단 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백정에 대한 집단폭행은 간간히 발생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음식점에서 중국인이 형평사원을 폭행하자 주민들이 중국인에 동조하여 백정을 폭행하였다. 소위 ‘홍산사건’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반형평 사건이자 형평 운동의 성격에도 영향을 준 반형평 사건은 1925년에 수천 명의 농민이 예천형평분사를 습격한 ‘예천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형평 운동의 전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예천사건은 1925년 8월 9일 예천분사 창립 2주년 기념식에서 예천청년회장이 축사를 하던 중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면서 일어났다. “백정을 압박하는 것이 하등의 죄악이 될 것이 없다. 어느 시대·국가를 물론하고 국법이 있는 것이다. 그 국법을 어기다가 백정이 된 것이다. 그러니 백정을 압박하는 것이 결코 개인의 죄악이나 사회의 죄악이 아니다. 또 조선왕조 오백 년은 그와 같은 압박을 받았지마는 지금은 좋은 시대를 만나 형평 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칙령으로 차별을 철폐하였으니 형평사는 조직할 필요가 없다. 아무쪼록 돈을 많이 모아 공부만 잘하면 군수도 될 수 있다.” 이 발언에 대하여 공방이 이어졌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일반민들이 형평분사를 공격하였다. 사건은 확대되어 수 천 명의 군중들이 형평사원의 집을 뒤지고 형평사원을 구타하는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실려 단박에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이들 통해 백정에 대한 일반인의 뿌리 깊은 차별의식이 여과 없이 표출되었다. 형평 운동은 반형평 운동을 겪으면서 분열을 자제하고 조직 확대와 조직 강화, 외부 세력과의 연대를 추진하였다. 전국적으로 사원수가 늘어났고 청년회, 학우동맹과 권학단(아동교육기관), 여성회 등 하위단체들도 결성되었고 기관지 『세광』을 발간하였다. 기관지는 발간 후 얼마 되지 않아 발매금지 처분을 받았다. 형평사는 조직 강화를 위하여 외부 단체와의 협력을 도모하였다. 사회운동단체들은 ‘예천사건’ 때 형평사와 형평 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이에 대한 강연회를 개최하면서 형평 운동을 지원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형평사는 외부 연대 활동 강화하였다. 이런 가운데 형평 운동가들은 민족주의적인 입장이나 사회주의적 입장을 받아들였고 사회운동단체와 더욱 강력하게 교류하였다. 형평사가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하고 외부 사회단체와 연계하여 강려한 사회단체로 떠오르지 일제는 곧 형평사 통제에 나섰다. 일제는 1927년 ‘고려혁명당사건’ 과 1933년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을 일으켰다.

5 지도노선 갈등과 조선 형평사의 변질

1927년 고려공산당 사건에 혁신파들이 연루되어 투옥되면서 형평청년회와 형평학우동맹과 같은 하위 단체에서 활동하던 젊은이들이 새로운 지도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비백정 출신 지식인에서 교육받은 백정들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배경이 다양하였으며 사회주의운동 단체와 연대하여 급진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이로써 경남북에 근거를 둔 초기의 온건파 지도자(진주파)는 지도력을 상실해갔고 혁신파와 급진적 젊은 세력이 형평사를 주도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급진적 젊은 세력은 대중조직 해체론을 기반으로 형평 운동 단체의 해체를 주장하였다.

대중운동 조직 ‘해소론’은 사회주의 세력의 운동방침 변경에 따라 모든 대중조직에서 논의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1930년대 들어 정세를 ‘혁명적 고양기’라 판단하고 기존의 민족협동전선을 해소하고 기층 대중운동조직을 계급적으로 재편하는 것으로 운동 방침을 변경하였다. 형평사에 도착한 해소론은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다. 창기부터 참여한 지도자들은 형평사를 유지하려 하였고 급진적인 활동가들은 해소론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형평사는 해소되지 않고 여러 세력이 지도 집단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유지되었다. 1933년 1월 발생한 ‘형평청년전위동맹’ 사건은 형평 운동 지도세력 간에 힘의 균형을 깨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100명 정도의 젊은 활동가들이 연루되었고 1936년 무죄선고로 사건이 일단락 될 때까지 14명이 수감되었다. 이 사건으로 해소론 입장에 있던 급진세력이 몰락하였고 초기 지도세력이었던 경남지역의 온건한 보수파 인사들이 지도세력으로 중앙 무대에 다시 등장하였다. 일제는 전국적인 사회단체인 형평사가 사회주의 운동단체들과 연대하여 좌경화 되는 것을 차단하고 형평사를 통제하기 위하여 ‘형평청년전위동맹’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구금되었던 활동가들은 불기소처분, 기소유예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조선 형평사는 1935년 4월 24일 13차 정기총회에서 조직의 명칭을 대동사(大同社)로 변경하였다. 형평사는 이권 확보와 유지를 위한 이익단체로 변질되었으며 일제에 적극 협력하는 단체로 변화하였다.

조선 형평사는 일제강점기 전국 규모의 조직으로 가장 오랜 기간 활동은 사회운동단체였다. 조선시대에서 이어진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일제 강점기에도 이어졌다. 백정 자녀에 대한 입학 거부, 백정에게 가해진 조선 민중의 일방적 폭행과 반형평 운동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백정은 조선사회에서 소수자의 위치에 있었다. 즉 일제강점기에 백정은 일제에 의한 민족차별과 조선인들에 의한 사회적 차별이라는 2중 차별에 시달렸다. 그러나 근대사회에 들어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경제력과 학력을 갖춘 백정들은 조선 형평사를 만들어 사회를 향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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